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5화
피아노의 건반 덮개를 열고, 구세프 선생님이 날 돌아보았다.
“내가 쳐 봐도 되겠지?”
벌써 피아노 앞에 앉으셨으면서 이제 물어보시는 건가요?
웃음으로 대답하자 구세프 선생님이 피식 웃었다.
“네가 이 악보에 옮기면서 왜곡이 생기고, 또 내가 이걸 읽으면서 왜곡이 생겼을 테니 네 바람대로 내가 할 순 없을게다.”
“…….”
“하지만 네가 적어 낸 이 흐름이 음악인지 아닌지 한번 보려는 거니까, 일단 그냥 들어 봐라. 타티아나.”
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선생님은 한 번 들어 본 적도 없는 해석을 그저 내 설명에만 의존해서 연주하려 하고 계셨다. 눈을 감고, 내 손만 잡은 채 길을 걸으시려는 것과 같았다. 눈을 뜨고 걸으면 아주 간단할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건 어떻게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일이었다.
이건 겨우 열다섯 살짜리 학생을 위해서 구세프 선생님쯤 되는 피아노 연주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난 한 순간도 허투로 듣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선생님은 다시 악보를 훑어보시고는, 지체 없이 건반을 연주했다.
“……!”
첫 마디를 듣자마자, 어깨를 움츠렸다.
무언가의 전조, 암시. 수많은 은유를 매달고 있는 선율이 천천히 흘러나온다. 그중 몇 가지가 날 소스라치게 만들었다.
비슷하다.
기대 이상으로, 아니,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정도를 훌쩍 넘어선 연주였다. 구세프 선생님의 연주는 내 기억 속의 음악이 꿈틀거릴 정도로 흡사한 음색을 띠고 있었다.
지난 1년간 서서히 풍화되어 버린, 악보에 옮겨 내면서도 제대로 연주를 하지 못해서 희끄무레한 그대로 잠들어 있던 음악이 조금 더 제대로 된 형체를 갖추었다.
잘 기억도 나지 않던 부분들이 대조할 수 있는 음악을 직접 마주하자 비로소 서서히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후.”
난 짧게 숨을 내쉬며 집중을 가다듬었다.
조금 놀랐지만, 이건 희망적으로 보아도 될 상황이었다.
부정확한 음악에 두 번이나 왜곡이 끼얹어졌는데도, 구세프 선생님의 연주는 내가 되찾고 싶은 음악과 이 정도로 흡사했다.
딱 잘라 말씀하시길, 연주자의 지문이라는 것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얼핏 비슷해 보일 수는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이 연주를 레퍼런스로 해서 천천히 기억을 되살려 대조해 가며 다시 처음부터 조금씩 만들어 나간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
다른 사람의 연주를 가져오려는 게 아니라 그저 내 연주를 되살리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걸까.
비합리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난 누구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다 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재작년에 반년을 넘게 쏟아부으면서 뼈저리게 느꼈고, 요 이틀 사이에도 충분히 깨달았다.
사실 여전히 확신이 없다.
왜 혼자선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 아직 이유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이렇게 희망을 품어 봐야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난 결국 모든 것이 소용없게, 기억 속의 곡을 되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답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에 반해 구세프 선생님은 낮은 가능성이나마 내게 보여 주셨다. 이건 나 혼자선 꿈도 못 꿀, 어지간한 음악가에겐 부탁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할 방법이었다.
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는 만큼, 선생님이 보여 준 가능성에 모든 걸 한번 걸어 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긴 대조를 크게.”
구세프 선생님은 연주를 하면서도 마치 확인하시듯 말씀하셨다. 내 악보에서 읽어 낸 것이 올바른지 알고 싶으신 것 같았다.
난 대답할 순 없지만 어떤 부분들을 포인트로 잡고 계시는지 정확하게 파악했다.
2악장에선 고개를 갸웃거리시기도 했다.
“묘하군.”
어떤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표시해 놓은 해석은 쇼팽이 쓴 악보 그대로의 해석이 아니라 살짝 뒤틀려서 뒷부분과 이어지는 흐름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내 표시에서 그걸 분명하게 읽어 내셨지만 막상 연주해 보니 기묘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이 생각하는 올바른 해석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내 해석에 맞추어 주셨다.
내가 쓴 해석을 있는 그대로 믿어 주신다는 게 느껴졌다.
“끝을 내리면서 이런 소리로.”
다시 한 번 말하며 오른손을 아르페지오로 끌어내리다가, 툭 떨어뜨린다. 그것은 내가 원하던 해석, 음색과 거의 같았다.
어떻게 한 번만에 이 정도로 깊이 있는 해석을 해내신 걸까. 그대로 피아노로 옮겨 내는 표현력도 그저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선생님에게 악보를 보여 드린 건 방금 불과 10분 정도에 불과했다.
이건 악보를 읽고 자체적인 해석으로 연주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구세프 선생님이 얼마나 수준 높은 음악가인지 난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자.”
거의 기적같이 느껴지던 연주는 정확한 연주 시간에 맞추어 마무리되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고개를 까딱이시곤 다시 악보를 맨 첫 장으로 되돌렸다.
“역시 직접 쳐 보니까 알겠군. 보기엔 조금 독특해 보여도 상당히 오랜 연구가 쌓인 독자적인 해석을 따르고 있다는 걸. 이런 걸 들었다면 고집을 부릴 만도 하군.”
내가 멍청한 곡을 가지고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구세프 선생님은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멍하니 바라보자 선생님이 피식 웃었다.
“비슷했나?”
“예…….”
“일단, 해 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다. 타티아나.”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말 말고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구세프 선생님은 옆으로 슥 물러나시고는 손짓했다.
“해 보자. 와서 앉아라.”
난 방금 들었던 연주를 떠올리며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
구세프는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는 음악학교의 피아노 선생으로 있으면서 그간 수많은 천재들을 봐 왔다고 생각했다.
이 천재들은 극단적으로 나누자면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첫 번째로, 협주곡을 초견으로 연주하거나 4성부 푸가를 한 번 듣고 그대로 쳐 내는 것처럼 음감이나 기억력, 테크닉 등에서 누가 보더라도 천재임을 알 수 있게 두드러진 연주자의 재능을 지닌 천재들이다.
이런 재능을 키워 나가서 무대에 선 연주자들은 청중들을 열광시키는 데에 아주 익숙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작곡가의 의도에 맞춰 아카데믹하게 빈틈없이 연주하면서도 숨길 수 없는 개성을 드러내거나, 똑같은 음악을 전개하더라도 수준이 다른 호소력과 표현력을 보이는 음악가의 재능을 지닌 부류.
음악성이라는 약간 모호한 재능으로 표현되지만 이것은 제대로 발휘되기만 하면 수많은 사람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굉장한 재능이었다.
“이제 와서 묻는데, 이 다이어그램은 이어지는 뒤쪽을 예고하겠단 뜻인가?”
“예, 맞아요.”
마지막으로, 그 두 재능을 모두 넘치도록 안고 태어난 천재들이 있다.
구세프는 이 마지막 부류 천재들을 살면서 몇 명밖에 보지 못했는데, 지금 학생으로 데리고 있는 건 딱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에르네스트, 다른 한 명은 타티아나였다.
“사실 이 선은 색연필로 칠하는 게 되레 혼란을 초래할까 조금 걱정했었는데…… 괜찮았나요?”
“……난 괜찮은 것 같다.”
“다행이에요.”
에르네스트는 그냥 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타고난 녀석이니 긴 말 할 필요가 없었다. 구세프는 몇 년만 더 있으면 에르네스트가 선생인 자신을 따라잡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경우는 살짝 특이했다.
분명 많은 재능을 타고났다. 머리도 좋고 테크닉도 좋다. 키와 손이 조금만 더 컸으면 정말 무궁무진한 곡들을 마구 휘둘렀을 텐데 그 점은 조금 아쉽지만, 타티아나가 지닌 장점들에 비하면 그런 건 단점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진짜 장점은 바로 기이할 정도로 강한 집중력에 있었다.
연습과 무대에서 집중하는 것은 물론이고, 곡을 다루는 자세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약간 다른 차원에 속해 있었다.
구세프는 여태껏 많은 천재들을 봐 오면서도 기호논리학을 독학으로 배워서 이렇게 악보에다가 응용하여 해석을 표현하려고 하는 학생은 본 적이 없었다.
비단 기호뿐만이 아니었다. 섬세하게 표현된 지시들이나 색연필로 칠한 감정들은 타티아나가 얼마나 필사적인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타티아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또한 배울 수 있는, 그리고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끌어모아서 음악에 쏟아 넣는다.
이건 집중력을 뛰어넘는 무언가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집중력은 한 곡에 향하고 있었다.
그 어떤 난곡이라도 단번에 파헤쳐져서 타티아나의 손에 요리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타티아나는 고전하고 있었다.
“다시 해 봐라.”
“……예.”
첫 악절도 제대로 못 삼킨다.
먹을 수 없는 것을 자꾸 먹으려는 것처럼, 타티아나는 치열하게 건반에 매달렸지만 음악을 흐름대로 쌓아 올리려다가 어느 순간 엉망진창으로 무너뜨리기만 했다.
재작년에 봤을 때도 똑같은 증상이었는데,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흠…….”
이건 조금 이상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타티아나는 언젠가 들었던 해석을 연주하고 싶어 한다. 고집을 부리고, 심지어 악보에 이렇게 해석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타티아나라는 연주자에게 아무리 안 어울리는 해석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조금 비슷하게 연주는 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덜컥거리며 고장 난 인형처럼 자꾸만 이상하게 연주를 무너뜨렸다.
타티아나의 실력을 생각하자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와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도 가뿐히 연주하는 실력자다. 쇼팽의 초기 작품인 피아노 소나타 1번에 고전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된다.
다른 학생 같았으면 어이가 없어서 호통을 쳤을 것이다.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하라고 따끔하게 혼을 낼 만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평소 모습을 아는 구세프는, 지금 힘겨워하는 그녀를 보며 뭐라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
타티아나는 다시 연주를 멈추었다. 그녀는 낮고 길게 심호흡을 하며 건반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구세프를 부르지 않았다. 첫 악절도 쳐 내지 못하면서 할 말이 있을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구세프는 그 모습을 보고 있기가 힘들어서, 약간 방법을 바꿔 보기로 했다.
“타티아나.”
“……예, 선생님.”
“재작년에 네가 쳤었던 짧은 패시지 기억나나? 그걸 쳐 봐라.”
“…….”
타티아나는 그제야 의외라는 듯 구세프를 올려다보았다.
피아노 선생으로서 평소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소나타를 흐름에 따라 처음부터 연주하지 않고 동떨어져 있는 퍼즐 한 조각만을 가지고 무언가 얻어 보려 하다니, 그건 요령을 부리는 정도가 아니라 호되게 혼이 나야 할 짓이었다.
하지만 지금 타티아나에겐 그 퍼즐 조각이라도 쥐여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일부러 빼앗았던 것을 다시 돌려주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타티아나는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타티아나는 재작년엔 꼭 쥐고 있었던 패시지조차 똑바로 쳐 내지 못했다.
그제야 타티아나가 중얼거렸다.
“소리가…… 이상하게 들려요.”
“무슨 말이지?”
“머릿속에 있는 음악과 제가 직접 건반을 만져서 만들어 내는 소리가 너무나 달라요.”
건반에 손을 올리기 겁이 나는지, 양손을 무릎 위에 둔 채로 말하던 타티아나가 구세프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곡을 연주할 땐 이렇지 않아요. 제 음감과 귀는 괜찮아요. 그런데 왜? 왜, 이 소나타만 이상하게 들리는 거죠?”
감정이 스멀거리며 새어 나왔다. 무언가 해답을 갈망하는 눈빛. 구세프는 타티아나가 지금 이 순간도 자기 자신을 꽉 붙잡으며 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소리가 이상하게 들린다는 건 어떻게 조언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정신적인 문제? 하지만 한 곡에서만 이렇게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나.
이래서야 전체적으로 재작년보다 더 어렵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땐 적어도 연주라도 억지로 해냈고, 몇 초나마 하고 싶은 음악을 해냈다. 하지만 이번엔 아예 연주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구세프는 그사이 타티아나에게 영향을 줄 만한 일들을 떠올렸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중 한 가지가 유독 의심스러웠다.
타티아나의 피아노는 재작년 성악을 배운 이후로 음악성이 확 바뀐 바 있었다. 성악에서 얻어 낸 음색을 피아노로 옮긴다며 연구를 하더니, 결국 그 결과를 제대로 얻어 낸 것이다. 이후 타티아나의 거의 모든 연주엔 그 결과가 반영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스운 생각이지만, 타티아나가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해 보려 한다면 구세프 역시 생각난 모든 걸 조언할 의무가 있었다.
“타티아나. 다시 한 번 해 봐라. 대신 노래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노래하지 말고요?”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를 쏟아내 봐라. 소리가 이상하게 들린다고? 그럼 아예 귀도 막아 보고.”
“전 손이 두 개인데요…….”
“내가 막아 주랴? 너만 괜찮다면 해 줄 수도 있는데.”
구세프가 양손으로 귀를 막는 시늉을 했더니 타티아나는 막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잘래잘래 저었다.
“아, 아뇨…… 이어폰을 써 볼게요.”
타티아나가 가방을 가지고 와서 인이어 이어폰을 꺼냈다. 물론 저런 걸로 제대로 피아노의 소리를 막을 수 있진 않겠지만, 해 볼 만한 시도였다.
그렇게 이어폰을 꽂고, 타티아나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구세프는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대체 학생에게 뭘 시키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어디까지나 진지하게 구세프가 말한 것들을 곱씹어 보며 피아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하.”
구세프는 짧게 헛숨을 토해 냈다.
타티아나는 이 자리에 앉아 처음으로, 잃어버렸었던 음악의 한 조각을 다시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