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16화 (416/1,277)

##  416화

아나스타샤가 준 이어폰은 차음성이 좋아서 바깥의 소리들이 잘 안 들린다.

하지만 지금 공기 중에서, 그리고 발밑에서 울리는 진동은 내가 무언가 연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 주었다.

피아노에서 전해지는 소리가 울림으로 화하고, 머릿속의 음악이 조금 더 짙어지자 갑자기 무언가 균형을 찾았다. 잘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바로 그 감각이었으니까.

난 몇 초 정도 연주를 해내고 손을 들었다. 왜 할 수 있게 된 거지?

“머리 아프군.”

원하시는 대로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구세프 선생님은 머리를 짚으며 중얼거리셨다.

그 모습을 보며 마냥 어리둥절해하거나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난 생각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걸지도 모른다.

결국 지금 내가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은 재작년에 얻어 냈었던 작은 편린뿐이었다.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것 같은 느낌이다.

구세프 선생님이 허리를 숙이며 날 바라보았다.

“타티아나. 솔직하게 말할까.”

쉽게 말씀하시는 투는 아니었다. 긴 고민 끝에 나오는 조심스러운 말이었다.

“네가 이 음악을 이렇게 어렵게 다루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난 널 잘못 가르치지 않았고 넌 음악을 잘못 배우지 않았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듯한 기준. 구세프 선생님은 다시 한 번 그것을 확실히 하셨다.

“타티아나 너는…… 마치 연기자처럼 다채로운 호소력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스타일이다. 정말 성악가들이 하는 것처럼 말이다.”

“…….”

“맡은 배역에 충실하게, 그런 것들을 정말 잘 표현해 왔지.”

그 말대로였다. 성악가나 배우, 무용수들이 몸과 목소리를 써서 늘 무언가를 표현해 내는 것처럼 난 항상 피아노로 청중들에게 심상을 전하려 애써 왔다.

노래하는 아이들에서 행진하는 군인들, 광기에 찬 노인이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 숲 속의 새들이나 수십 자루의 빗자루까지. 수많은 것들을 거쳐 왔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연기자의 역할에 충실할 뿐일지도 모르는 내가 표제음악과 순수음악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몰입할 수 있는 건 그리 어렵고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말이다, 타티아나.”

그리고 구세프 선생님은 이 상황의 본질적 문제를 쿡 지적하며 들어왔다.

“그렇다면 정작 진심으로 하고 싶은 배역을 연기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넌 지금 알 수 없는 이유로 평소 스타일대로는 도무지 이 역할을 연기해 내지 못하는 것 같다.”

어느 때나 연기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이젠 그 어떤 배역이라 할지라도 꺼리지 않고 소화해 낼 준비가 되어 있는 내가 왜 이번엔 몰입하지 못하고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는 걸까.

그 이유는 어느 정도 예상이 되었다.

이건 연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

구세프 선생님은 명료한 답을 내어 주신 것이 아니라 단지 내 문제를 피아노를 통해 분석해 주신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조금씩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아이면 아이처럼, 어른이면 어른처럼, 타티아나면 타티아나처럼 할 순 있었지만, 너무 많은 것들이 덧씌워지고 뒤틀려 있어서 이미 난 연기가 아닌 건 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가장 쉽게 할 수 있어야 했던 것들이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잘 알고 있었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새삼 느끼고 나니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구세프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선생님은 내 상황에 대해 정확히 모르시면서도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거의 가깝게 문제를 알아보셨다.

난 내친김에 구세프 선생님에게 더 물어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노래를…… 연기를 그만두었을 때…… 곡 전체가 아니라 겨우 한 악절 정도 제 뜻대로 할 수 있게 된 건 무슨 이유일까요. 전 모르겠어요.”

“글쎄다, 우리 연주자들끼리 하는 말들 중에…….”

구세프 선생님은 내 질문에 막 답변을 주시려다가 말고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지금 난 널 도와주려고 있지 그만두게 하려는 게 아니니까.”

분명히 뭔가 부정적인 답변일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생님은 재작년에 처음 날 봤을 때부터 내 피아노가 기이하게 뒤틀려 있고 엉망진창이라고 혹평을 하셨던 분이었다.

지금은 약속을 지켜 날 도와주고 계시긴 하지만 이제 와서 그 평가가 바뀌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평가를 듣는 나는 조금 바뀌었다. 난 다시 한 번 부탁했다.

“……가르쳐 주세요, 선생님.”

“…….”

장난치거나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선생님의 판단을 듣고 싶어서 묻는 것이란 걸 느끼셨는지, 구세프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악마의 함정이라는 말, 들어 봤나?”

처음 듣는 말이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섬뜩해지는 말이었다. 난 고개를 저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살짝 눈가를 찡그리며 설명했다.

“곡을 연습하다 보면 종종 마주하게 되는 함정이다. 가능할 것 같은 해석으로 연주자를 현혹하고, 가까이 다가가면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붓도록 유혹하지. 하지만 결국 모든 것들을 허사로 만드는, 그런 함정.”

듣자마자 이해할 수 있었다.

곡을 연구하고 해석하면서 우리들은 깜깜한 땅을 더듬거리고 다니다가 종종 멀리서 반짝이는 빛을 발견하곤 한다.

분명한 해답이라고 생각해서 필사적으로 힘겹게 빛을 따라갔는데, 알고 보니 그저 깨진 거울 조각이 달빛을 살짝 비춘 것에 불과했을 때. 그때 느끼는 절망감은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다.

때문에 음악가들은 멀리서도 빛을 보고도 그것이 거울 조각인지 아니면 정말 보물인지 구분해 낼 수 있는 식견이 필요했다. 그것이 부족하면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악마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

물론, 난 지금 쥐고 있는 이 악절이 진짜라는 걸 안다. 이 퍼즐 조각에 다른 조각들을 붙여서 완성된 곡이 어떤 형태를 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게 있어 함정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순 없었다. 코끼리에겐 아무것도 아닌 올가미 함정이 작은 토끼에겐 치명적인 것처럼.

이 짧은 패시지는 악마의 함정이 될 수 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음악은 사실 언제든지 날 혼란시키고 방황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혼자서 생각할 거리가 많아 잠시 침묵하고 있자, 구세프 선생님이 난데없이 책상을 탕 하고 내리쳤다.

“……!”

“타티아나.”

깜짝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구세프 선생님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진 마라.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한 곡의 완성에 평생이 걸리는 일도 많으니까.”

모든 것을 의심하면 꼼짝도 할 수 없다. 구세프 선생님은 내가 의심에 사로잡혀서 주저앉길 바라지 않았다.

더더욱 힘을 주어 앞으로 발을 내딛길 바라신다.

“아무튼, 재작년과 똑같은 출발선에 선 것 같군. 이젠 첫 악장부터 해 보자.”

역시 바라선 안 될 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그 때문인지 연주를 제대로 시작조차 못 한다는 것도. 구세프 선생님은 그런 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말했다.

내 등을 툭 미는 듯한 어투에, 난 선생님의 말을 되풀이했다.

“첫 악장부터요.”

“그래, 타티아나. 넌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1년 사이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해 봐라.”

선생님은 내가 정말 절대 쥘 수 없는 뜨거운 불길에 손을 뻗고 있다면 당장 그만두라고 하실 분이다. 그런 선생님의 말을 나는 믿는다.

그간 구세프 선생님과 나 사이에 쌓인 신뢰는 두텁고 견고했다.

***

쇼팽 피아노 소나타 1번의 첫 프레이즈만 몇 번을 연주했는지 모르겠다.

난 수없이 시도했다. 구세프 선생님의 연주를 레퍼런스로 흐름을 파악하고 감을 찾은 뒤 내 음악을 되살리려고도 해 보고, 이어폰을 꽂고 연주해 보기도 했다.

구세프 선생님은 몇 번이나 악보를 보고 내 해석을 확인하면서 지금 연주에서 어떤 점을 피드백해야 할지 레슨 해 주셨다.

처음엔 이상하게만 들리던 소리도 결국 내 집요함엔 못 이겼는지 점점 기억속의 소리와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아마 구세프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을 다음 학생이 오지 않았더라면, 오늘 날이 저물 때까지 계속 레슨을 받았을 것 같다.

“오늘은 가 봐라. 실기곡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말 잊지 말고.”

“예.”

구세프 선생님은 날 배웅하면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난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 나와 코너를 돌자마자, 무언가에 발이 걸린 듯 무릎이 꺾였다. 난 벽을 붙잡고 무릎을 꿇었다.

복도 바닥의 찬 냉기가 전신을 타고 올라오며 스멀거렸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간다. 내 주위를 맴돌던 경고가 직접적으로 몸에 영향을 끼쳐 왔다.

“악, 윽…….”

숨이 턱 막히는 고통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깨어질 것 같다. 옆머리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난 간신히 머리를 움직여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쓰러지지 않고 한참이나 그렇게 있다가, 누군가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가 보기 위해 가까스로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흐릿해진 시야엔 다행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콜록…….”

거칠게 기침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 안이 뒤집히는 느낌이 든다. 끔찍하다.

“…….”

갑자기 급격하게 몸 상태가 안 좋아진 것은 레슨을 하던 도중이었다.

성악을 배우고 쌓아 올렸던 것들을 의도적으로 잊으려 하면서 집중했을 때, 순간적으로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현기증이 엄습해 왔다.

바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가 간신히 참아 냈다. 구세프 선생님이 옆에 계신데 소리라도 질렀다간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내가 억지로 참아 낼 수 있었던 건, 컨디션이 악화된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재작년 상황과 똑같았다. 당시 나는 내 음악만 관철시키려고 하면서 고집을 부리고 있었고, 심신의 괴리가 일어나서인지 신체의 균형이 깨어져서, 찬바람만 조금 쐬어도 감기에 걸려 열이 나거나 제대로 몸을 다루지 못했다.

성악을 배우게 되면서 나아졌었고 이후엔 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지만, 이렇게 다시 내 고집을 세우려 하니 바로 문제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흐.”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기도 했지만 어이가 없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웃음이 나왔다.

이제 막 악화되기 시작했는데도 벌써부터 알 것 같았다. 구세프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는 동안에 시시각각 심각해지는 것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허리에서부터 힘이 빠져나가며 팔이 빠르게 움직여지지 않았고, 손끝의 감각이 둔탁해지고 있었다.

아마 내가 고집대로 계속 이 방법을 고수해 나간다면 점점 더 심해지겠지.

지문을 불태우고 내 멋대로 새로 그려 넣는 일이니 이런 고통이 느껴지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년 동안 피아니스트로서 테크닉을 제대로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대로면 그마저도 의미가 없어지게 생겼다.

“마지막이니까…….”

그래도, 모든 게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구세프 선생님의 말씀대로 난 1년 전과는 분명 다르다.

이전엔 상상도 못했을 방법으로 이미 해석의 일부는 악보에 옮겨 놓았고, 왜 내가 이 쉬운 곡도 제대로 연주를 못 하는 딜레마에 빠졌는지 그 실마리도 잡아냈다.

온몸의 신경이 반절 정도로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원래는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는지 알고 있다.

난 아직도 어질거리는 머리를 들었다. 이대로 앉아서 조금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무릎에 손을 짚어 억지로 누르면서 몸을 일으켰다.

“하.”

눈앞이 핑 돈다.

이 느낌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처음엔 왜 이렇게 약골인지 모르겠다고 불평만 했었지. 모두 나 때문이라는 것도 모르고.

묻어 두었던 음악을 꺼내 들자마자 몸 상태가 무너진 것은 허락받지 못한 음악을 해선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난 그것을 감수하면서 고집대로 하고 있으니, 아쉬운 소리를 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나아질 수 있는지 잘 알지만, 일단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번엔 아무 계획도 없이 무턱대고 헤매지 않는다. 정확한 일정과 도와줄 선생님이 있다. 겨울방학이 끝나기까지 약 3주. 그동안은 해 보기로 했으니까, 이런 예상된 고통쯤은 괜찮았다.

난 복도 창틀을 꽉 쥐어 보았다. 손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지 제대로 쥐는 것 같지도 않다. 차가움만 견딜 수 없이 손아귀를 파고든다. 하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더 힘을 주었다가 천천히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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