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7화
연습실에서 피아노와 1시간 남짓 거의 격투를 벌였다.
망가진 컨디션 때문에 제대로 건반을 컨트롤하기 힘들었지만, 앞으로 몇 주간 고생할 걸 생각한다면 적어도 이 상황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적응한다면 최소한 재작년의 컨디션 정도는 챙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픈 상태로 무대에 올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아픈 척도 할 수 없다. 아무리 머리가 멍하고 손에 힘이 안 들어가더라도 청중들이 절대 알 수 없도록 내색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건반에만 집중해야 한다.
난 혼신을 다해서 구세프 선생님에게 레슨 받은 부분들을 혼자서 연습하고, 그다음은 기말시험에 봐야 할 실기곡도 연습했다. 기존에 연습했던 것과 많이 틀어졌기 때문에 다시 맞출 필요가 있다.
몸 상태가 이래서야 수석을 놓치지 않고 싶다는 말을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로 포기해 버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난 가능한 모든 것들을 했다.
“후…….”
연습을 마치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건반에서 미끄러뜨리듯 내렸다.
피곤했다. 이 엉망진창인 상태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테스트해 보기 위해서 극한으로 내몰릴 때까지 쏟아부었더니 정말 한계 직전까지 이르렀다. 이대로 산산조각 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난 재작년보단 조금 더 이 손을 잘 다룰 수 있었고, 한계가 어디인지 조금 더 잘 가늠했다. 덕분에 아주 죽을 것 같진 않았다. 당장 피아노 위에 엎드려 자 버리고 싶을 정도로 힘들긴 했지만.
하지만 오늘 스케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난 부스스 일어나선 코트를 챙겨 입고, 가방을 들고 연습실 밖으로 나왔다.
곧바로 향한 곳은 스터디룸이었다.
“안녕하세요.”
살짝 문을 열고 들어서니 리처드와 한승우, 아나스타샤, 아나톨리 네 사람이 이미 와 있었다. 아나톨리가 내 인사에 반갑게 화답했고 리처드와 한승우는 손을 들어 보이며 날 반겨 주었다.
아나스타샤는 쥐고 있던 펜을 휘리릭 돌리며 웃었다.
“레슨 받고 왔니?”
“예, 연습도 조금 하고요.”
“딱 그럴 시간이네.”
아나스타샤가 펜을 까딱거렸다. 그나저나 아깐 축 늘어져 있을 정도로 피곤해 보이더니 지금은 꽤 생생해진 것 같다.
옆자리에 가서 앉았더니 그녀가 펜을 내려놓았다. 공부는 잠시 미뤄 두고 내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것 같았다.
“요 며칠 했던 숙제 오늘 낸 거지? 숙제 보여 드렸더니 뭐라셨어? 혹시 혼나거나 한 건 아니지?”
이틀간 했었던 악보 숙제에 대해 어떤 평가가 있었는지 아나스타샤는 궁금해할 만도 했다.
난 구세프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나 반응 등을 잠시 떠올려 보다가, 짧게 전해 주었다.
“잘 봐 주신 것 같아요. 꼼꼼하게 봐 주시기도 했고요.”
“그래? 진짜로? 난 구세프 선생님이 그런 방식은 별로 안 좋아하실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 조금 걱정했었거든.”
아나스타샤가 처음 색연필을 제안했을 때, 그녀는 이 숙제가 미하일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색연필을 써 보자고 특별한 제안을 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게 구세프 선생님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걸 알자마자 그녀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큰일 난 것 아니냐고 안달복달했다. 아나스타샤가 생각하는 구세프 선생님은 딱딱하고 보수적인 선생님 그 자체인 것 같았다.
“다행이야 진짜.”
이 독특한 방식을 구세프 선생님이 좋게 봐 주셨다는 말에, 아나스타샤는 진심으로 안도하는 듯 의자에 스르륵 늘어지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제안한 방법 때문에 내가 혼날까 봐 걱정했던 것 같다.
물론 악보가 괜찮은 평을 받았을 뿐이지, 정작 연주 내용은 첩첩산중의 초입처럼 느껴졌다는 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제대로 앉아 있기가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지만, 난 조용히 싱긋 웃기만 했다.
“구세프 선생님의 숙제? 뭔데 그게?”
“아, 리처드.”
이틀 동안 리처드는 스터디룸에 나오지 않고 레슨과 개인 연습으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난 그에게도 짧게 설명해 주기로 했다.
“재작년에 선생님과 약속했었던 곡이 있어서요. 이제 그 곡을 연습하려고 하니까 악보 공부를 해 오라 하셔서…… 다 같이 연구를 했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안 좋아하실 만한 방식이란 건 또 뭐야? 궁금해지는데.”
“음…….”
“나한테도 보여 줄 수 있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왜 내 숙제를 궁금해하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다른 친구들에게 보여 주고 도움까지 받았던 걸 리처드에게만 보여 주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난 잠시 고민하다가 가방에서 악보를 꺼내 주었다.
“여기요.”
“고마워. 쇼팽 소나타 1번이네.”
리처드는 표지를 보더니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첫 페이지를 보고 놀라워했고, 두 번째 페이지부터는 진지해졌다.
그는 서너 페이지쯤 보다가 내가 어떤 의도로 이 숙제를 했는지 알겠다는 듯 말했다.
“이건…… 처음 보는 방식이긴 한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악보에다가 표시해 놓는 거랑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네. 조금 더 세밀하고 뚜렷하게 그려 놓아서 그렇지.”
“알아보시겠어요?”
내가 묻자, 리처드는 손가락을 들어 악보 위에 그려 놓은 선을 따라 슥 훑었다.
“대충. 딱 봐도 체계 없이 마음대로 그어 놓은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하네. 그럼 규칙성이 있을 테고, 유추해 보면 대충 보여.”
“……정말 대단하세요.”
“무슨 소리야? 이걸 쓴 건 바로 넌데.”
리처드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악보를 가리켰다. 난 어쩔 수 없이 따라 웃었다.
그는 다시 악보 위로 눈을 돌렸다.
“어쨌든 이걸 구세프 선생님에게 보여 주…… 야, 뭔데. 돌머리 저리 치워.”
“…….”
조금 더 악보를 읽어 나가려는 리처드의 옆으로 한승우가 비집고 들어왔다. 리처드는 짜증스럽게 밀어내려고 했지만 한승우는 옆에서 뭐가 밀든 말든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악보에만 시선을 보냈다.
결국 리처드가 포기하고 악보를 한승우 쪽으로 밀었다. 한승우는 잠시 동안, 겨우 몇 초 정도 더 악보를 보다가 눈을 돌려 내게 물었다.
“이거 네 해석이야, 타티아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한승우의 눈에 일련의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확신, 희열. 이유 모를 감정들은 정말 눈 깜빡할 순간 사라졌고, 한승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게 부탁했다.
“조금 읽어 보고 싶어. 괜찮을까.”
“……마음대로.”
한승우에게 못 보여 줄 건 없었다.
내 악보를 뭔가 자꾸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게 부끄럽기도 했지만, 음악가들의 세계에 살면 이런 일은 흔한 일이기도 했다.
난 집중해서 악보를 읽는 한승우의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괜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따 제대로 돌려받기만 한다면 상관없었다.
대신 난 바로 옆, 아나스타샤의 교과서에 주목했다.
“공부는 어때요?”
아나스타샤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늘 진도 나간 부분이 모두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어.”
“아나스타샤…….”
암울한 이야기를 밝게 말한다고 해도 긍정적으로 들리진 않았다. 그녀가 오전에 늘어져 있었던 이유는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요즘 부쩍 성적을 끌어올리면서 열심히 하던데, 무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웃었다.
“어쩌겠어? 열심히라도 해야지.”
“우리 같이 공부할래요?”
“그래. 타티아나. 뭐부터 할까? 수학 어때?”
안 그래도 막히는 부분이 있었는지 아나스타샤는 내 옆으로 바짝 붙으면서 수학 교과서를 보여 주었다. 나도 수업 내용을 필기한 내 노트를 꺼내 놓았다.
아나스타샤는 잘 이해하지 못한 개념들을 내게 물어보기도 하고, 또 이번 시험까지 어떤 걸 중점으로 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가끔은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매트릭스라는 건 대체 왜 배우는 거야? 내가 아는 매트릭스는 영화밖에 없는데.”
“아하하하…….”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면서 계산해야 하는 행렬을 놓고 아나스타샤는 이게 왜 중요한 수학 기법인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음악가인 우리가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진 않았다.
내가 일반교과를 군말 없이 열심히 하는 만큼, 그녀 역시 딱히 의문을 가지지 않고 주어진 것들을 열심히 해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 부분은 말이죠…….”
난 차분히 아나스타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머리를 쓰는 동안은 아프지 않고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한때, 피아노를 제대로 치지 못하는 내가 공부 같은 걸 열심히 해서 뭐 하겠냐는 생각을 한 적도 있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정말 많이 달라졌다.
나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늘 손을 크게 펼치는 것에만 집중했었다. 하지만 손을 모으지 않으면 흘러내리는 것들이 있다는 것도, 이젠 안다.
친구들에게 이런 식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보람이자 기쁨이었다.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난 공부를 허투루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
레슨과 연습, 일반 교과목 공부까지 모두 마치고 나오니 몸은 피곤해도 내심 뿌듯했다.
항상 하던 일이지만, 내가 집착하는 것에 모든 신경을 빼앗기지 않고 기말 실기곡이나 필기시험도 소홀히 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제정신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한 기분이었다.
흐트러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더더욱.
“같이 가자.”
아나스타샤와 함께 돌아가기 전에 잠깐 반에 들렀다. 챙길 것들도 있었고.
그런데 반에 도착한 우리는 갑자기 찬바람이 쌩 부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창가를 보니 에르네스트가 창문을 열어 놓고 멍하니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난 가뜩이나 찬바람을 쐬면 안 되는 상황이라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에르네스트…… 뭐 하세요? 바람이 차요.”
“아,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그가 우릴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가 창문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뭐 해? 그러다가 떨어지면 아플걸?”
“…….”
문 좀 닫으라는 뜻이었겠지……?
에르네스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아나스타샤를 흘겨보다가, 그녀를 상대하면 안 되겠다는 듯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오늘 숙제 보여 드렸지?”
뭘 묻는지는 명확했다.
“예. 나쁘지 않게 봐 주셨어요.”
“……그럼 진짜 내 잘못이네.”
“……?”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인가요?”
“아니…… 나도 선생님한테 숙제 받은 거 있잖아? 그거 오늘 냈거든.”
그의 숙제는 새해 첫날 그가 했던 폭탄 발언과 관련되어 있는 숙제였다.
“아, 에르네스트 너 작곡과 가겠다고 했었지? 그거에 대한 거?”
“어.”
“그래서? 어땠는데?”
에르네스트가 음악원 작곡과에 가겠다고 구세프 선생님에게 선언했고, 거기에 대한 시험으로 곡을 한 곡 작곡해오기로 했다는 걸 이미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처럼 친한 아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흥미진진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약간 불안감을 느꼈다.
에르네스트가 진짜 말하기 싫다는 듯 인상을 쓰며 말했다.
“죽을 뻔했어.”
“진짜?”
당황스러웠다. 아직 에르네스트의 곡을 본 적은 없지만, 난 그가 적어도 음악에 대해선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던 것들을 실패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이번 작곡 시험도 통과하는 게 기정사실일 것이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죽을 뻔했다고? 그냥 리젝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건 일반적인 숙제가 아니라 중요한 시험이었잖아요? 그럼 시험에서 떨어지신 거예요?”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고. 양식의 문제였으니까 다시 써 가면 될 것 같아.”
말하는 걸 보니 다행히 아주 끝난 건 아닌가 보다.
하지만 중간에 영문 모를 단어가 있었다. 내가 궁금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더니 한참을 고민하던 에르네스트가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네가 하는 걸 보곤 좋은 생각 같아서 나도 쓰던 악보에다가 그렇게 기호를 써 봤거든.”
난 벌써 웃음을 참을 수 없어졌다. 에르네스트가 창피함에 약간 달아오른 얼굴로 이어 말했다.
“아니, 현대 음악 악보들 보면 심지어 원 형태로 그려 놓은 것도 있잖아? 안 될 것 없다고 생각했지.”
이렇게 변명조로 이야기하는 걸 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난 오늘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하하하, 정말요? 진짜 그랬어요?”
“왜 웃어……?”
“당연히 그렇게 하면 안 되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 봐도 좋다고 허락받은 나와, 음악원 작곡과 진학을 희망하는 에르네스트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정확한 작곡 기법에 따라 악보를 써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게 작곡과를 희망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한 시험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아나스타샤도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너 바보니?”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네.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에르네스트는 딱히 부정할 생각이 없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보 여드렸더니 이렇게 장난처럼 써도 되는 건 줄 아냐면서 화를 내시는데, 두 말 않고 다시 써 오겠다고 하고 나왔지.”
그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내게 영향을 받아서 어쩌면 큰일 날 뻔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니까 약간 무서워지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별 위기감 같은 건 못 느끼는지 태연하게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기말 시험 끝날 때까지 뒀다가 시간을 조금 더 들여서 고쳐 써야겠어. 일주일 만에 써서 의미가 있었던 거니까.”
“아하하…… 그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난 가볍게 웃으며 그가 기운을 차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시간을 좀 더 들인다면 분명 더 나은 곡을 쓸 수 있겠지.
“그렇다면 시험 때까진 각자 숙제는 적당히 하면서 시험에 집중하게 되겠네요?”
“그렇겠지. 난 널 잡아야 하기도 하고.”
“잡아요?”
“수석 탈환해야 할 것 아냐.”
에르네스트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그런 말을 했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순수한 승부욕만을 부딪쳐 오곤 했다. 이런 그의 태도는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저도 진지하게 방어해야겠네요.”
조금 더 철저히 해야 할 이유가 하나 늘어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