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18화 (418/1,277)

##  418화

며칠이 흘렀다.

악몽은 이제 반가울 정도였다.

“…….”

검은 새와 한참 눈싸움을 하다가 눈을 떴을 땐 새벽 3시였다. 오늘은 그래도 잠을 좀 잤다. 그 덕분인지 몸의 컨디션도 약간 나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기분뿐이지, 막상 몸을 일으키려 하니 이불이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식은땀은 축축해서 안 그래도 무거운 몸을 더 늘어지게 했다.

그냥 숨을 쉬는 것 자체도 너무 힘들다. 방 안을 평소보다 훨씬 따뜻하게 해 놓고, 가습기도 틀어 놓았지만 이건 더 최악으로 가지 않기 위한 예방책에 불과했다. 급격히 악화된 건강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심신의 괴리로부터 일어난 문제. 이건 정신적 문제 같은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이거나 신학적인 문제에 가까웠다.

내가 알 수 있거나 따지고 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난 그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난 딱히 저항하거나 짜증 내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분간은 이대로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상황을 고칠 수 있는 확신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무리 힘들어도 버틸 수 있었다.

난 간신히 이불을 걷어 내고, 귀찮아서 대충 던져 놓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면서 예쁘게 개어 놓았다.

“……푸흐.”

길게 심호흡을 하면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늘 하는 것이었지만 조금 더 꼼꼼하게 하면서 몸 상태를 확인한다. 오늘은 어쩐지 어제보다 손에 힘이 더 안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일어나자마자 조금 괜찮은 것 같다고 느꼈던 건 착각이었나? 모르겠다. 상관없기도 했고.

흐물거리며 풀어져 버릴 것 같은 몸을 추스르고, 일으켜 세웠다.

“흐흥…….”

일부러 콧노래를 부르며 욕실로 향했다. 난 이런 사소한 것도 상당히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따뜻한 물로 가볍게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니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하루도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난 조금 더 중무장했다. 두터운 터틀넥에 스웨터를 하나 더 꺼냈다. 그 위에 구스다운으로 꽁꽁 싸매고, 마지막으로 혹시나 싶어 모자도 썼다.

바로 앞 별관까지 가는데 이렇게까지 중무장하는 건 약간 유난이기도 했지만, 난 이렇게 건강이 안 좋을 때 얼마나 쉽게 더 악화될 수 있는지 이미 체험한 바 있었다.

지금 난 아파선 안 된다. 이것도 일종의 자기 관리로, 아무리 신경을 써도 모자랐다.

“…….”

밖으로 나오자 찬 공기가 훅 들이닥쳤다.

1월 중순이 넘어가면서 날씨는 본격적으로 추워졌다. 한밤중 기온은 영하 10도 밑으로 훌쩍 내려간다. 대충 코트만 걸치고 나왔다간 그대로 감기에 걸려 드러눕기 딱 좋다.

난 목 부분을 더 확실히 여민 다음 별관으로 향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지만, 어두운 밤에 홀로 걷기가 심심해서 짧은 가곡을 작게 읊조리기도 했다.

별관에 도착해선 바로 난방부터 따뜻하게 하고 포트에 물을 올렸다. 따뜻한 차는 필수였다.

허브차를 마시면서 쿠키를 몇 개 집어 먹고, 이곳에 온 목적에 따라 피아노 앞에 앉았다.

덮개를 열고 건반을 누르자, 피아노 안에 숨어 있던 냉기가 순간적으로 훅 올라왔다.

“……윽.”

순간 몸이 움츠러들었다. 겨우 이 정도에도 소스라칠 정도로 난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어깨의 긴장을 풀고, 건반을 연이어 눌렀다.

여전히 맞는지 아닌지 잘 모를 피아노 소나타와 삐걱거리는 컨디션. 허락받지 못한 음악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충분히 있었다.

정말 최악이라는 말밖에 안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봐야 했다. 맹세와 다짐, 그리고 각오가 날 피아노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난 그저 조용히 그리고 냉정하게 상황에 적응해 나가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다.

***

중앙음악학교를 비롯하여 전국의 온 학교들이 본격적인 시험 기간에 돌입했다.

교내의 학생들은 한층 더 초췌해져서 내가 아픈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덕분에 난 시험 연습과 공부에 시달리는 평범한 학생으로 남을 수 있었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발렌티나는 책상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거리며 이러저런 이야기를 재잘거리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오늘 실기 시험 보는 사람 있니?”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었고, 난 살짝 손을 들었다.

“저요. 오후 2시까지 가야 해요.”

“아, 그래?”

“예.”

“역시……. 어차피 타티아나 넌 일찍 실기 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

“그렇잖아? 완벽하게 준비해 놨을 테니까.”

발렌티나는 날 무슨 시험의 신 같은 것처럼 보는 경향이 있었다. 난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조금 힘들었어요.”

“그럴 리가. 너한텐 엄청 쉬운 곡일 텐데.”

“아하하…….”

사실 그녀의 말처럼 이번에 받은 두 개의 곡은 그렇게 어렵다고 할 수 없었다. 바로 직전 학기에 했었던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만 하더라도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곡이었다.

“테크닉적으론 어렵지 않…… 콜록.”

난 이번 실기곡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밭은기침을 참지 못했다. 발렌티나가 곧바로 반응했다.

“감기니? 건강해야지, 타티아나.”

“아, 고마워요. 발렌티나. 감기는 아닐 거예요.”

그렇게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고 애썼는데도 감기에 걸렸다면 난 정말 신을 원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발렌티나는 약간 걱정된다는 듯 손을 뻗었다.

“봐 봐.”

그녀의 손이 내 이마에 닿았다. 발렌티나의 손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에 그녀가 손을 거두며 말했다.

“열은 안 나네.”

“그렇죠?”

사실 손이 저렇게 따뜻해서야 내 온도를 제대로 알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는 턱을 괸 채로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갑자기 불안하네, 타티아나. 너 원래 추위에 약하잖아. 냉증도 있었고. 요즘 많이 괜찮아진 것 같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해.”

재작년엔 정말 몸도 엉망인 데다가 관리도 똑바로 못 해서 얼마나 골골거렸는지……. 진짜 최악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보다 못해 하나부터 열까지 날 챙겨 주려고 했던 것도 내가 당장 내일 응급실에 실려 갈 사람처럼 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폐를 끼친 걸 생각하면 솔직히 지금 내가 뭘 하더라도 모자랐다. 난 적어도 더 이상 걱정 끼치진 않겠다는 생각으로 웃으며 말했다.

“잘 관리할게요.”

“그래, 타티아나는 연말에 음악회에서 연주도 했었잖아? 겨울 같은 건 이제 문제도 안 되지 않겠어?”

발렌티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고, 난 그녀의 말을 받았다.

“아무 문제 없어요.”

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잠시 후, 점심시간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우리도 각각 연습이나 레슨 등으로 흩어져야 할 때가 왔다.

아나스타샤는 가방을 휙 들쳐 메고는 손을 살랑이며 인사했다.

“시험 잘 치르고 와, 타티아나.”

“고마워요. 이따가 봬요.”

난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들과 헤어진 후 연습실로 간 나는 냉증이 있는 학생들을 위해 준비된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은 뒤 거기에 손을 담갔다.

“…….”

물에 잠긴 양손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다가, 조금씩 스트레칭을 해서 손을 풀었다. 어떻게든 이 손으로 해내야 했다.

손수건으로 손의 물기를 꼼꼼하게 닦고, 1시간 정도 시간을 들여 실기곡을 연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고 시험을 치를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했다.

난 학교에서 치르는 실기도 콩쿠르와 똑같은 마음으로 임한다. 드레스 대신 교복을 입었지만 단정해야 했다.

눈가에 다크서클이 조금 내려와 있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리나 복장에도 문제가 없었다.

준비가 되었음을 느낀 나는 5분 정도 빨리 시험이 치러질 레슨실로 향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입니다.”

가볍게 노크하며 말하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렴.”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학생은 어떤 선생님이 평가를 볼지 모른다. 난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시죠.”

“잘 왔다.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날 반겨 준 두 선생님은 잘 아는 분들이었다.

한 분은 라브렌티 선생님. 살짝 마른 체형이 마치 단단한 고목 같은 분위기를 지니신 분이었다. 직접 레슨을 받아 본 적은 없지만, 대위법 수업을 들으면 라브렌티 선생님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분은 내 지도 선생님인 미하일 선생님이었다.

실기 시험을 지도 선생님에게 받는 일은 정말 드문데, 이런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좋은 점수를 주실까 기대해선 안 된다. 이 자리에선 미하일 선생님이야말로 가장 무섭게 채점을 하실 분이시니까.

라브렌티 선생님이 물었다.

“준비가 더 필요하다면 시간을 충분히 주도록 하죠.”

“아니에요. 괜찮아요.”

“음…… 그렇다면 바로 피아노에 앉아도 좋습니다.”

모쪼록 편하게 하라는 것 같았다. 난 그 배려를 충분히 느꼈지만, 지금 팽팽하게 준비된 신경을 풀어놓고 싶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선생님들 앞에서 짧게 묵례로 인사하고 곧바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op.37a 그중 8월, 수확.

나단조의 알레그로 비바체. 난 빠른 리듬의 음악을 나지막하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수확하기 직전의 보리밭, 그 위로 바람이 불며 파문을 그렸다.

일반적인 해석대로 연주를 하자면 조금 빠르게 할 필요가 있었다. 보리 이삭은 가볍고, 가을바람은 빠르니까. 하지만 난 약간 더 무게를 실어서 보리밭을 거대한 하나의 흐름으로 묶었다.

조금은 느긋하면서도 가을의 풍취가 더 살아나게끔 만들고 싶었다.

“…….”

쉽진 않았다.

내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고, 그건 쇼팽을 연주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곡들은 이전처럼 말끔하게 연주해 낼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내가 음악로봇 같은 것이 아닌 이상 그런 건 불가능했다. 쇼팽으로 망가진 컨디션이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한다고 해서 곧바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결국 이 컨디션으로 모든 것을 소화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말 불리했다. 제대로 허리를 펴고 앉아서 손끝에 힘을 집중시키기도 힘들고, 제대로 손이 돌아가지도 않는다. 막상 건반을 눌러도 감각이 둔해서 제대로 눌렀는지 확신도 들지 않았다. 심지어 이 음악을 듣고 파악하는 귀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때문에 평소대로라면 쉽게 쳐 내릴 수 있는 구간도 신경 써서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게 할 필요가 있었다. 철저하게 모든 것을 내 제어에 넣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읏.”

양손으로 가파른 아르페지오를 타오르고, 옥타브 연타를 내리꽂는다. 버티지 못하고 어깨가 덜컥거리는 것 같다.

몇 번 해 보면서 이 정도는 해낼 수 있다는 걸 안다. 난 한계에 다다른 테크닉과 속도를 조절하면서 화려하게 첫 주제를 끝마쳤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서정적인 주제. 확실히 이 부분은 연주하기에 조금 편했다.

다만 감각이 둔해지면서 내 표현력도 같이 둔해졌다는 걸 감안해야 했다. 편하다고 해서 대충 치면 정말 웃기지도 않는 소리가 나온다는 걸 난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작은 아티큘레이션도 놓치지 않게 신경 썼다.

조금 웃기기도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슬라메이 같은 난곡을 연주해도 악보를 보고 피아노 앞에 앉으면 그대로 이미지처럼 옮겨 와서 건반을 연주하는 대로 음악이 나왔는데, 이젠 그런 건 꿈도 못 꾼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남은 미련에 대해 마지막 도전을 해 보겠다는 고집을 세우면서 학교의 시험도 해내겠단 내 선택이 만든 상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두 번째 주제를 마치곤 다시 돌아온 첫 번째 주제를 보다 웅대하게 연주했다. 똑같은 반복이지만 똑같이 들리지 않도록, 사소하고 미미한 부분도 챙겨 넣으면서 연주를 마쳤다.

“좋았습니다.”

그렇게 연주를 마치고 내려오자 라브렌티 선생님이 짧게 말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고,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채점지에다가 펜으로 무언가 적어 넣었다.

다시 펜을 내려놓은 라브렌티 선생님의 심사평이 있었다.

“전 타티아나의 연주를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약간 다르군요.”

난 흠칫했다. 하지만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했다.

라브렌티 선생님은 침묵하는 날 보며 이어 조용히 말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중 8월.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8월, 즉 영어로 어거스트august를 형용사로 쓰면 ‘위엄 있다’는 뜻이 된다는 것 압니까?”

이 곡에 대한 연구를 꽤나 했지만, 사실 8월이라는 표제에 그렇게 집중한 건 아니라서 몰랐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몰랐어요.”

“그럼 대단하군요. 대부분 학생들은 이 곡을 휘날리듯 빠르게 연주하려고만 하는데 타티아나는 그보다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라브렌티 선생님은 한 손으로 옆머리를 짚으며 날 유심히 바라본다.

“그래서 놓치지 않고 잡아냈느냐고 하면……”

그리고 조금 더 확실하게 말씀하시려던 라브렌티 선생님은 약간 보류하듯 말을 맺었다.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군요.”

기대감이 서린 호평이지만, 레슨이 아닌 테스트에서 받기엔 조금 부족한 평이었다.

아마 내 연주를 들어 본 적이 없으시다면 지금보다 좋게 평가해 주셨을 것 같다. 하지만 이미 난 여러 무대에서 실력을 내보인 바 있었고, 그걸 보신 분이라면 지금 부족함을 느끼실 만도 하다.

“감사합니다.”

혹시나 걱정했던 것이 보다 현실적으로 가깝게 확 닥쳐온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답했다.

난 재작년에도 이 상태로 피아노 앞에 앉았던 경험이 많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뿐이다.

그리고 미하일 선생님은 그런 날 조금 더 잘 알고 계셨다. 선생님이 미소를 지었다.

“음악이 조금 바뀐 건, 네가 구세프와 연구 중인 그 곡 때문인 것이겠지?”

이전에 레슨을 받을 때도 별말씀 하지 않으셨는데, 모르고 계셨던 것이 아니었다.

그간 선생님과 쌓아올린 음악들을 부정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건 마치 그런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난 나지막이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

“괜찮다, 타티아나.”

죄스러움에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내게, 선생님은 따뜻한 목소리로 말해 주셨다.

“추수가 끝난 보리밭에도 바람은 부니까.”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순 없었지만, 날 격려해 주시는 말씀이라는 건 분명했다. 난 내 마음속 한편에 선생님의 말을 꾹 눌러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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