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3화
갈증이 난다. 찻잔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차를 마신 게 언제였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의무적으로 수분을 섭취해야 한단 생각으로 일어나서 새로 물을 끓였다.
“…….”
연습실 창밖을 보니 깜깜해져 있었다. 이 별관 연습실은 연습에 방해되지 않게 조명도 항상 밝고 따뜻하게 되어 있어서, 집중하다 보면 정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조금 더 있으면 예고르가 와서 잔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어찌 된 마음인지, 예고르가 잔소리하는 걸 듣고 싶단 충동도 들었지만 그건 안 그래도 바쁜 예고르를 더 신경 쓰게 하는 일이었다.
난 괜한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이 차만 마지막으로 마시고는 방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잠시 창가에 기대어 서서 기다리니 물은 금방 끓었다.
“후우…….”
뜨거운 허브차를 한 모금 마시니 피곤함이 조금 달아난다. 천천히 목을 스트레칭하면서 테이블 위에 놓인 악보를 보았다.
소나타의 마지막 장이 펼쳐져 있었다.
“…….”
다시 보니 이게 뭔가 싶기도 하고.
이틀째 숙제로 하고 있는 악보는 이제 거의 그림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악보야말로 내가 혼자 떠올리면서 끙끙 앓던 곡을 그 흐름의 일부나마 악보에 옮겨 낸 첫 시도였다.
제대로 된 기억은 아니지만,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디테일함을 도와주었고 에르네스트는 요즘 작곡에 집중하는 만큼 조금 더 효율적인 표현에 대한 조언을 주었다.
류보비와 아나톨리, 사샤도 어리지만 선험적인 직관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혼자선 절대 이렇게까지 하지 못했겠지.
“후후.”
처음엔 수학 문제를 받아 든 기분이었다. 예전엔 쉽게 풀었었는데, 해답도 공식도 풀이도 다 잃어버린 문제.
간신히 조금 남아 있는 기억을 끌어내어 처음부터 증명해 나가면서 이걸 과연 이틀 만에 할 수 있을까 불안했었는데, 정말 이렇게 어느 정도 결과물을 내어 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으음.”
난 찻잔을 내려놓고, 류보비에게 빌린 색연필을 다시 들었다. 아나스타샤가 제안한 이 방법은, 정말 해 보면 해 볼수록 그녀가 천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음악에 색채감이 있다는 건 공감각에 재능이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난 음악이 사람의 심상 자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 음악의 기초가 되는 악보에 색을 칠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효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줄은 해 보기 전엔 미처 몰랐다.
물론 이런 건 일반적으로 악보를 쓸 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을 허락받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색연필이야말로 내게 가장 쓸모 있는 무기 중 하나가 되어 주었다.
***
음산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들었다.
높은 탑과 검은 새.
요 근래 자주 보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악몽이란 걸 인지해도 좀처럼 잠에서 깰 수가 없었다.
난 포기하고 우울하게 새를 바라보았다. 새가 고개를 좌우로 까닥였다. 마치 날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글쎄, 새는 표정도 말도 없으니 그저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분이 좋진 않았다.
이 악몽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무섭게 쫓아오지도, 사납게 내던지지도 않고 그냥 이렇게 울적하게 만든다.
“…….”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하고 싶은 일도 별로 없다. 난 서 있기도 싫어져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
내 손엔 색연필이 한 자루 있었다. 어디서 난 건지도 모르겠고 언제부터 쥐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간에 뭐라도 해야겠단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래는 담벼락이었을 것 같은 다 무너진 돌무더기가 보였다.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손을 뻗었다. 내 손은 힘이 별로 없어서 큰 돌을 잡진 못했다. 적당히 납작한 걸로 하나 골랐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들고 있던 색연필을 돌 위에 그었다. 종이가 아니니까 잘 안 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잘 되었다.
멍하니 돌 위에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검은 새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난 가만히 새와 마주 보다가, 잠에서 깼다.
“……윽.”
일어나자마자 옆으로 돌아누우며 머리를 눌렀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팠다.
악몽을 꾸고 나면 늘 그렇듯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시계를 보니 겨우 1시간 정도 잔 시간이었다. 다시 자기도 글렀고, 이래서야 학교에서 피곤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걱정과 달리,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 꿈에서 나는 무력하게 손 놓고 있지 않았다.
“…….”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새벽에 깨자마자 웃기는 소리인건 아는데, 갑자기 숙제에 마지막으로 고치고 싶은 부분이 생겨서 참을 수가 없어졌다.
***
중앙음악학교로 향하는 차량 안. 빅토르는 약간 난감한 눈빛으로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
거기엔 타티아나가 거의 기절한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혹시 문제라도 있는지 깨워서 확인해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고르게 들려오는 숨소리는 타티아나가 그저 피곤해서 곯아떨어졌음을 알리고 있었다.
평소엔 아무리 피곤해도 이렇게 차에서 잠들거나 하는 일이 없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이제 곧 학교 시험 기간인데 그 때문인 것 같았다.
“…….”
앞좌석을 보니 소로킨과 자하르 역시 타티아나가 잠든 것을 처음 본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세 경호원들의 생각은 모두 비슷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타티아나를 깨워선 안 된단 생각이었다.
세 사람은 옷깃이 스치는 소리나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는 훈련을 받았고, 때문에 아주 조용하게 침묵할 수 있었다. 소로킨은 평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차량을 운전했다.
그 노력 덕분에 타티아나는 그 예민함에도 불구하고 깨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였다.
차가 학교 뒤뜰의 주차장에 선 뒤에도 타티아나는 깨지 않았다. 빅토르는 곤히 잠들어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스마트폰을 꺼내어 메시지를 써서 소로킨에게 보여 주었다.
[어떻게 합니까? 소로킨.]
[깨워야지.]
소로킨은 뭘 묻고 있냐는 듯 담백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 역시 목소리를 내지 않고 필담으로 대꾸한 점에서, 지금 타티아나를 깨울 생각이 별로 없다는 건 분명했다.
빅토르가 다시 썼다.
[못 하겠는데요.]
“…….”
소로킨은 빅토르가 못 하겠다는 말을 하는 걸 처음 봤다. 빅토르는 그간 같이 일을 하면서 어떤 무리한 일을 맡겨도 척척 해내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단지 옆자리를 톡톡 치면 되는 것뿐인 단순한 일을 못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소로킨도 지금만큼은 빅토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잠시 시계를 확인하고는 천천히 적었다.
[평소보다 일찍 나와서 시간이 있으니까 조금 더 두도록 하지.]
[그럼 이따가 깨울 때 막 도착한 것처럼 하죠. 도로가 막혀서 늦었다고 합시다. 어떻습니까?]
당당하게 고용주를 속이겠다는 말을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소로킨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빅토르를 바라보았지만, 결국 그의 의견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소로킨은 차량의 히터를 조금 더 세게 틀고, 팔짱을 끼었다.
1월 중순의 아침. 네 명은 따뜻한 침묵을 공유하며 십 몇 분도 되지 않을 잠시간의 평화를 만끽했다.
***
이틀이란 시간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구세프 선생님의 숙제를 하는 건 물론이고 이제 2주도 안 남은 기말 시험 공부도 할 것이 많았다.
자꾸만 숙제에 대한 생각만 머리에 맴돌아서 다른 것에 집중하기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일부러 시간을 딱 나누어 스케줄을 정해 놓고 정확하게 해야 할 일들을 해냈다.
난 정말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았다. 줄일 수 있는 건 잠뿐이었다.
그 때문인가, 오늘은 차에서 잠들어 버리기까지 했다.
“오늘 차가 막혀서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차에 오르자마자 잠든 것 같은데, 깨어나 보니 학교에 도착했고, 시간은 평소보다 더 늦어 있었다. 수업에 늦지는 않을 시간이니 상관없었지만, 이런 일은 또 처음이었다.
소로킨은 늦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난 어쩐지 그가 일부러 날 깨우지 않고 있었을 것 같단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괜히 그런 부분을 캐물어 보는 것도 재미없는 일이겠지.
난 늦은 덕분에 모자란 잠을 보충한 것 같다고 말했다. 빈말은 아니었다. 오늘 잠이 많이 부족한 상태였는데, 차에서 잠깐 잔 것만으로도 신기할 정도로 피로가 많이 풀려 있었다.
“고마워요.”
밖으로 나와 마지막으로 빅토르와 자하르에게 인사를 전하고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막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류보비.”
“아, 언니! 좋은 아침이에요.”
류보비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내 허리춤을 포옹했다. 난 류보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주고는 살짝 떨어졌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은지 류보비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저 어제 스터디 끝나고 합창 연습 있었잖아요? 엄청 잘했다고 칭찬 받았어요. 다 언니가 가르쳐 준 덕분이에요.”
“그래요? 잘됐네요!”
스터디를 하면서 내 숙제에 대한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반대로 내가 친구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일도 많았다.
어젠 류보비가 합창곡에 대한 발음을 물어봐서 상세하게 알려 줬더니 좋은 평가를 받은 모양이다. 난 환하게 웃으며 칭찬해 주었다. 류보비가 입가를 히죽거리며 물었다.
“언니는 어때요? 숙제 오늘까지죠?”
“저도 마무리 지어 놨어요. 류보비 덕분이에요.”
완벽하다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구세프 선생님과 첫 레슨을 하기 위해 준비한 것으로는 괜찮지 않나 생각이 들 정도의 결과물은 만들어 냈다.
이제 앞으로도 이걸 가지고 많은 레슨과 연습 등 힘든 시간이 계속되겠지만, 난 이전보다 조금 더 희망찬 생각으로 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잊어버린 것이 문득 생각났다.
“아, 색연필. 돌려 드려야 하는데.”
“괜찮아요. 다음에 주세요.”
“미안해요. 생각은 했었는데요…….”
류보비에게 빌렸던 색연필은 내 방 책상 위에 있다. 어린애한테 학용품도 빌려 쓰고 제대로 돌려주지도 않다니, 도대체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무슨 변명을 해도 창피할 뿐이라서 어떻게 할지 생각하다가, 마침 좋은 생각이 나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저기, 류보비. 빌려준 색연필이 특별한 것이라던가…… 그런가요 혹시?”
“……아뇨? 그냥 저번에 잃어버려서 엄마가 사 준 거예요.”
“아, 그러면 제가 오래 빌려 쓴 것도 미안하니…… 그런 의미에서 내일 새 것으로 사 드릴게요. 어때요?”
“새 거요?”
새로 사 준다는 말에 류보비가 깜짝 놀랐다.
“악보에 쓰신 거라서 별로 많이 안 쓰셨잖아요? 괜찮은데…….”
“안 될까요?”
혹시나 부담스러워할까 봐 조심스레 말했더니 류보비가 고민했다.
그냥 긴 말 할 것 없이 미안해서 사 주는 거라고 대충 이야기해도 류보비는 착한 아이니까 알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선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류보비가 아무리 어리더라도 솔직한 이유를 말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빌려 쓴 게 미안해서이기도 하지만…… 류보비가 빌려준 색연필이 이미 제겐 조금 특별한 의미가 되어 버려서요.”
“……네?”
“색깔들을 가지고 나누었던 이야기들 기억하죠? 전 그게 남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색연필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풍경을 보여 준 특별한 물건이자 소중한 추억이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옳지만, 류보비가 괜찮다면……
“그런 이유라면 좋아요! 얼마든지 가지세요, 언니! 그리고 제 건 새로 사 주는 거예요?”
“아…… 물론이죠.”
“그럼 그 색연필도 저한텐 특별한 색연필이 될 거예요.”
처음에 약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류보비는 정말 기뻐하며 내 손을 붙잡았다. 난 웃으며 그 손을 살짝 흔들었다.
“후후, 알았어요.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그렇게 난 류보비와 다시 한 번 약속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