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3화
특별 전시회를 다 돌고 나니 1시간 정도 흘러 있었다.
본관에서 있었던 시간까지 합하면 2시간이 훌쩍 넘게 돌아다닌 셈이었다.
“피곤해? 타티아나.”
잠깐 정신을 놓았나 보다. 리처드가 물었다.
솔직히 말해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단지 걸어 다니면서 작품들을 감상하는 게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난 녹초가 될 정도로 지쳐 버렸다.
안 그래도 몸 상태가 안 좋은데 너무 무리했던 것 같다. 이래서 오후에 구세프 선생님에게 레슨을 어떻게 받나 싶다.
그래도 얻어 낸 수확은 많았다.
까마귀가 돌아오다. 그리고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수많은 작품들을 전부 기억하진 못하더라도 이 두 작품을 제대로 기억한다면 오늘 이 몇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두 작품은 미하일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감상문으로 쓰거나 하지 않아도 내게 충분히 큰 가치가 되어 주었다.
난 리처드를 보며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에게 힘들다는 소릴 할 순 없었다. 리처드는 내 고집이 세다는 걸 알고 있어서 일부러 사고를 쳐서 쉬게 만든 전적도 있었다. 이런 친구를 사귀었다는 것에 대해선 감사할 따름이지만, 지금은 그가 무언가 하면 조금 곤란했다.
저번과 달리 이건 내가 상황을 파악하고도 택한 길이었다. 감수해야 하는 것도 내 일이다.
난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집중하면서 그와 함께 전시실을 빠져나왔다.
기념품으로 엽서와 책도 조금 사고 시간을 확인하니 곧 점심 식사를 할 때였다.
난 배고픈 것도 잘 못 느끼고 있긴 하지만, 리처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그냥 보내기도 아쉬웠다. 이번엔 내가 제안했다.
“이제 점심인데, 식사라도 함께 하시겠어요?”
리처드는 가볍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가자.”
우린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적당한 가격대에 평도 괜찮다고 빅토르가 추천해 준 곳이었다.
봉골레 파스타와 연어 샐러드, 스텔라 피자를 주문하고 잠시 기다리자 음식은 금방 나왔다.
파스타를 돌돌 말면서 리처드가 말했다.
“특별전말야, 생각보다 괜찮았던 것 같아. 솔직히 별 기대 안 했었는데.”
“그랬나요?”
“뭐…… 그랬지.”
리처드는 대충 대답하면서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난 그가 전시회 관람에 꽤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가 연 전시회도 아닌데 말이다.
그가 좋아했었던 작품들을 떠올리면서 나도 스프를 한 입 뜨는데, 그가 물었다.
“넌 어땠어? 타티아나. 미하일 선생님이 내준 숙제였다며.”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굉장히 가치 있고 유익했으며, 감상문을 쓸 필요도 없는 숙제였다. 난 간단하게 답했다.
“이런 숙제라면 늘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선생님 기절하시겠네.”
리처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킥 웃고는 포크를 들었다. 나도 그를 따라 포크를 들며 말했다.
“좋은 관람이었죠. 또 우연히 리처드도 만났고 말이에요.”
오늘 이 추억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가볍게 웃자 리처드도 미소로 화답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약간 솔직해지고 싶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나도 사실 오늘은 혼자 조용히 둘러보고 싶어서 왔었던 건데, 너랑 같이 돌아보는 게 혼자 도는 것보다 나았던 것 같아.”
“그런가요? 전 감상에 별 도움이 안 되었을 텐데요.”
“그림을 보면서 피아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선 도슨트보다 나았는데?”
난 빵 터져서 한참을 웃었다. 그 말대로였다. 미술관에서 피아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친구들과 함께 왔을 때뿐일 테니까.
파리에서 아나스타샤와 미술관에 갔을 때 그녀도 비슷한 걸 느꼈을까? 그랬었다면 좋겠다.
“도움이 되었다면 기뻐요.”
“넌 꼭 그렇게 말해 주더라.”
리처드는 묘한 어투로 그렇게 말하더니,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얼버무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피자를 잘라선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우리는 그 뒤로도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리처드는 연말에 영국에 갔다 온 덕분에 방학엔 기숙사에서 쉬거나 놀면 되니까 편하다며 킬킬거리기도 했다.
난 리처드에게 혹시 콩쿠르 같은 데에 나갈 생각 없느냐고 살짝 운을 떼었다. 그는 마음 같아선 나가고 싶다고 답하긴 했지만 사실 전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와 친한 아나스타샤나 한승우가 콩쿠르 준비로 여념이 없는 것에 상반된 반응이었다.
약간 아쉽긴 하지만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었다. 나도 성인 콩쿠르에 나가기 전까진 콩쿠르에 전혀 생각이 없었으니까.
대화를 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이렇게 리처드와 단둘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사실 좀처럼 없었는데, 이번엔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리처드가 마지막으로 찻잔을 비우며 말했다.
“슬슬 일어날까.”
점심 식사도 했겠다, 사실 마음 같아선 그와 조금 더 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난 곧장 학교로 가서 구세프 선생님에게 레슨도 받아야 했고 체력도 아껴 두어야 했다.
학교로 갈 생각을 하다 보니 리처드도 지금 기숙사에 머물고 있단 게 떠올랐다.
“아, 리처드. 혹시 기숙사로 가시나요?”
지금 바로 가는가 싶어 물어보았다.
리처드는 피식 웃더니 장난스레 대꾸했다.
“당연하지. 이 땅에 내가 있을 곳이 거기 말고 또 어디 있다고.”
갑자기 시인이 된 것처럼 구는 그를 보며 웃다가, 난 작게 손짓했다.
“그러시다면 저랑 같이 가도록 해요.”
“?”
“저도 학교에 가야 해서요.”
그러고 보니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 이야기를 빼놓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 보는 리처드를 보며 난 상황을 가장 단순하게 설명하기로 했다.
“그게…… 방학이지만 따로 레슨을 받고 있거든요.”
“따로? 콩쿠르 같은 거 준비해?”
“아니에요. 그냥…… 개인적인 곡이에요.”
정말 심할 정도로 개인적인 곡이었다. 지금 난 사실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리처드는 그럴 수도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 선생님도 대단하신 분이지. 그래서 미술관에도 갔다 오라고 숙제를 내 주신 건가?”
“아뇨, 레슨은 구세프 선생님에게 받고 있어요.”
“…….”
갑자기 리처드의 눈빛이 변했다.
난 재작년을 떠올렸다. 그때도 리처드의 눈빛은 이랬었다. 그리고 내게 대결을 걸어서 지면 구세프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었지.
그땐 물어보지 않았지만 궁금하기도 했다. 왤까. 리처드가 개인적으로 구세프 선생님을 싫어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한테까지 레슨을 받지 말라고 할 사람은 아닌데. 난 리처드가 그렇게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살짝 긴장하면서 바라보자 그가 이어 말했다.
“계속 받는 거야?”
“음…… 아뇨, 방학이 끝날 때까지요. 일주일하고도 조금 더 남았네요.”
“그 후엔?”
“……그만하려고요.”
머릿속으로만 다짐하는 것과 달리 내 입으로 직접 말하니, 보다 확실한 제약으로 다가왔다.
무언가가 슥 목을 감싸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익숙하게 무시했다.
리처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으로 날 쳐다보다가 농담조로 말했다.
“무슨 방학에도 레슨을 그렇게 받아? 안 그래도 겨울엔 추우니까 요양을 잘 해야지. 너 보니까 지금도 컨디션이 마냥 좋아 보이진 않는데.”
“아하하…… 들켰나요?”
“그래. 시험 때문에 안 좋나 싶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 보니 다 레슨 때문이었네.”
구세프 선생님의 레슨은 아무 문제 없었다. 난 강하게 부정했다.
“레슨 때문이진 않아요. 그것도 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깐요.”
“어쨌든 간에.”
리처드는 짧게 말하곤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테이블을 짚으며 말했다.
“아무튼…… 어차피 학교에 갈 거라면 부탁 좀 할게. 태워다 줄 수 있어?”
“물론이죠. 기숙사에 들르면 될까요?”
“아니, 그냥 학교로 가자. 나도 볼일이 있어서.”
기숙사가 학교 건물과 따로 떨어져 있어서 물어본 건데, 어차피 걸어서도 금방인 거리이긴 하니까 학교에 내려 줘도 괜찮을 것 같다.
***
학교에 도착해서, 빅토르와 자하르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빅토르는 레슨이 끝나면 연락을 달라고 한 뒤 차를 끌고 사라졌다.
나와 리처드만이 남았다. 그는 시계를 살짝 보더니 내게 물었다.
“레슨은 몇 시부터야?”
“2시부터요.”
“시간이 남았네.”
1시간 정도니까 꽤 남은 편이긴 했다. 하지만 난 그사이에 레슨을 준비해야 했다. 피아노는 치지 않고 체력을 아끼면서 악상 연구나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리처드가 날 불렀다.
“타티아나.”
“?”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함을 표시하자 리처드가 약간 고민했다. 하지만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열려고 한다.
그때였다.
“어? 타티아나? 리처드?”
놀라워하는 목소리에 나도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코트에 모자를 쓴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기울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닷새 정도 못 봤는데 왜 이렇게 반가운지 모르겠다. 오늘은 친구들을 이렇게 운 좋게 만나는 날인 걸까?
난 곧장 그녀에게 다가가서 반가워하며 물었다.
“방학인데 어쩐 일이에요? 아나스타샤.”
“아, 콩쿠르 레슨 받는 날이라서.”
지도 선생님에게 콩쿠르에 올릴 곡을 가다듬는 일은 방학이라고 해서 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도 참 고생이 많았다.
그녀 역시 내 사정을 알기 때문에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하는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너희야말로 웬일이야? 음, 타티아나는 레슨 받으러 왔을 테고…… 리처드는?”
레슨이 없다고 해서 학교에 오지 말란 법은 없었지만 궁금해할 만도 하다. 그리고 리처드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우연히 미술관에서 만났거든. 그래서 같이 오는 길이야.”
“뭐? 미술관?”
아나스타샤가 되물으며 바로 날 돌아보았다. 이야기해 달라는 것 같다.
리처드의 말대로 우연히 만난 것이지만, 난 아나스타샤에게 왜 권유도 한 번 않고 혼자서 미술관에 갔었는지 이야기할 필요를 느꼈다.
“미하일 선생님께 숙제 비슷하게 받은 티켓이 있어서요. 아나스타샤는 콩쿠르 준비로 바쁘시니까 혼자 갔다 오려고 했었는데, 리처드를 만났네요.”
그냥 간단하게 설명하니 아나스타샤도 그럴 만하다는 걸 납득해 준 것 같았다. 그녀의 분위기를 보니 권유를 했더라도 거절했을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랬구나. 음, 숙제가 좀 희한하네. 단체도 아니고 타티아나 너 개인에게 내는 숙제인데 미술관에 다녀오라고 하셨다고?”
“예. 제가 배울 것이 많을 거라고 하셨어요. 실제로도 그랬고요.”
“아…… 미하일 선생님이라고 했었지…….”
그럼 그렇지, 같은 말을 하면서 그녀는 완전히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나와 리처드를 보면서 힘없이 미소를 흘렸다.
“어쨌든, 그럼 다들 레슨인가? 방학인데 서글프네.”
“아하하…….”
“있잖아, 우리 레슨 끝나면 다 같이 뭐 먹으러 갈래? 방학에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끼리 그 정돈 괜찮잖아.”
“그럴까요?”
난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저녁엔 이렇게 3명이서 무언가 맛있는 식사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리처드는 엉뚱한 방향으로 답했다.
“난 레슨 받으러 온 거 아닌데.”
엉뚱하진 않았다. 다들 레슨이냐는 질문에 대한 늦은 답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럼 뭐냐는 듯 눈썹을 치켜세우며 삐딱하게 섰다. 리처드는 그 모습을 보더니 한숨을 쉬며 마주 팔짱을 끼었다.
“……마침 잘되었네. 아나스타샤가 참관인을 해 주면 될 테니까.”
“어?”
아나스타샤가 멍한 소리를 냈고, 리처드가 날 직시했다.
“타티아나. 아까 하려던 말인데, 레슨 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지? 나랑 간만에 피아노 대결해 보는 건 어때?”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지금요?”
“지금.”
얼빠진 목소리로 물어보니 리처드가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지금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거든.”
“…….”
리처드가 종종 하던 말이 기억났다. 왜 성적을 평균점으로 맞추는지 궁금하다고 물어보니까 정 궁금하면 대결로 이겨서 대답을 강요해 보라 했었지?
지금 정확히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리처드는 내게 궁금한 게 있었고, 평범하게 물어봐선 말해 주지 않으리라 보았기 때문에 지금 피아노 대결로 대답하게 만들 생각인 것이다.
거기까지 상황은 금방 파악했다. 그리고 리처드가 지금 날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히 느꼈다.
“…….”
머리가 복잡했다. 그의 관찰력과 영리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가도 조금은 약이 오르고 분하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는 보통 승부사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