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1화
옷을 입으면서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누군가에게 같이 가자고 해 볼까.
미하일 선생님이 주신 티켓은 한 장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혼자 가란 법은 없었다. 티켓이야 더 사면 되는 일이니까.
“…….”
하지만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는 몇 안 되는 연락처를 천천히 짚어 보아도 같이 가자고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아나스타샤는 콩쿠르 준비로 한창 바빴다.
나 역시 방학 내내 바쁘니 자연스럽게 우리 사이엔 방학 일정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져 있었다. 서로 집중할 것이 있으니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머리도 식힐 겸 미술관에 가지 않겠느냐고 묻는다면 아나스타샤는 거절하지 않고 나와 주겠지만…… 잠시 생각해 본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녀가 지금은 자신의 피아노에 집중해 주었으면 했다.
다음으로 생각나는 건 발렌티나였지만 그녀는 이미 모스크바에 없는 상황.
그다음은 에르네스트였다.
“…….”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같이 다녔을 때도 에르네스트의 도움이 가장 컸었다. 그는 나보다 훨씬 아는 것도 많고 현명했다. 같은 곳을 돌더라도 그와 함께라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뭔가 도슨트를 구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자마자, 에르네스트에게 연락하는 것도 포기했다.
안 그래도 그 역시 바쁜 사람이었다. 얼마 전 구세프 선생님에게 퇴짜 맞은 악보를 방학 내내 집에서 뜯어고치겠다고 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지금도 악보를 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방해하기 싫었다.
이어서 리처드와 한승우 그리고 류보비나 아나톨리의 전화번호도 보였지만, 난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못했다. 어디 놀러 가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미술관에 가자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루슬란 오빠도 집에 없고, 결국 혼자 갔다 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말이 혼자지, 경호원들과 함께 다닐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난 옷을 두껍게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 외출을 부탁했던 빅토르와 자하르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빅토르가 손목을 까딱이며 물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말씀이시죠?”
“예. 부탁할게요.”
“왜 혼자 가십니까?”
갑자기 명치 부근이 왜 아픈지 모르겠다. 밸런스가 깨지면서 감각이 흐트러지고 신경이 둔해지는 것만 느꼈었는데, 이젠 이런 직접적인 통증까지 찾아오는 건가?
난 일단 신경 쓰지 않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왜 혼자예요? 빅토르가 있잖아요. 자하르도 있고.”
“아가씨 경호원들은 주변 경호에 여념이 없어서요. 같이 미술품 보면서 감상을 나누기에 적합한 상대는 아닙니다. 아시잖습니까?”
“괜찮아요. 저도 미술은 잘 모르니까요. 모르는 사람들끼리 이야기할 것이 있지 않겠어요?”
“아무리 몰라도 어떻게 아가씨랑 제가 같습니까? 전 요즘 아가씨 덕분에 클래식은 조금 듣지만 원래 예술이랑은 영 인연이 없는…….”
“가요, 얼른.”
난 괜히 빅토르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빅토르는 맥없이 내 손에 끌려와 주었다.
미술관까지 가는 차 안에서, 난 일부러 빅토르와 자하르에게 농담을 걸며 장난을 쳤다. 빅토르는 여느 때처럼 가끔 선을 넘는 농담으로 맞받아치기도 했고 자하르는 과묵했지만 가끔 피식 웃는 정도의 반응은 보여 주었다.
그냥 이렇게 천천히 드라이브만 해도 즐거울 것 같았다. 하지만 빅토르는 빙 돌거나 하는 일 없이 모스크바 강 남쪽 중앙구의 라브루신스키 거리로 날 데려다주었다.
“도착했습니다.”
“왜 이렇게 빠르죠?”
“오늘은 도로 상황이 괜찮더군요.”
“…….”
살짝 아쉬워서 말해 본 건데, 더 말하기 싫어졌다. 난 미술관 경호팀에게 협조를 구하러 가 보겠다는 자하르를 배웅하고 빅토르와 같이 커다란 건물 앞에 섰다.
난 가만히 건물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물어보았다.
“제가 여기에 와 본 적 있었나요?”
괜히 바보같이 들리기만 하고 굳이 할 이유가 없는 질문이었지만, 빅토르에게라면 조금 편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빅토르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아주 어리실 때, 한 번 오신 적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기억이 안 나실 만도 하죠.”
“아하하.”
빅토르는 농담을 던지며 어깨를 으쓱했다. 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간신히 웃음을 그치고, 난 이제 처음 보는 미술관을 입구부터 감상하기 시작했다. 전부터 느낀 것이긴 한데, 역사가 깊은 미술관들은 건물부터가 예술품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오래된 건물 같아 보이진 않아요.”
라브루신스키 거리에 위치한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도 않았고 오래되어 보이지도 않았다. 네모반듯하게 생긴 본관 건물은 붉은색으로 벽면이 칠해져 있었고, 꽤나 세련된 지붕 달린 입구는 마치 귀여운 장난감 집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본관 꼭대기엔 모스크바의 수호성인 게오르기가 창으로 용을 물리치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장난감 집 같은 것이 아니었다. 분명 이 미술관은 150년도 넘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모스크바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 본관만이 전부가 아니라 그 왼편으로 커다란 종탑과 4개나 되는 양파 모양의 정교회 성당식 돔을 지닌 성 니콜라스 성당 미술관, 그리고 보다 현대적인 양식으로 지어진 엔지니어링 빌딩이 있었다.
이 모두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었고, 덕분에 여기선 교회 미사도 열리고 대형 컨퍼런스 홀에서 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한다고 한다. 심지어 본관 오른편엔 이보다 훨씬 큰 새 건물이 한창 공사 중이었다.
이 모든 것이 완료되면 단순한 미술관이 아니라 종합 문화 센터에 가까워질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난 미하일 선생님이 주신 티켓을 다시 확인했다.
“이 티켓은 옆에 있는 엔지니어링 빌딩의 전시회 티켓이네요.”
“특별 전시회는 거기에서 주로 열리곤 하죠.”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한 전시회만 보고 가는 것도 아쉽다.
“그래도 본관부터 둘러보기로 할까요?”
“현명하십니다.”
빅토르는 괜히 그런 말을 했다.
그와 함께 미술관 안으로 들어섰다. 짐 검사를 받고 곧장 매표소가 나올 줄 알았는데 지하로 조금 내려가야만 했다.
특이한 구조라고 생각하면서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모스크바에서 제일가는 미술관의 본관이라기엔 외관이 작고 귀여운 느낌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내부도 비슷하리라 생각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크고 화려한 로비가 우릴 맞이했다.
온통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면서 조명은 현대적이기도 했다. 묘한 조화로움이 느껴졌다.
아침인데도 방학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빅토르와 잠깐 줄을 서서 티켓을 샀다. 난 18세 미만이라서 무료였기 때문에 빅토르의 것만 있으면 됐다. 그는 티켓뿐만 아니라 소장품들의 목록이 적힌 전시 도록도 구매했다.
외투와 가방을 맡기는 것으로 완벽하게 미술관 관람을 할 준비를 마치고, 빅토르가 손짓했다.
“이쪽입니다.”
그리고 난 그림을 한 점 보기도 전에 계단부터 올라야 했다.
계단을 내려가서 지하의 매표소에서 티켓을 샀으니까, 이젠 다시 계단을 올라가야만 1층부터 관람을 할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걸까요?”
“아가씨 운동시키려고요.”
“…….”
말을 말자. 정말.
난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것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발을 들어올렸다. 빅토르 말대로 원래 같았으면 운동 삼아 오르기에 딱 좋은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내 몸 상태는 그리 정상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만큼 난 신경을 써야만 했다.
학교에서도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얼마나 신경을 집중하는지 모른다. 갈수록 흐리멍덩해지는 감각에, 어긋나서 헛디디지 않도록 계단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신중하게 발을 딛는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이상하지 않도록 적당히 빠른 속도로 올라가야 했다.
그 모든 걸 신경 쓰자면 정말 계단을 오르는 단순한 일에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진다.
“…….”
이런 상태로 대체 무슨 피아노를 치겠다는 건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난 더 우울한 생각이 들기 전에 계단에만 신경을 쏟았다. 빨리 올라가서 전시품들을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행히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전시품들은 내 기대감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었다.
“어떻게 이렇게 섬세하게 그릴 수 있는지…….”
난 한 초상화 앞에 서서 감탄사를 발했다.
옛 러시아 귀족의 초상화였는데, 깊게 주름 잡힌 이마와 앙 다물린 입이 깐깐한 성격을 보여 주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굉장히 사실적이고 멋진 초상화였다.
그 외에도 초상화들이 많았다. 잘 모르는 이름들도 많았지만 그중에선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나 푸쉬킨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화는 한눈에 들어왔다.
바실리 그레고리예비치 페로프라는 화가가 그린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화를 보니 마치 그가 살아서 내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요 근래 그의 작품을 많이 읽어서인지, 난 한참 동안이나 그 앞에 서 있었다.
“아가씨도 그려 보시면 어떻습니까?”
느닷없이 빅토르가 그런 말을 했다. 난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전 피아노만으로도 벅찬데요?”
“아, 직접 그리시란 말이 아니라 아가씨 초상화를…….”
“그건 더 이상하죠!”
이상하다고 말해 놓고 나니까 사진은 잘만 찍으면서 초상화는 왜 안 되는지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부끄러웠다. 아무튼 싫었다. 그리고 대체 그게 왜 있어야 하는 건데?
빅토르는 기겁하는 내 반응을 보더니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쉽네요. 아가씨 초상화가 있어야 저희 숙소에 있는 송년 음악회 포스터 대신 걸어 둘 텐데요.”
“……예? 진짜 붙였어요!?”
“농담입니다.”
“…….”
장난이 아니라 정말 머리가 핑 돌았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대체 저한테 왜 이래요……
머리를 짚으며 빅토르를 노려보았다.
“빅토르 때문에 어지럽잖아요…….”
“하하하하.”
빅토르는 그저 웃기만 했다. 난 살짝 약이 올랐지만, 차라리 그가 웃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미술관을 쭉 둘러보며 여러 작품들을 감상했다.
이곳의 소장품들은 거의 대부분이 러시아 화가들의 것이었는데,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까 다른 유럽의 화가들과는 다른, 러시아 화가들 특유의 분위기가 굉장히 뚜렷하게 느껴져서 마음에 들었다.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이 있어야 할 곳인데, 없으니 조금 아쉽군요.”
살짝 아쉬운 점도 있었다.
국민 화가라 할 수 있는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의 걸작,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이 전시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미술관의 주 전시품이기도 한 그 작품이 없는 이유는 참으로 황당했다. 한 취객이 관람객 접근 방지용 봉으로 그림을 쳐서 훼손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
정말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작품일 텐데, 응당 영원히 존재해야 함이 마땅해야 할 것 같은 위대한 화가의 작품도 이렇게 쉽게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뭔가 갑자기 허무해졌다.
어쩌면 뭐든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쉽게 망가지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다. 허망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망연해져 있는 날 보던 빅토르가 내 앞을 살짝 가리며 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복원될 겁니다. 그때 다시 보러 오죠.”
“…….”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 비운의 작품은 1913년에도 지금과 비슷하게 관람객으로부터 훼손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땐 일리야 예피모비치가 살아 있었기에 직접 복원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젠 그가 죽은 후로도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다.
다른 사람들이 복원한 그림은 과연 원본과 완전히 같을 수 있을까.
물론 복원을 맡는 사람들도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자들일 테니 보통 사람들의 눈엔 감쪽같이 보일 테지.
하지만 미세한 차이라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본다면, 아니면 죽은 일리야 예피모비치가 그림을 본다면 분명……
“……그래요. 다음에 다시 와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난 고개를 휘휘 저어 버리곤 빅토르에게 말했다.
그와 약속했으니까 일단 다른 작품들이나 더 보러 가야겠다. 여기에 계속 있어 봐야 기분만 더 안 좋아질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른 곳으로 가려는데, 고개를 돌리자마자 낯익은 코트와 애쉬브라운의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말 깜짝 놀랐다.
저편에서 오던 리처드는 나보다 더 놀랐는지 우뚝 멈춰 서선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푹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갑자기 확 나아졌다. 난 환하게 웃으며 그를 불렀다.
“리처드!”
리처드는 조금 당황스럽다는 듯 나와 빅토르를 번갈아 보더니, 평소처럼 피식 웃었다.
“그림 사러 왔어?”
“무슨 말인가요 도대체…….”
그의 밑도 끝도 없는 농담에 난 할 말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