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4화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수업은 한층 더 인정사정없어졌다. 이번 1학기에 시험을 보게 될 것이라고 어림잡아 생각해 두었던 범위는 그야말로 우리들의 희망 사항에 불구했다.
몇 명은 우리의 본분을 자각한 것 같았다. 음악가로 태어나 음악가로 죽을 테니 일반 교과목은 화끈하게 포기하고 실기 시험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 자신을 증명하겠다는 부류였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실기에 목숨을 걸게 만드는 게 바로 선생님들이 노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한 과목도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노트에 필기하고 공부를 하는 쪽이었다.
난 언제나 그렇듯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그리고 공부를 하다 보면 문학과 수학, 과학, 신학 등등 어느 하나도 음악과 결부시키지 못할 것이 없었다. 심지어 교과목에 없는 철학도, 개인적으로 조금씩 공부하며 어설프게나마 배운 기호논리학도 악보에 결합시켜서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 냈다.
세상 모든 것이 음악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음악가가 할 수 있는 오만한 소리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정말로 그렇게 느끼고 있었고, 때문에 다른 무엇을 공부해도 그리 시간이 아깝다거나 아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 같은 부류는 굉장히 소수였다.
“선택과 집중…….”
발렌티나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어쩐지 작년에도 비슷한 모습을 본 것 같은데?
다른 학생들도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들 유령처럼 스멀거리며 각자 밥을 먹거나 햇빛을 쬐러 나갔다.
학기말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작년 8학년 때와는 또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겨우 1년이 흘렀을 뿐인데 훨씬 수준 높은 것들을 배우게 되면서 다들 머리에 과부하가 온 것 같았다.
발렌티나는 옆자리에 축 늘어진 아나스타샤를 보다가 내 쪽을 휙 돌아보며 물었다.
“있잖아, 넌 어때 타티아나? 어제 하던 개인 연구 숙제는?”
개인 연구 숙제라는 말은 상당히 이상하게 들리지만, 요 이틀간 레슨을 받느라 스터디룸엔 잠깐 얼굴만 비추었던 발렌티나는 내가 개인 연구를 하다가 구세프 선생님에게 들켜서 숙제를 받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오늘 첫 준비를 마치고 레슨을 받으러 갈 참이에요.”
그냥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발렌티나는 기가 막히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너도 굉장하다 정말……. 하루가 50시간쯤 되니? 영국 마법학교의 수석에게서 마법의 모래시계라도 빌려 온 거야?”
“?”
“……설마 모르니?”
영국의 마법학교에선 수석에게 그런 걸 주기도 하는 건가? 그보다 마법학교라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발렌티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리곤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일단 우리에게 공평하게 24시간이 주어졌다는 건 분명하네. 아니, 그런데 왜 난 맨날 시간이 부족한 것 같은 거야?”
“아하하, 저도 하루가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어요.”
“길면 길어지는 대로 공부량만 더 늘리겠지.”
솔직히 그럴 것 같긴 하지만, 오늘은 정말 잠이 부족해서 서너 시간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
발렌티나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책상 위로 길게 엎드리며 물었다.
“아무튼, 어제 하는 거 보니까 멋지더라. 구세프 선생님도 놀라시겠지?”
“……글쎄요.”
숙제를 내 준 선생님께서 아무거나 해도 좋다고 허락해 주셨으니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모조리 동원했다. 문자, 기호, 그림, 색 등등 모든 것들이 내 기억속의 음악을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좋은 말을 들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반반 정도라고 생각해요.”
“반반?”
“예. 이 정도로 시작하자고 해 주시거나, 아니면 호통을 치시면서 내쫓으시거나.”
“어우,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아.”
그 커다란 선생님이 호통을 치시는 건 끔찍하다는 듯 발렌티나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구세프 선생님은 화를 내며 지도할 땐 정말 무서운 분이었다. 하지만 난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그래도 좋은 분이에요.”
발렌티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날 보더니,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진짜 구세프 선생님한테 레슨 받는 게 좋은가 봐?”
“예.”
“처음부터 그랬던 거지?”
어딘가 부럽다는 듯, 묘한 시선이 와 닿는다. 그리고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그녀가 이어 말했다.
“난…… 글쎄, 네가 뭘 하든 응원하고 싶어서. 그 선생님하고 레슨도 잘 했으면 좋겠어.”
“……발렌티나?”
그녀는 피식 웃어 버리곤 기지개를 쭉 펴더니 옆 책상을 탕탕 쳤다.
“그래도 일단 우리 점심부터 먹으러 가자. 아나스타샤! 뭐 하니?”
“귀찮아…… 나 빵 좀 사다 줘…….”
“헛소리하지 말고 일어나!”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해하는 아나스타샤가 안쓰러워 보였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아나스타샤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더더욱 가차 없이 구는 타입이었다.
흐물거리는 아나스타샤를 거의 질질 끌고 가는 발렌티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난 그녀들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
점심 식사 후엔 바로 구세프 선생님과 레슨 시간이 잡혀 있었다.
악보만 다시 잘 챙겼는지 확인했다.
물론 레슨 시간엔 건반을 만져야 할 일이 더 많을 테지만, 난 요 이틀 사이 몇 번이나 시도해 보면서 지금 피아노로 무언가 선생님에게 전하는 건 어렵다는 걸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
뭔지 모를 이유로 제대로 연주가 되지 않는다. 자꾸만 음이 이상하게 들렸다. 원래 해낼 수 있었던 작은 패시지조차 연주할 수 없었다.
희미하게 남은 음악을 붙잡아 조각조각을 맞춰 나가면서 음악을 조금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고, 이제 다시 건반 위로 옮겨 놓으면 이전보단 그래도 제대로 된 음악을 혼자서도 연주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내 기대는 보기 좋게 배신당했다.
약간의 초조함.
하지만 난 감정을 추스르고 차분하게 도움을 받아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 보기로 다짐했다. 이 지침에서 벗어나면 재작년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지금 머릿속의 음악을 피아노로 실현시킬 수 없는 상태에서, 이 악보는 다른 누군가에게 내 기억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 줄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다.
일단 이걸 선생님에게 보여 드린다면 어떠한 조언이라도 해 주시겠지.
생각은 그 뒤에 하기로 했다.
“선생님. 타티아나입니다.”
“들어와라.”
레슨실 문을 가볍게 노크했고, 곧 들어오란 소리가 있었다. 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의자에 앉아 있는 구세프 선생님의 모습은 마치 스웨터를 입은 곰 같았다.
선생님은 들고 계시던 서류를 옆으로 대충 휙 던져 버렸다.
“잘 왔다.”
“안녕하세요.”
“그래, 오늘은 날씨도 좋구나. 눈도 안 오고.”
평소 눈을 싫어하시는 구세프 선생님은 슥 일어나시더니 창가를 서성이다가 날 돌아보았다.
“타티아나. 재작년 생각나지 않나?”
잊을 수 없는 기억 중 하나였다.
그때 난 겁도 없이 구세프 선생님에게 대들었었고, 선생님은 날 레슨실로 끌고 와선 죽든지 답을 찾든지 해야 나갈 수 있다며 3시간도 넘게 레슨을 하셨다.
그리고 난 구세프 선생님과 약속을 함으로서 반쯤 죽었고, 반쯤 답을 찾아서 나갈 수 있었다.
이번엔 어떨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진지한 이야기를 해 봐야 곤란해하실 것 같아서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문 밖에 출입금지라고 붙여 놓을까요?”
“뭐? 하하, 됐다. 그땐 나도…… 조금 일부러 그랬던 것도 있었으니까.”
선생님은 묘하게 머쓱해하시는 것 같더니, 헛기침을 몇 번 하시곤 무겁게 말씀하셨다.
“아무튼, 됐다. 네가 약속을 지켰다면 나 역시 약속을 지킬 차례지. 숙제는 해 왔겠지?”
“예.”
“……역시 약속은 잘 지키는군. 이리 줘 봐라.”
때가 왔다.
난 긴장감을 느끼며 가방에서 악보를 꺼내 들었다.
기호논리학과 색칠 놀이 등을 합쳐 놓은 이 악보를 보면 뭐라고 하실까?
사실 어디에서도 쓰이지 않는, 나만 알 수 있는 표시들도 많아서 몇 번이고 질답이 오가기도 해야 할 것이다. 난 구세프 선생님이 짜증을 내면서 이게 뭐냐고 질문하시면 제대로 대답하기 위해 한층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적어도 멍청한 짓을 한 것처럼 보여선 안 된다. 제정신으로 객관적으로 한 숙제라는 걸 설득해야 했다.
“…….”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첫 장을 딱 펼쳤을 때, 눈썹을 조금 꿈틀거리신 것 말고는 아무 반응 없이 무표정하게 내가 만들어 온 숙제 악보에만 집중하셨다.
한참이나 후에 두 번째 페이지가 넘어갔다. 난 선생님이 결코 대충 보고 계시지 않다는 걸 확신했다.
진지하게 악보를 보고 계시는 걸 바짝 얼어 있는 상태로 바라보고 있는데, 구세프 선생님이 악보 위로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궁금하신 것 없으세요?
혹시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는 건요?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내가 예상하고 있는 질문들 중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다.
“잠깐 거기 차 마시고 있어 봐라. 타티아나.”
“……선생님은요?”
“난 커피로.”
그리고 다시 선생님은 악보에 집중했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 읽으시려는 게 분명했다.
난 긴장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아직 어떤 평도 하지 않으셨지만, 적어도 어떠한 설명 없이도 선생님과 나 사이에 공유하고 있는 음악관이라는 것이 있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건 정말 큰 안도로 내게 다가왔다.
따뜻한 차와 커피를 끓였다. 구세프 선생님 옆의 탁자에 커피를 올려 두었더니 선생님은 완전 건성으로 고맙다고 하시곤 잔을 들었다. 그 와중에도 한 번도 악보에서 눈을 떼시는 일이 없었다.
난 선생님이 내 숙제를 검사하시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차만 마셨다. 고요한 호수처럼 정적이 내려앉은 레슨실에서, 가끔 팔락이는 종이 소리만이 들렸다.
약 10분 정도가 흘렀을 때, 구세프 선생님이 악보를 덮었다.
선생님은 여태껏 본 것 중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너……. 이건 미완성인 곡이 아니구나.”
숙련된 음악가가 악보에서 무언가 읽어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구세프 선생님은 그런 부분에서 아주 섬세한 분이셨고, 내가 써 놓은 모든 해석들까지 직관적으로 읽어 내신 것 같았다.
선생님은 조금 놀랍다는 듯 이어 말했다.
“난 네가 이전 선생에게서 배우다 만 미완성의 곡을 억지로 완성시키려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 악보가 필요했고.”
이 숙제가 일종의 시험이라는 건 느끼고 있었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계셨을 줄은 미처 몰랐다. 보여 드릴 수 있는 건 편린뿐이었으니 그렇게 오해하시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처음에 날 얼마나 건방지다고 생각하셨을까?
선생님은 다시 악보를 펼쳐서 슥 읽어 보시곤, 내게 물었다.
“하지만 그게 아닌 것 같군……. 굉장히 명확한 흐름이 존재해. 연주는 못 한다 그랬으니, 어디서 들어 본 연주인건가? 그렇나? 타티아나.”
배우다 만 곡의 해석을 이렇게 끝까지 달아 놓을 순 없다. 그러니 구세프 선생님은 다른 연주자의 연주를 내가 들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게 딱히 틀린 상황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건 기억하고 있는 음악뿐이니까.
“비슷해요.”
“들어 봤으면 들어 본 거지 비슷한 건 또 뭐지? 아, 이 곡뿐만이 아니라는 건가?”
선생님은 중얼거리면서 악보를 툭 쳤다.
“이해한다. 다른 연주자의 연주가 깊숙하게 자리 잡아서 평생 동안 괴롭히는 경우는 종종 있으니까. 나 역시 그런 곡들이 많고.”
다른 연주자의 연주를 감명 깊게 들었을 때, 멋지게 따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연주자라면 누구나 겪는 평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을 때, 연주자들은 지독한 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굉장히 흔한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순간 따끔한 고통을 느꼈다. 간신히 내색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내가 이 고통에 익숙한 덕분이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어렴풋하게나마 내 고통을 이해해 주셨다. 그리고 선생이라는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걸 똑같이 따라 하는 건 쉬운 일도 아니고 선생으로서 권장하고 싶은 일도 아니다. 저번에도 말했지.”
“예. 지문을 바꾸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일이라고 하셨죠.”
좋은 연주를 레퍼런스로 모방하고, 자신의 음악에 녹여내어 한층 더 훌륭하게 승화시키는 일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나처럼 특정 연주와 완전히 똑같은 연주를 추구하는 건 구세프 선생님의 말처럼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내가 처한 상황은 일반적이지 않으니까, 어쩌면 한 곡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저 그뿐이다.
선생님은 가만히 날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 더 묻진 않으마. 난 너와 한 약속을 지키고 싶으니.”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선생님은 내가 바라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시면서도 날 도와주겠다 하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 피아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