## 411화
무언가가 고개를 들었다.
지직거리던 노이즈 같던 소음들에 이름이 주어지자 그것들은 구조와 형체를 갖추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머릿속 한편에서 낮게 울부짖는 것이 아닌, 지금 바로 내 발 밑에서 우르릉거리고 있었다.
밑바닥에서 울리는 듯한 다단조의 우울한 소리에 순간 바닥이 푹 하고 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의자에 앉아있는데도 빨려들어 가는 기분이라,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옆의 책상을 짚었다. 뭐라도 붙잡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타티아나?”
“……아.”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잠시만 기다려 달라 했다간 더한 걱정을 살 것 같았다. 난 고개를 흔들고, 대답했다.
“약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귓가에서 명료하게 들리지 않고 발밑에서 음산하게 올라오는 이 다단조 선율은 잘 알고 있는 선율이었다.
피아노 소나타 1번. op.4
쇼팽이 열여덟 살에 쓴 초기 작품이지만 생전엔 출판되지도 못하고 잊혔다가 사후에 출판된 비운의 소나타다.
초기 작품이라 구조적인 완성도보단 쇼팽 나름의 에센스가 주로 드러나지만, 다른 두 소나타에 비해 독창성도 음악성도 떨어진다고 평가되어 인지도가 현저히 낮았다. 쇼팽 스페셜리스트들도 이 곡의 연주는 잘 안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내게 있어선 의미가 남다르다.
다른 곡들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을 때, 편린이나마 잡혀 주었던 곡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설마 쇼팽을 말씀하실 줄은 몰라서요.”
그렇지만 애착을 가지고 연구를 해도 그 편린 이상의 것은 쥘 수 없었다.
허락되지 않았다. 아무리 또렷한 선율을 기억하고 있어도 무언가가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피아노 건반 위로 옮겨 낼 수 없었다.
그런데 이 곡이 되찾을 수 있는 곡이었다고?
구세프 선생님이 설명했다.
“네게 추천할 만한 몇몇 후보가 있긴 했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이 소나타라고 판단했다. 네가 약간이나마 보여 주었던 흐름, 즉흥적인 감각에 큰 영향을 받는 곡이니만큼…….”
어째서 쇼팽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말씀하시던 구세프 선생님은 잠시 말을 멈추시더니 손끝으로 머리를 괴며 말했다.
“그런 네게 지금까지 구조적인 음악을 강요한 건 나였지, 타티아나.”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처음엔 강요라 생각하고 의심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사실 선생님들의 지도라는 게 다 이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가서야 그게 옳았다는 걸 깨닫는다.
“전 모두 제게 필요한 지도였다고 생각해요.”
“……넌 그런 학생이었지. 그래.”
“선생님은 언제나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셨죠. 약속도 지켜 주셨고요.”
어쩐지, 구세프 선생님은 내가 선생님 당신을 원망하길 바라시는 것 같다. 일부나마 내가 옳았다고 주장하며 아쉬움을 토로하면 그대로 받아들이실지도 모르겠단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난 선생님의 지도를 긍정했다. 조금이라도 오해하시는 일이 없도록.
미하일 선생님은 차를 한 잔 더 따르시고는 시계를 보며 말씀하셨다.
“일단 오늘은 두 사람 레슨 하겠나? 난 오늘은 옆에서 지켜보는 걸로 해도 되는데.”
미하일 선생님의 레슨을 소홀히 할 생각이 없지만, 차마 레슨을 미루실 필요가 없다고 말하진 못했다.
이미 내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하다. 이 상태로 지난 음악회에 대한 레슨을 받아 봐야 제대로 집중을 못 할지도 모른다.
“…….”
그럼 오늘은 이대로 구세프 선생님과 레슨을 받으면 되는 걸까.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
1년이라는 시간은 한 곡을 잊어버리기엔 충분할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쇼팽 피아노 소나타 1번은 지금도 희미하게 웅웅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악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고 손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막상 건반을 짚으면 어떻게든 해내겠지만, 그런 식으로 레슨을 받는 건 굉장한 무례다. 일단 연습할 시간이 필요했다.
“음, 그런데 아마 이 녀석은 오늘 바로 연주하지 못할 테지.”
레슨을 받기 어려운 지금 상황을 구세프 선생님은 이해해 주신 것 같다.
“타티아나.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 그동안 한 번쯤 되새겨 본 적 있나?”
“……없어요.”
“그렇다면 지금 바로 연주할 순 없겠군.”
“예.”
“미뤄 두라고 해서 정말 철저하게 미뤘군……. 악보를 가져오긴 했는데, 어떻게 할 테냐?”
평소처럼 일단 해 보겠다며 자신 있게 피아노 앞에 앉을 순 없었다. 그만큼 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망가졌든 나아졌든 일단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한 번쯤은 이 소나타와 제대로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레슨을 준비하는 데에 시간을 많이 쏟을 생각은 없었다.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모레, 어떠신가요?”
“그거면 되나?”
“레슨이 가능해지면 바로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시간을 정해 놓지 않는다면 혼자 정리하면서 얼마나 시간을 들여야 할지 모른다. 그건 수개월이 될 수도 있다.
난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우선 하루는 곡을 처음부터 다시 읽고, 다음 하루는 혼자 정리한다. 그렇게 이틀 후 선생님에게 보이기로 했다.
구세프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모레까지 레슨 준비를 해 와라.”
“예.”
“하지만 이번엔 평소처럼 준비하는 것과 조금 다르다.”
평소처럼 내 해석을 어느 정도 되살린 다음 악보 없이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서 레슨을 받을 생각이었는데, 구세프 선생님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숙제를 내 주셨다.
“악보에 네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적어라. 자.”
“이 악보에 말인가요?”
“그래.”
선생님이 주신 악보를 살짝 펼쳐 보니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완전히 새 악보였다.
지금까지 구세프 선생님의 레슨은 악보에 무언가 적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지도해 주시고 난 놓치는 일 없이 피드백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확실히 다른 방식의 레슨을 하시려는 것 같다.
“지금 네가 얻어 내고자 하는 해석은 어떠한 레퍼런스도 없고 나도 잘 모른다. 오직 네 기억 속의 음악으로 자리 잡고 있지. 그걸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에 애를 먹고 있으니 네가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내 일이고.”
교과서적인 해석이나 선생님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음악이 아니라,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려 한다는 진심이 분명하게 전해져 왔다. 선생님은 대충 하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기억을 잘 떠올려서, 위치와 가고자 하는 방향 같은 걸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표현해 와라.”
“어떤 방식으로…… 하면 될까요.”
“좋을 대로 해라. 언어와 부호를 쓰든 그림을 그리든 뭐든 상관없다. 아까도 말했듯 막연한 목적성이라도 있어야 한단 말이다.”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구세프 선생님을 보며 먹먹한 감사함과 함께, 내가 얼마나 대단한 분께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악보에 원하는 해석을 알아볼 수 있게 써 보란 말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걸 보시고 내게 맞춰서 지도해 주시는 건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레퍼런스 같은 것들을 무시하고, 완전히 날 믿어 주지 않으신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구세프 선생님은 최선을 다하려 하신다. 그렇다면 나 역시 어렵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할 수 있겠지. 네 머릿속 음악이 온전하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고, 잃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변명하지 않았다.
“……모레 보여 드릴게요.”
“좋다.”
구세프 선생님은 최선을 다 하라느니, 그런 말씀은 일절 하지 않는다. 그런 말들은 내게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아시는 것이다.
***
아무 레슨도 받지 않고 악보만 받아 레슨실에서 나온 뒤, 난 곧장 연습실로 향했다.
빠른 걸음으로 연습실에 도착해선 문부터 걸어 잠갔다. 찰칵 하고 자물쇠가 걸리는 소리와 함께, 철저히 혼자가 되었음을 느낀다.
코트와 가방을 옷걸이에 건 다음 바로 피아노 덮개를 열었다.
“…….”
보면대에 악보를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갑자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피아노 앞에서 이런 기분이 든 건 처음 있는 일인 것 같다. 이대로 보이는 악보를 연주하면 되는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전히 먼 곳에서 땅울림처럼 들리는 이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해도 되나?
갑자기 든 불안감에 팔을 멈칫거리다가, 코웃음을 치며 쭉 뻗었다.
쉬울 리가 없다. 구세프 선생님이 진심으로 도와주신다 하더라도 분명 어려울 테지. 정말 미친 사람처럼 매달린다고 해도 되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미 충분히 각오한 바다.
하지만 그게 겁난다고 해서 시작도 못 하고 벌벌 떨고 있는 건 피아노 연주자로서 창피한 일이다.
난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
첫 프레이즈부터 어이가 없었다.
이 소나타가 이런 곡이었던가?
기억 속에서 먼지가 잔뜩 쌓인 소리와 어디선가 들은 소리, 그리고 내가 보는 악보에서 시창으로 읽어 낸 소리, 건반을 누르니 피아노에서 솟아난 소리가 엉망진창으로 한 데 얽히면서 귀와 머리를 어지럽혔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지 분간할 수가 없다. 내가 제대로 된 건반을 누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눈으로 보면 분명 옳은데 귀로 들리는 소리는 형편없었다.
시작부터 무언가 굉장히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건반을 만지는 손끝의 감각도, 음감도 모두 어긋나 있는 것 같다.
“큭…….”
연주를 이어 나가기 어려운 상태였지만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간 난 어영부영 살아오지 않았다.
온 집중력을 끌어모으며 손가락을 움직여 모든 소리들을 바로잡았다. 모두 꿈틀거리고 빠져나가려 하면서 내 신경을 끔찍하게 긁어 놓았지만 목에 힘을 주며 참고 연주에만 집중했다.
일단 피아노 소리를 멈추고 악보를 천천히 읽어보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난 악보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저기에 있는 이야기들, 그리고 내가 낼 수 있었던 목소리들. 모두 조금이라도 현실로 끌어내려면 피아노와 함께 해야 했다.
“…….”
그간 하루도 빼놓지 않았던 피아노 연습이 큰 도움이 되었다.
총보독법에도 익숙해져 있는 내 눈은 순식간에 악보를 통째로 읽어 낼 수 있었고, 이 곡보다 훨씬 어려운 난곡들을 해치웠던 내 손은 기계적으로 건반을 연주하며 악보를 음악으로 바꾸어 냈다.
자꾸 드는 이상하다는 느낌보단 현실에서 제대로 움직여 주는 내 실력을 믿으며 연주에 임했다.
그렇게 난 1년 동안 잊고 있었던 곡을 다시 악보를 보고 끝까지 쳐 낼 수 있었다.
연주가 아니라 무작정 쳤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심각하다.
건반에서 손을 떼고 나서야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리를 펴니 찬 공기에 소름이 다 돋았다.
“아하핫…….”
정말 희망적인 게 하나도 없네.
헛웃음이 입가로 흘렀다.
기술적으론 문제가 없다. 지금 내 실력은 쇼팽 피아노 소나타 1번이 요구하는 모든 테크닉적 어려움들을 가뿐히 소화해 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손을 움직이는 데에 있어서도 그리 큰 어려움은 느끼지 못했다.
문제는 음악성과 해석에 있었다.
오래 안 봐서 먼지가 잔뜩 쌓인 소리가 조금 섞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이상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더더욱 괴상했다.
만약 이 곡을 무대에 올려야 해서 준비해야 한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난 지금까지 이렇게 예전 해석과 연주가 충돌할 때, 구세프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악보에 따라 해석을 모두 죽인 뒤 처음부터 쌓아올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한 번 다시 제대로 음악을 만들어 놓으면 그 뒤로는 이렇게 헷갈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심지어 악보에 구세프 선생님이 알아보실 수 있도록 쓰기까지 해야 했다.
“……숙제부터 아득하네.”
선생님이 요구하신 건 끔찍하게 어렵고, 주어진 시간은 이틀밖에 없다. 울적한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내 머리는 빠르게 저 악보를 내 표현으로 채울 궁리를 하고 있었다.
분명히 1년 전과는 다르다.
그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오로지 머릿속에 있는 음악을 끌어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기만 했다.
하지만 해야 할 숙제가 주어진 이번엔 조금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선생님이 내게 기한을 정해 놓으라고 하신 것도, 또 이런 숙제를 내어 주신 것도 아마 모든 것을 예상한 안배이리라.
“…….”
숙제를 받았으니까, 해야지.
난 가만히 악보를 들여다보다가 가방을 가지고 왔다.
펜보다는 연필이 낫겠지. 필통에서 연필을 꺼낸 뒤, 난 가물거리는 기억을 붙잡았다. 명료한 소리라기보단 반쯤 뭉개진 어떠한 흐름이라 부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은 희미한 기억.
난 그것들을 일단 무작정 악보에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 표시는 문자이기도 하고 기호이기도 했고, 가끔은 그 무엇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