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2화
리처드가 손목만 살짝 들어 올려 인사했다.
“안녕.”
우리 학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미술관이니 방학에 이렇게 만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서로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는 걸 이렇게 만난 건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리처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타티아나.”
“저도요. 신기해요.”
“빅토르 아저씨만 있는 거야? 아나스타샤는?”
그는 당연하다는 듯 아나스타샤를 찾았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아나스타샤는 콩쿠르 준비로 바빠서요.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
빅토르만 대동하고 미술관에 온 것이 의아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리처드도 혼자 온 것 같아 보인다.
그는 별 상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곤, 엄지손가락으로 벽면을 가리켰다.
“어쨌든…… 여기 있던 작품을 보려고 했었구나. 이반 뇌제의 그림이었지?”
“예.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을 그린 그림이 있어야 했던 곳이죠.”
지금은 복원 중이라는 작은 안내판만 남아 있을 뿐이었지만.
리처드는 무표정하게 그 안내판을 내려다보다가 불쑥 말했다.
“조금 허무하다. 그렇지 않아?”
그 말에 살짝 놀랐다. 내 감상과 똑같았다.
없는 그림을 놓고 감상이라고 하니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보통은 작품을 훼손한 사람에 대해 화가 나거나 낭비한 시간에 대한 짜증을 느끼지 않을까?
하지만 리처드는 분명히 허무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가 이어 말했다.
“취객의 순간적인 행동이 이렇게 작품을 망쳐 놓았잖아.”
“……그렇다고 들었어요.”
다시 그의 옆얼굴로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허무함, 슬픔, 권태로움.
리처드는 요즘 들어 굉장히 밝아져서 친구들과 잘 어울려 주곤 하지만, 사실 처음 봤을 땐 살짝 허무주의자 같은 분위기를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뭉실뭉실 떠오른다.
하지만 우연히 미술관에서 서로 만났는데 우울하게 만들 생각은 없다는 듯, 리처드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 보면 일리야 레핀이 그 정도로 천재라는 방증이기도 하겠네.”
“방증……이요?”
“이 수많은 작품들 중에 딱 그 작품만 노린 걸 보면 사람을 홀리는 무언가가 있지 않았겠어?”
리처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내 쪽으로 슬쩍 다가왔다.
조금 우울한 이야기라도 말하는 투에 따라서 느낌이 확 달라진다. 무서운 이야기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중얼거렸다.
“이반 뇌제도 광증이 도져서 자기 아들을 순간적으로 지팡이로 내리쳐 죽였다고 했었지. 그 광증이 그림에도 드러났던 것 아닐까…….”
무서운 이야기는 질색이지만 이건 솔직히 재미있게 들렸다. 작품에 담긴 광기가 사람을 매혹하다니, 음악을 하는 입장으로서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니 허점이 많은 이야기였다.
난 일부러 딱딱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의 공격을 받았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지금까지 그림 앞을 지나간 사람이 수백만 명은 될 텐데요.”
“아니, 꼭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그리고 일리야 예피모비치의 천재성은 굳이 그렇게 방증할 필요 없이 그냥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알겠어…… 내가 바보 같은 소리를 했어.”
리처드가 양손을 들었다. 그를 항복시킨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그 팔을 내려 주었다.
왜 미술관 관람을 선생님에게 받은 숙제처럼 생각하고 혼자 올 생각밖에 못 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즐거운 것을.
리처드 역시 비슷한 생각인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날 잠시 바라보았다.
“다른 작품들은? 네가 보기에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뭐가 있었어?”
“너무 많기도 하고, 전 미술은 잘 모르는…….”
“재미없는 말 하지 말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 평가엔 가치가 있는 거야. 잘 알면서 왜 그래.”
다른 사람들에게 음악은 편견 없이 그냥 들어만 달라고 말하면서 막상 미술은 어렵게 바라보는 것도 문제다. 난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네요. 음…….”
빅토르와 돌아다니면서 봤던 수많은 그림들을 떠올렸다. 너무 많아서 전시 도록을 봐야지 다시 제대로 떠올려 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중엔 내 뇌리에 아주 강하게 새겨져 있는 작품도 있었다.
“한 작품만 꼽자면 알렉세이 콘드라제비치 사브라소프의 작품이 기억나요. 눈이 막 녹기 시작한 겨울 풍경으로 나무에 까마귀들이 모여 앉아 있는 그림이었죠. 까마귀가 돌아오다, 라는 제목이었을 거예요.”
“그 작품 정말 괜찮지. 그림의 장단점에서 장점은 확실히 취하고 단점은 완벽하게 상쇄한 작품이라고 생각해. 배울 게 많아.”
“……!”
이번에도 그의 감상은 나와 같았다.
자연을 그대로 담아낼 수밖에 없는 사진에 비해 그림이 가지는 장점은 분명했다.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개성이나 사진보다 뚜렷한 주제 의식. 그런 것들이 그림엔 보다 잘 드러난다.
대신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직관성 등은 조금 떨어지기 마련이었는데,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거의 사진이나 다름없어서 그런 단점도 느끼기 어려웠다.
그리고 난 이러한 테크닉이 그림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음악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림을 보는 내내 그런 감상을 가졌던 것 같다.
배울 게 많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리처드 역시 같은 생각으로 보였다. 나도 모르게 즐거운 웃음이 나왔다.
“아하하.”
“왜 웃어?”
“그냥요…….”
리처드도 결국 뿌리까지 피아노 연주자였다는 걸 다시 확인한 기분이라 웃었다고 말했다간 어쩌면 놀리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을 아꼈다. 리처드는 설명해 달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난 그냥 웃기만 했다.
대신 그에게 거꾸로 물었다.
“리처드는 어떤 작품을 꼽고 싶으신가요?”
“나? 황야의 그리스도.”
제목만 들어선 모르겠다.
“음…….”
“이반 니콜라예비치 크람스코이의 작품이야. 어떤 거냐면 어, 황야에 예수가 앉아 있는 그림인데…… 아니, 제목 그대로네.”
“완벽한 표제예술이군요?”
“잠깐만. 전시 도록 있으면 줘 볼래.”
“여기요.”
그는 전시 도록을 받아선 휙휙 넘기며 말했던 작품을 찾기 시작했다.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가 전시 도록을 도로 내밀었다. 거기엔 그가 했던 설명 그대로의 작품이 있었다. 아까 본 기억이 난다.
“이 작품도 봤어요. 마음에 들더라고요.”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지.”
리처드가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전시 도록에 있는 작은 그림을 다시 보았다.
돌밖에 없는 황야와 심각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어딘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예수. 무게감 있으면서도 정교하지만 화려함은 없다.
마음에 든다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리처드는 어떤 부분에서 이 작품을 좋아하는 걸까.
조금 더 물어볼까 싶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렇다면 오늘 리처드는 이 작품을 보러 미술관에 오신 건가요?”
“아니? 오늘은 다른 걸 보러 왔지.”
“다른 것이요?”
“음…… 오늘은 대충 너도 나랑 같은 목적이지 않나 싶은데?”
“?”
무슨 말인가 싶어 올려다보니, 리처드는 킥 하고 웃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추리 놀이나 해 볼까.”
그리고 그는 짐짓 말투까지 바꿔 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내 생각엔 네가 여기 상설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을 다른 애들도 없이 보러 오진 않았을 거 같거든.”
“못 올 이유는 또 무엇인가요?”
“그냥 확률적인 이야기야. 아나스타샤가 콩쿠르 준비로 눈 코 뜰 새 없다면, 콩쿠르 다 끝난 다음에 걔랑 같이 왔어도 될 일이니까.”
원래 같았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 같다. 리처드의 추리는 정확했다.
그래도 지금 추리 게임을 당하는 입장에서 뭔가 방해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일단 변명을 해 보려는데, 그는 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이어 말했다.
“그리고 이런 추리를 할 땐 이러저런 복잡한 가정을 두지 않고 보통 가장 단순한 게 답인 경우가 많지.”
“가장 단순한 거요?”
“이 본관 말고 옆의 엔지니어링 빌딩에서 하는 전시회. 그건 기간이 굉장히 짧았거든. 그거 보러 온 거 아니야?”
이제야 변론의 기회가 돌아왔지만, 솔직히 아무 소용 없었다.
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정답이에요. 셜록 홈즈도 울고 가겠어요.”
“진로를 잘못 정했다니까. 탐정을 했어야 했는데. 나 참.”
그림을 보면서도 피아노에 뭘 접목시켜야 할지 궁리하는 사람이 어떻게 탐정을 하겠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난 리처드의 말도 안 되는 농담에 웃다가, 갑자기 중요한 게 지나쳐 갔다는 걸 깨달았다.
“어…… 그런데 저랑 비슷한 목적이시라고요?”
“나도 옆 건물 전시회에 관심이 있어서. 여긴 와 본 김에 들린 거고.”
그제야 난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만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특별 전시회가 우릴 불러들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며칠이나 열리는 전시회 일정 중 정확하게 오늘 만난 건 굉장한 우연이었다.
굉장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 리처드가 가만히 웃더니 손짓했다.
“본관은 대충 돌았고…… 메인 디시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좋아요.”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리처드가 합류해서 나와 그, 그리고 빅토르까지 우리는 세 명이 되어 바로 옆 엔지니어링 빌딩으로 향했다.
본관과 달리 7세 이상은 모두 티켓이 필요했다. 난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리처드와 빅토르만 티켓을 사서 안으로 들어섰다.
엔지니어링 빌딩의 내부는 미술관 본관보다 약간 더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1층은 컨퍼런스룸 등으로 비지니스 용도로 사용하기도 한다고 하고, 2층과 3층이 바로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곳이었다.
빅토르와 리처드를 따라 올라가니 작은 안내판이 있었다. 시간과 존재라는 이름의 전시회였다.
“리처드는 어떤 작품을 보고 싶으신가요?”
“딱히. 그냥 처음부터 돌아보자.”
선생님에게 티켓을 받은 나와 달리 방학인데도 직접 전시회를 보러 온 리처드는 뭔가 보고 싶은 작품이 분명히 있을 텐데도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투였다. 난 그가 어떤 작품에 관심이 있을지 궁금해져서 유심히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난 리처드를 관찰할 틈을 내지 못했다. 그 시간에 작품들을 보기에도 바빴기 때문이었다.
인상주의로 넘어와서 설명 없이는 사실 알아보기 어려운 작품들이었지만, 이 모든 작품들이 합쳐져서 전시회의 테마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
난 한 작품 앞에 멈춰 섰다.
좌우로 팔을 쭉 펼쳐도 내가 두 명은 있어야 될 법한 길이. 창백한 푸른 배경과 그 위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람들이 큰 캔버스를 꽉 채웠다.
외젠 앙리 폴 고갱의 말기 대표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
제목만 보고 한참이나 그림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설명을 읽어 보았다.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 고갱은 본래 선원이었다. 그리고 증권사에서 주식중개인으로서 일하다가 1883년, 늦게 서른다섯 살이 되어서야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화가가 아닌 삶을 살면서 고갱이 느꼈을 것이라 짐작되는 것들, 그리고 사랑하던 딸을 잃고 말년에 이르러 이 그림에 매진했다는 이야기 등이 건조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배경 해설로는 아주 부족하다. 대신 난 이 그림이 그 자체로 주제를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렸고, 어떤 경로를 통해 미국 보스턴 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지만 이번 특별 전시회를 위해 이 먼 곳까지 대여된 거대한 한 장의 그림.
그다음은 어디로 이어질까.
“반대로 보면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뭔지, 어디로 가는지 하나도 모른다는 건가.”
리처드는 턱을 괴고 그런 말을 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한참이나 고갱의 작품을 감상하다가, 다음 작품들로 넘어갔다. 정말 내게 미술을 감상할 지식과 감식안이 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와 리처드는 이러저런 감상들을 교류하면서 작품들을 지나쳐 갔다. 그리고 어느 한 작품에서 그가 멈춰 섰다.
“…….”
19세기 덴마크 출신의 화가 카를 하인리히 블로흐의 성화, 위로하는 천사와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라는 작품이었다.
겟세마네gethsemane는 예수가 로마의 유대장관 폰티우스 필라투스에게 체포되기 전날 밤 올라 기도를 한 곳이었다. 깊은 고뇌가 드러난 표정이 정말 사실적이었다.
아까 전 황야의 그리스도도 그렇고, 리처드는 이런 성화들을 좋아하는 걸까. 하지만 난 그의 피아노에서 종교적인 뉘앙스는 별로 느껴 본 적이 없었다.
“…….”
생각해 보니 제대로 리처드의 피아노를 들어 본 적도 별로 없구나. 재작년에 대결을 할 때가 거의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는 항상 실력을 숨기고 자신을 숨기고 있다.
난 리처드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진지하게 작품을 감상중인 옆얼굴을 보곤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