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20화 (420/1,277)

##  420화

시험 마지막 날. 학교의 분위기는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교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주제들. 예컨대 피아노, 작문, 피아노, 암기, 피아노 등으로 이어지던 삭막한 이야기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모두가 공부라는 건 머리에서 지워 버리기로 한 사람들 같았다.

나도 마지막 시험지를 제출한 뒤로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느껴져서 멍하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바르바라와 라리사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렸다.

“라리사, 네가 무슨 일로 파티에 참가하고 무대에까지 올라가기로 했어? 언제 준비했대, 그런 건?”

“어…… 나 혼자 할 건 아니고. 남자 친구랑 같이.”

“엥, 무슨 친구라고?”

“첼로과야.”

“세상에, 누군데? 궁금한데 얼굴 좀 보여 줘.”

“내일 볼 텐데 뭘?”

“아니 그게 아니라, 와…… 진짜 깜짝 놀랐네……. 잠깐만, 그럼 너 저번에 이야기했던 방학에 여행 간다는 것도?”

“응.”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해!”

남자 친구와 파티에서의 연주, 여행 같은 평범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사실 저 애들끼리의 이야기라서 옆에서 내가 들어도 되나 싶었지만 바르바라의 목소리가 워낙에 커서 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 모여들어 무리를 이루기 시작했다. 라리사에게 향하는 짓궂은 질문들을 그녀는 기분 좋게 받아치며 어울렸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내일 있을 파티 쪽으로 넘어갔다. 다들 9학년쯤 되니 이젠 파티에도 매너리즘이 느껴진다며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관심 있어 하는 아이들이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 2주간 있을 방학에 어디론가 떠날 생각으로 부풀어 있는 아이들도.

난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

살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험이 끝났음을 축하하며 평범하고 행복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난 그리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복도로 나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내려 새하얀 풍경에서 눈싸움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뭔가 현실 세계가 아니라 창문을 캔버스로 한 그림처럼 느껴졌다.

난 근래 들어서 이따금 이렇게 현실감이 확 떨어지는 것 같은 기이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복도엔 왜 나왔는지, 저 광경을 왜 쳐다보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왁자지껄한 소리들도 멀어져 가고 내 숨소리도 점점 사라져 간다.

생각이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을 때, 난 억지로 손을 들어 창틀을 붙잡았다.

찬 냉기가 확 스며들면서 정신이 들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멍하니 있으면 안 된다. 방학은 이제부터 시작이었고 난 더욱 깊은 곳까지 손을 뻗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더 밸런스가 망가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난 예전보다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호.”

창문에 입김을 살짝 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저 부옇다.

난 지금 내가 느끼는 쇼팽의 소나타 1번이 이렇게 느껴졌다.

저 깊은 곳에 파묻혀 있는 것을 꺼내 올리려 할수록, 점점 어려워졌다. 깊은 심해로 내려가는 것처럼 주변은 점점 더 어두워진다. 숨이 막히고 손이 내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답답하고 두려웠다.

바닥만 보고 내려가다가 가끔 등을 돌려 해수면 쪽을 보면 옅은 햇빛이 일렁이는 곳이 보인다. 멀고 또 멀어서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도, 돌아갈 수 있다고 믿고 다시 아래로 향했다.

혼자였다면 이렇게까지 하지도 못했을 것 같다. 아마 그만둘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는 도중엔 어렵고 힘든 것도 참아낼 수 있었고, 멀리 동떨어져 있던 감각들도 어느 정도 되돌아왔다. 선생님이 연주하는 곡을 듣다 보면 내 깊은 곳 어딘가에서 꿈틀거리는 선율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 붙잡진 못했지만, 지금 내뻗는 손가락이 엉뚱한 곳을 가리키고 있진 않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저 기분뿐인 것 같진 않다.

천천히 내려가고 있긴 했다. 적어도 제자리에서 숨이 막혀 가고 있진 않았다. 난 내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선생님이 내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만약 내가 걷는 것 하나에도 혹여나 무릎이 풀리지 않을까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선생님이 알았다면 지금 레슨이고 뭐고 그만두고 날 병원으로 보냈을 테니까.

선생님은 내가 기분이 조금 안 좋은 정도로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대해선 조금 죄책감도 든다. 이건 내 욕심과 고집을 위해 선생님을 이용하고 속이는 행위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마지막이니까. 나도 정말 무섭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이 정도는 용서해 주셨으면 좋겠다.

이 소나타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나면, 다시 돌아갈 테니까.

***

방학이 시작되어도 나는 규칙적인 기계처럼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입맛이 없어도 정해진 때 정확하게 식사를 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벨카와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 주었다. 지금 내가 유지해야 하는 건 몸을 움직이는 감각 그 자체였다. 벨카와 노는 건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오후엔 학교에 가서 구세프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았다.

방학인데도 선생님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학교에 나오라고 요구하셨고, 나 역시 두말 않고 학교에 나갔다.

길어도 2시간 정도. 선생님의 레슨은 혹독하면서도 절제되어 있었다.

난 최대한 태연하게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고 레슨을 받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선 모든 것들을 혼자 연구하고 다시 연습했다.

한 번 내 것이었긴 했지만,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갖은 경고들을 무시하며 캐내려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에 좌절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겠지. 난 묵묵히 내가 결정한 일에 최선을 다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별관 연습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빅토르에게서 미하일 선생님이 찾아오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갑자기요?”

난 당황해서 얼른 전화를 끊고는 바로 거울부터 봤다. 혹시나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 확인했다.

다행히 특별히 거슬리는 점은 없었고 연습실도 어지럽혀져 있지 않았다. 모든 게 제자리에 있고, 아무 문제도 느껴지지 않는다.

잠시 기다리자 미하일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좋은 아침이구나. 타티아나.”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하하, 지나가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말이다.”

“여기 앉으세요.”

선생님은 코트를 벗어 걸어 두시곤 내가 안내한 의자에 앉았다. 난 멍하니 있지 않고 바로 차를 끓였다.

찻잔을 놓고 마주 앉자, 선생님이 웃으며 찻잔을 슬쩍 들어 올렸다.

“고맙구나. 향이 좋은데.”

그리고 선생님을 따라 차로 목을 축였다. 두 명이 차를 마실 뿐인데도 혼자서 마실 때와는 달리 연습실 전체가 편안하게 훈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고개를 돌려 연습실을 천천히 둘러보시면서 말했다.

“이 연습실에 오는 건 오랜만인 것 같기도 하고…….”

“1년은 넘으신 것 같아요.”

“그렇지. 입학시험을 준비한 이후로는 내가 여기 올 일이 없었으니.”

중앙음악학교에 입학하기 전엔 거의 매일같이 오셔서 레슨을 해 주시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열의를 보여 주신 것이기도 했다. 방학 때라면 몰라도 학기 중엔 바쁘기도 하셨을 텐데.

미하일 선생님은 그렇게 날 레슨 했던 때를 생각하시는지 흐뭇하게 웃으시다가, 지금 내가 받고 있는 레슨을 떠올리신 것 같았다.

“오늘도 오후엔 학교에 가겠지?”

방학인데도 내가 구세프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고 있다는 건 미하일 선생님도 알고 계시는 일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구세프에게 받는 레슨 진척은?”

쉽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난 지금까지 레슨을 받으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선생님들이 요구하시는 걸 충족시키면서 그 이상을 추구했다.

하지만 이번엔 레슨을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왜 이렇게 못하고 있는지 그 이유는 잘 안다. 허락되지 않은 미련을 원하면 원할수록 생기는 심신의 괴리. 하지만 내가 지니고 있는 문제를 선생님들에게 그대로 말씀드릴 순 없었다.

“선생님께서 흡족하실 만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네 자신은?”

“……저 역시도요.”

“단호하구나.”

미하일 선생님은 물끄러미 날 본다.

선생님은 가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을 때가 있었다. 지금도 어쩌면 비슷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단호하다고 말씀하곤 계시지만, 사실 내가 전혀 단호하지 못하다는 걸 느끼고 계실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선험적인 직관이 정말 강하신 분이시니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살짝 여쭈어보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차 향기만 흐르는 시간이 잠시 지나가고, 미하일 선생님이 찻잔을 들며 천천히 말씀하셨다.

“지금 구세프와 네가 하고 있는 레슨에 내가 끼어들 순 없겠지. 재작년에도 난 널 내버려 둔 쪽이었으니까.”

“내버려 두다뇨? 그렇지 않아요.”

“적어도 구세프처럼 네가 완성하고 싶은 곡을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난 연주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필요로 하는 곡은 다른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얻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수십 년, 혹은 평생이 걸리더라도…….”

그 말처럼, 미하일 선생님은 내가 무대에 오르면서 차차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며 날 크게 터치하지 않았다. 험로라면 험로인 대로 자기 자신의 길을 개척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미하일 선생님의 교육관에 가까웠다.

옛 기억을 정리하는 듯하시던 미하일 선생님은 말끝을 흐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도 생각을 잘못 했었지. 넌 높은 나무에 열린 과실이 무슨 맛인지 궁금해서 팔을 쭉 뻗는 중이 아니라, 깊은 곳에 파묻어 두었던 오래된 상자를 한 번 더 꺼내어 보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중이었을 텐데.”

“…….”

“타티아나, 네가 원하는 건 이미 완성되어 있는 곡에 매듭을 짓는 일이었겠지.”

내가 열네 살을 기점으로 연속되지 않고 단절되어 있다는 걸 아시는 미하일 선생님은 날 조금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오셨다. 난 그간 선생님이 날 지켜보면서 얼마나 깊게 생각하셨는지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이 먹먹해져서 어떻게 답해야할지 모르겠다. 미하일 선생님이 미소를 지었다.

“……옛날 가르쳤던 제자가 남긴 곡들을 하나씩 읽어 보면서 느낀 게 많았단다.”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제자의 부고로 선생님께서 학교를 비우셨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선생님은 뭘 보게 되셨고, 무슨 생각을 하게 되신 걸까.

상상조차 어렵다. 난 멀거니 선생님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그리고 또 요즘 구세프와 너를 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네 지도 선생으로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는 게 옳지 않나 싶구나.”

이미 충분히 최선을 다해 날 가르쳐 주고 계신 분께서 어떻게 더 최선을 다하시겠다는 걸까.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레슨 말씀이신가요.”

“아니, 그건 구세프와 네 약속이니 괜찮겠지. 난 레슨에 손을 댈 생각은 없구나. 얼마 전 실기 시험장에서 네 연주를 들어 보기도 했었고.”

그럼 레슨이 아닌가?

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미하일 선생님은 쿡 웃으시더니 품속에서 티켓을 한 장 꺼냈다.

“미술관에 가 보지 않겠니. 타티아나.”

“예?”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가 본 적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날 놀리려 하는 말씀이 아니라,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날 위해 피아노 외에 볼 만한 것들을 종종 추천해 주시곤 했다. 그건 보통 책이나 영화가 대부분이었지만, 이렇게 어딘가 가 보라고 하실 때도 있었다.

“아직 없어요.”

“그래. 잘되었다. 이번에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의 티켓을 우연히 얻게 되었는데, 꽤 재미있어 보이더구나.”

난 티켓을 바로 받지 못하고 조금 망설였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방학이 끝나기까지 열흘가량. 그사이에 결판을 내야 하는데 다른 곳에 시간을 쓸 수 있을까?

그러나 난 미하일 선생님이 엉뚱한 말씀을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이전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콩쿠르에 참가할 때, 콩쿠르 날짜에 딱 맞춰 가지 말고 조금 일찍 가서 관광을 해 보라고 추천해 주셨던 일이 떠올랐다. 그땐 정말 큰 도움이 되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난 미하일 선생님을 믿고 따르기로 했다.

티켓을 받아 들자 선생님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감상문 같은 걸 쓸 필요는 없단다.”

부담가지지 말라는 듯 편안한 어투.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진 말은 진지했다.

“말로는 할 수 없는 감상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구나.”

“…….”

미하일 선생님이 피아노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날 돕기 위해 추천해 주신 일이다. 분명 무언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안에 든 티켓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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