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화
차이코프스키의 사계에 이어 실기 시험곡으로 연주한 곡은 멘델스존의 엄격 변주곡이었다.
엄격 변주곡variations sérieuses이라는 이름은 이 곡이 1842년 작곡되어 베토벤에게 헌정되었음을 분명하게 하는 듯하다.
“…….”
천천히 노래하는 라단조의 주제는 마치 다성부 성악곡을 부르는 것 같은 대위법적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 고전적이고 견고하다.
하지만 거기에서 약 11분에 걸쳐 파생되는 17개의 변주는 당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멘델스존의 비르투오시티를 보여 주듯 다채롭게 변주되며 펼쳐졌다.
변주가 쉴 틈 없이 바뀔 때마다 도약, 스타카토, 연타, 까다로운 리듬 등 피아노 연주자로서 해내야 하는 온갖 테크닉들이 가혹하게 요구되었다. 물론 깊이 있는 음악성 또한 놓쳐선 안 된다.
난 이 고전적이면서도 낭만적인 곡을 제대로 연주하기 위해 11분 동안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
다행히 나는 예전보다 조금 더 냉정하게 몸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조금 더 제정신이었으며, 어떻게 해야 할 지 조금 더 알고 있었다.
때문에 가죽 장갑을 끼고 연주를 하는 것 같은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면서도, 이 상태에서 퍼포먼스를 내는 것이 가능했다.
갈수록 힘들어졌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전에 연주를 마칠 수 있었다.
“잘 들었습니다.”
곡이 끝난 뒤 라브렌티 선생님의 짧은 평이 이어졌다.
“음…… 12번 변주와 마지막 코다에서 약간의 짜증이 묻어 나오긴 했는데. 조금 언짢은 듯이 연주하라는 멘델스존의 코멘트를 의식했는가 싶으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라브렌티 선생님이 태연하게 채점지를 만지작거리면서 하시는 말씀에 난 너무 놀라 뒷걸음질 칠 뻔했다.
짜증이 묻어 나왔다는 평에 반론을 펼 수가 없었다.
난 철저하게 이 시험을 콩쿠르라고 생각하고 점수를 얻는 데에 집중하며 연주하려 했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 같은 걸 핑계로 삼는 건 굉장히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 등을 일절 느끼지 않을 순 없었다. 엉망진창인 상황이 짜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편한 길을 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한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니 누굴 탓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무의식중에 차오르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스트레스처럼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래도 태연함을 연기하면서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연주가 길어지면서 피로가 쌓이니 결국 틈이 생겨서 감정이 피아노로 새어 나온 모양이다.
나 스스로도 캐치하지 못했을 정도로 미미한 부분을 짚어 낸 라브렌티 선생님도 대단하신 분이지만.
“…….”
대단하다고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짜증 같은 게 아니라고 변명해야 하나? 무어라 답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라브렌티 선생님은 딱히 내게 대답을 듣고 싶은 건 아닌지 채점지에 펜으로 슥슥 점수를 매기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튼 훌륭했습니다. 전 이런 해석도 나쁘지 않다고 보는 쪽이라서.”
나쁘지 않다는 평. 난 지금 이 연주가 라브렌티 선생님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했음을 느꼈다.
연주에 미스가 있진 않았으니 점수를 많이 감점당하거나 하진 않았겠지. 하지만 추가 점수를 얻는다거나 그런 건 요원하게 보인다.
“잘했다, 타티아나. 가 보렴.”
“…….”
미하일 선생님의 반응도 비슷했다. 난 어쩔 수 없이 시험장에서 빠져나왔다.
궁색하게 할 말은 없었다.
이번에도 수석을 놓치지 않고 싶었지만, 그냥 이래선 어림도 없었을 뿐이다.
아무래도 욕심이었던 걸까.
모두 내 고집대로 의도하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간 쌓아 올렸던 탑을 허물어뜨린 내가 이 천재들의 학교에서 수석을 유지하려는 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건강한 정신과 몸을 지닌 천재들이 얼마나 많은데, 오만한 것도 정도가 있지.
“정말 바보 같았네…….”
수석 자리를 지켜 내고 싶다고 생각해서 최선을 다한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선생님들의 평가는 정확했다.
지금 시험을 큰 문제 없이 치른 것도 간신히 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최근 들어서 점점 더 몸 상태가 안 좋았으니까.
“…….”
난 천천히 손을 쥐었다 폈다 해 보면서 손의 감각을 느껴 보았다.
멀다. 바로 어제보다, 조금 더 멀어졌다.
감각이 멀다는 말은 정말 이상하게 들리지만, 어쩐지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악화를 늦추기 위해 손목을 스트레칭했다. 그런데 심지어 스트레칭하는 느낌마저도 이상하다.
“…….”
난 끔찍한 아이러니에 빠져 있었다.
구세프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쇼팽 소나타 1번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몸의 밸런스는 더더욱 심하게 망가져 가기만 했다.
그렇게 제 컨디션을 내지 못하는 상태로 피아노를 컨트롤할 수 있을 리 만무했고, 난 쇼팽의 소나타는 물론 다른 곡들도 모두 제대로 연주할 수 없게 되어 갔다.
이 현상은 내가 원했던 곡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절대 해결되지 않겠지. 난 그걸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직접 겪으면서 느낀 바, 그건 어찌할 도리도 없이 철저하게 짜인 그물이었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나 섭리 같은.
이대로 고집을 부리면, 아예 피아노를 다시 한 번 모조리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 섬뜩한 예감이 종종 스쳐 지나갔다.
사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다 그만두고 현실에 순응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무섭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 혼자서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혼자 사라질 수 있다면 차라리 낫다.
하지만 난 마음대로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럴 권리도 생각도 없다. 난 망령에 불과할 내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면서 동시에 함께 짊어져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책임감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미련에 가까운 내 욕심을 우선시하다가 책임도 내팽개치고 방종에 휩쓸릴 순 없었다.
“……후우.”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내겐 시간 제약이 걸려 있었다. 약 2주 정도의 짧은 방학.
이 제약은 역설적이게도 날 조금 더 과감하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마지막 기회로 손을 뻗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번 방학 때까지만 힘내면 된다는 얄팍한 생각일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조차도 나 스스로를 속이는 기만일지도.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난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제대로.
난 그렇게 생각하고, 믿었다.
얼마 전 읽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선 인간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 내면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건 바보 같은 소리였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백 배는 어려웠다.
***
복도 끝 휴게실 의자에 앉아 있던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 집어넣곤 복도 쪽을 지켜보았다. 거기엔 학생들만 몇 명 돌아다니고 있었다.
“흐암…….”
잠이 부족해서인지 하품이 나왔다. 근래 공부량을 확 늘린 바람에 컨디션이 영 말이 아니었다.
물론 시험 기간에 힘들어하는 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학생들도 모두 다크서클을 눈 밑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다른 학생들은 물론 자기 자신도 안중에 없었다.
지금 그녀가 걱정스럽게 생각하는 건 다름 아닌 친구 타티아나였다.
타티아나는 평소에도 그리 건강하다 할 순 없는데 겨울엔 더더욱 약했다.
이 애는 내가 안 챙겨 주면 정말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작년 겨울에 타티아나를 봤을 때가 처음이었다. 그땐 종종 얼음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느낄 법한 심정이 덜컥 들기도 했다.
그래도 지난 1년 동안은 괜찮았었는데……. 무슨 일인지 요 며칠 사이 아나스타샤는 그때 느꼈던 서늘한 기분을 또다시 느끼고 있었다.
“…….”
슬슬 시험 끝났을 때가 되었는데.
개인 연습을 마친 아나스타샤는 바로 시험공부를 위해 스터디룸으로 가는 대신, 타티아나가 실기 시험을 치고 있을 레슨실 근처를 서성였다.
실기 준비에 방해되지 않도록 혼자 연습할 수 있게 두었는데,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지 모르겠다.
타티아나는 혼자서도 알아서 잘 해낼 텐데.
“……어.”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모습의 친구가 걸어 나왔다.
아나스타샤는 이제 실기 시험도 끝났을 테니 같이 스터디룸에 가서 필기시험 준비나 하자고 하려다가, 멈칫했다.
하얗게 되다가 결국 사라져 버릴 것처럼 보이는 백금발이 한 차례 흔들리다가 축 처진다. 그러고는 작게 움찔거렸다.
설마 우는 거야?
아나스타샤가 생각할 수 있는 건 타티아나가 실기 시험을 망쳤으리란 가정뿐이었다.
약간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중앙음악학교의 시험이 가혹하더라도 송년 제야 음악회보다 어렵진 않다. 그 어마어마한 무대도 말끔하게 치른 타티아나가 시험을 망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피아노 실기 시험은 일반 교과의 필기시험보다 훨씬 더 불합리한 편이었다. 어지간해선 공부한 대로 성적이 나오는 시험에 비해 순간과 순간을 오가야 하는 피아니스트들의 시험은 언제나 그 결과가 엉망이 될 수도 있었다.
만약 정말 타티아나가 실기 시험 때문에 울고 있다면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아나스타샤는 자기도 모르게 타티아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
그리고 타티아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다가갔을 때,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멀리서 볼 땐 우는 줄만 알았던 타티아나가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기 시험은 잘 본 건가?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무언가 약간 착각했을 거라 생각하며 타티아나를 불렀다.
“타티아나.”
“!”
타티아나는 놀란 토끼처럼 흠칫하더니 아나스타샤를 돌아보고 나서야 안도하며 온몸에 힘을 뺐다.
아나스타샤는 약간 석연찮음을 느끼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실기는 어땠니? 잘 본 것 같은데.”
“예?”
타티아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기분 좋아 보여서.”
“……제가요?”
“아니었어?”
웃고 있기에 괜찮았나 싶어 물어보았더니 영문을 모르겠단 대답이 돌아왔다.
잠시 생각해 본 아나스타샤는 자신도 가끔 시험을 너무 어이없게 망쳐서 기가 막히거나 할 땐 자각 없이 헛웃음이 나오곤 한다는 걸 떠올리며 바꿔 물었다.
“어, 실수라도 했어?”
“아뇨. 그렇진 않아요……. 그냥 제대로 하긴 했어요.”
타티아나의 대답은 점점 더 이상해지기만 했다. 제대로 하긴 했다는 건 대체 무슨 소리야?
여기서 실기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더 물어보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실기는 나중에 차차 물어보기로 하고 일단은 타티아나의 신경을 살짝 돌려놓기로 했다.
“시험 치자마자 피곤하겠지만 우리 이대로 공부하러 가자. 어제 나 혼자서 하다가 막힌 게 있는데 도와주면 안 돼?”
“아, 어떤 과목인가요?”
“수학.”
“좋아요. 언제라도 좋아요.”
도와 달라는 말을 듣자마자 타티아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이러나저러나 누군가를 도와주는 걸 정말 좋아하는 애였다.
아나스타샤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으며 막 발걸음을 돌리다가, 저만치에서 리처드와 눈이 마주쳤다. 리처드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무시하지 않고 다가와 물었다.
“뭐 해? 두 사람.”
타티아나가 대답했다.
“막 실기가 끝나서요. 이제 남은 교과목을 공부하려고요.”
“그래?”
리처드가 잘되었다는 듯 대뜸 물어보았다.
“어땠어. 이번에도 수석이겠지?”
“아하하…….”
약간 난감하다는 듯 타티아나가 웃음을 흘렸다.
아나스타샤로서는 기껏 타티아나의 신경을 다른 데로 돌려놓았는데, 다시 실기 시험 쪽으로 이야기가 향하는 것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마침 리처드의 수석 운운은 한마디 하기에 딱 좋았다.
“리처드. 뭐야 갑자기? 부담스럽게.”
“뭐가 부담스러워. 타티아나가 수석을 안 하면 누가 하는데.”
“에르네스트도 있잖아.”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여기 오기 전까지 에르네스트가 늘 수석이었던 건 사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애는 타티아나에게서 수석을 탈환해야겠다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었고……
리처드는 묘한 눈초리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더니 재미없다는 듯 삐딱하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난 두 사람을 놓고 내기한다면 타티아나에게 걸고 싶은데.”
“걸긴 뭘 걸어. 너 정신 나갔니 리처드?”
“어차피 너도 타티아나한테 걸 거잖아.”
“내가 바보야? 그딴 걸 하게?”
약간 화가 난 아나스타샤가 리처드를 힐난했다. 친구들 중 누가 수석을 차지할지를 놓고 경마를 하듯 내기하자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소리로밖에 안 들렸다.
평소 안 그러던 애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아나스타샤는 조금 더 심하게 한 소리 하려다가, 옆에서 들려오는 조용한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리처드.”
타티아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하지만 어딘가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장난으로 하시는 건 좋은데 혹시라도 정말로 내기를 하시거나 하진 마세요…….”
그녀의 말은 단순히 자신을 내기 대상으로 삼지 말아 달란 뜻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내기가 성립이 안 될 테니 괜히 손해 볼 짓 하지 말라는 것 같다.
아나스타샤는 묻고 싶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널 잡겠다고 벼르는 에르네스트 앞에서 할 테면 해 보라는 듯 당당했었잖아? 오늘 실기 시험이 그렇게 안 좋았어?
하지만 그렇게 물었을 때 타티아나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릴까 봐, 적어도 리처드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게 만들기 싫어서, 아나스타샤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