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4화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그런데 지금 리처드는 그때보다 조금 더 공격적으로 보였다.
갑자기 왜 이러는진 잘 모르겠지만 난 절대로 리처드가 내게 적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오늘 좋았었는데, 갑자기 이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게 뭔지 알고 싶었다.
“…….”
사실 길게 고민할 것 없이 그냥 그의 대결을 받아들이면 될 일이긴 했다. 나야말로 평소에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니 우리 입장은 동등했다.
문제는 지금 내 상태가 레슨을 소화해 내기에도 벅찰 정도로 망가져 있단 사실이었다.
재작년과는 상황이 다르다. 그땐 리처드가 어느 정도 실력자인지도 몰랐고, 나 자신이 왜 아픈지도 잘 몰랐고, 약간 자포자기의 심정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난 꽤 뚜렷하게 상황을 인식하고 있었다.
지금 괜히 그와 대결 같은 걸 해서 좋을 일이 없었다. 난 피아노를 사이에 두고 한 내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변명 없이 지키고 싶었으니까. 괜히 졌다가 리처드가 구세프 선생님의 레슨을 그만두라고 다시 말하기라도 하면 정말 복잡해진다.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난 지금 장난 같은 걸 할 기분이 아니라는 티를 팍팍 내면서 서늘하게 말했다.
“지금은 곤란해요. 레슨도 있고요.”
“얼마 안 걸릴 거야.”
리처드는 내가 약간 기분이 상했다는 걸 알아도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 다시 딱 잘라 거절했다.
“다음에 해요, 리처드.”
“언제?”
그는 생각보다 끈질기다.
난 정확하게 말했다.
“방학이 끝나고 나서요.”
대충 이 상황을 넘기고자 한 말은 아니었다.
방학이 끝나고 나면 난 지금 하는 내 개인적인 미련을 모두 접고 다시 컨디션 회복에 전력을 다할 테고, 장담컨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완전하게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 번 해 봤기 때문에 심신의 괴리에서 회복되는 게 어떤 느낌인지 난 잘 안다.
내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든 방학이 끝나면 같이 끝난다. 그다음엔 얼마든지 리처드의 대결을 받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리처드는 그렇게 타협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건 너무 늦어.”
“어째서요? 일주일 정도만 기다려 주시면 되는걸요.”
리처드는 내 말을 못 믿겠다는 듯 말없이 바라본다. 난 조금 더 차갑게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 지금 조금 아파요. 제대로 된 컨디션이 안 나오니 지금은 그리 만족할 만한 대결이 되지 못할 거예요.”
“역시 그랬구나.”
“알고 계셨다면, 제가 아플 때만 건드리시는 건가요?”
내뱉고 나서 당황했다. 생각 이상으로 말이 뾰족하게 나왔다.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실수에 당황해하자 리처드가 피식 웃더니 농담조로 말했다.
“말이 조금 심한데.”
“……미안해요. 하지만 한번 생각해 주세요. 제가 이런 말까지 해야 했을까요?”
“아니, 뭐…….”
리처드는 약간 달라진 분위기로 말했다.
“아프다고 해서 발 빼고 그러진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
진지하게 이야기하던 건 그만두고 이제 날 살살 꾀여내려고 작정한 건가? 난 어림도 없다는 듯 대꾸했다.
“도발하지 마세요. 소용없어요.”
“그런 건 아니야. 그런데 타티아나, 너 저번엔 그렇게 슬럼프면서도 대결을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잖아? 되레 아프니까 이번에야말로 기회니 덤벼 보라고 도발하는 건 네 쪽이었지. 그런데 이번엔 약간 달라진 거 같아서.”
분명 그랬었지. 하지만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입을 다물고 있어서 될 일도 아니라, 난 리처드를 역공하기로 했다.
“리처드야말로 많이 달라지셨네요. 저번엔 제가 제 컨디션을 못 내니까 아쉽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었지.”
“그러시다면 제가 컨디션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약속드릴게요.”
“…….”
“그리고 오늘 재미있었잖아요? 여기까지 하도록 해요.”
하나부터 끝까지 다 진심이었다.
이번엔 리처드가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잠시 침묵했다. 다짜고짜 날 붙잡고 연습실로 가자고 하는 건 그에게도 부담스러운 게 분명해 보였다.
이대로 좋게 마무리되나 싶었다.
그런데 리처드는 잠시 생각하더니 부담감을 무시하고 한술 더 떴다.
“타티아나.”
“예.”
“아플 때만 건드리는 거냐고 했었지? 그래, 네 말이 맞아.”
“……예?”
어이가 없어 반문하자 그가 시니컬하고 빠른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평소엔 너랑 피아노로 붙어 봐야 질 게 뻔한데, 질 내기를 왜 하겠어? 그런데 지금이 기회다 싶네.”
“리처드…… 왜 본심이 아닌 말을 하시나요?”
“뭐가? 이게 내 본심인데.”
정말 자존심이고 뭐고 없이 들리는 말이었다. 리처드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 나로선 정말 당황스러웠다.
다른 방법으로 도발하는 건가? 하지만 지금 리처드가 저런 식으로 말한다면 난 그냥 리처드에게 기회를 주지 않겠다고 말하고 피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내가 왜 따라 줘야 해?
“…….”
하지만 살짝 유치하게 나오는 그를 보면서 난 똑같이 유치하게 나가지 못했다.
대체 뭐가 리처드를 이렇게까지 말하게 만드는 걸까. 지금 그걸 무시해 버리면 앞으로도 리처드라는 사람을 아는 길은 요원해질 것 같았다.
난 한참 동안이나 그와 눈싸움을 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내기에서 이기면 뭘 받고 싶으신 건가요.”
“그냥 묻고 싶은 게 있다니까.”
“지금 하세요. 대답해 드릴게요.”
궁금한 게 있다면 굳이 대결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말해 줄 수 있다. 난 리처드를 상당히 신뢰하는 편이니까.
“정말 뭐든지 다 말해 준다고 약속하는 건가?”
“…….”
하지만 아무리 신뢰하고 있어도 말하기 어려운 부분들은 분명히 있었다.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멋대로 떠들었다간 내 삶이 아니라 타티아나의 삶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들.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것들에 대한 포기와 타협 그리고 책임과 맹세에 관한 것들.
너무 어렵다. 난 어떤 확답도 줄 수 없었다.
“가급적…….”
입을 열자마자 리처드의 표정이 그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뀌어 갔다. 약간 오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낄 즈음이었다.
이때껏 잠자코 있던 아나스타샤가 입을 열었다.
“야.”
한 마디뿐이었지만 나도, 리처드도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아나스타샤는 리처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1월의 추위가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야말로 언제 너랑 한 번쯤 붙어보고 싶었는데, 잘됐다. 나랑 해.”
“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리처드가 반응했다.
“내가 왜 너랑…….”
“리처드. 네가 비겁하게 타티아나가 아플 때를 노렸다는 말은 여기 있는 누구도 안 믿어. 설마 그딴 소리가 말이 된다 생각하고 한 건 아니지?”
“…….”
혹시나 리처드에게 싸움이라도 거는 게 아닌가 싶어 긴장하고 있었는데, 아나스타샤는 흥분하지 않고 냉랭하게 말할 뿐이었다. 리처드는 한 마디도 반론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있는 리처드를 보며 아나스타샤가 이어 말했다.
“그래도 말을 그런 식으로 하는 건 좀 어이가 없네. 가만 보고 있자니 별말을 다 하더라?”
“…….”
“너 가끔 다른 사람들을 바보 취급 하는 것처럼 이상한 소리 하는 거 볼 때마다 짜증났었는데 오늘에야말로 좀 묻고 싶어. 그런데 네 말대로 그냥 물어봐도 재미없을 테니까 피아노로 정하자. 어때?”
그녀의 목소리는 리처드를 꽁꽁 얼려 버릴 정도로 차가웠지만 동시에 매섭기도 했다.
괜히 투닥거리는 일은 많이 있었어도 이 정도로 짜증스럽게 말하는 일은 없었는데, 아나스타샤는 오늘 끝장을 볼 생각처럼 보였다.
하지만 리처드는 정말 친구에게 보여선 안 될 것 같은 딱딱한 얼굴을 하고는 무감정하게 말했다.
“난 네 피아노엔 관심 없어. 아나스타샤.”
옆에 있는 내가 화가 다 날 정도로, 같은 피아노 연주자에게 하기엔 너무 상처 되는 말이었다. 이번엔 내가 못 참고 끼어들어서 한마디 해 버리고 싶어진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괜찮아. 관심이 생기게 만들어 줄게.”
리처드는 삐딱한 상태 그대로 계속 말했다.
“너한테 물어볼 것도 없고.”
“그럼 다른 것도 좋아. 뭐가 필요해? 말만 해.”
“필요한 거 없는데.”
“왜 없겠어. 너도 평소 나한테 마음에 안 들었던 거 있었을 거 아니야? 말을 해 봐.”
그렇게 말하던 괜히 감정만 더 상할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는 어디 누가 이기나 해 보자는 식이었다.
그리고 리처드가 아예 쐐기를 박았다.
“네가 해 줄 건 없어. 그냥 네가 지면 다음은 타티아나야. 그렇게만 알아 둬.”
“…….”
차가운 시비조로, 하지만 약간은 능청스럽게 말하던 아나스타샤가 입을 다물었다. 진짜로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여기서 이제 끼어들어야 하나?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이윽고 아나스타샤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너 진짜 사람 잘 긁네.”
“별로.”
“어쨌든, 그럼 받아들인 거야?”
“네가 그렇게 원하는 것 같으니까…….”
이렇게 서로 감정싸움이 심해진 상황에서 피아노 대결까지 성사될 것 같았다.
이런 피아노 대결은 자주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난 리처드가 본 실력을 내면 상상 이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난 그제야 급히 아나스타샤의 팔을 붙잡았다.
“기다려 주세요, 아나스타샤. 잠시만요…….”
안 그래도 몸에 힘이 안 들어가서 팔을 잡아 끌 힘도 없다.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내 손에 따라와 주었다.
리처드와 몇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난 아나스타샤를 다시 불렀다.
“아나스타샤.”
“난 안 빠져.”
그녀가 분명하게 말했다.
솔직히 리처드가 조금 못나게 말하기도 했고, 아나스타샤가 짜증을 못 참은 것도 이해가 간다. 반대로 아까 리처드가 아나스타샤의 피아노에 관심이 없다고 했을 땐 내가 화가 나서 끼어들어 한 소리 하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냥 지켜보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도 넘어선 것 같고요. 그렇다면 연주자의 방식대로 해결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지금 쟤랑 대결하겠다고?”
“……어쩔 수 없지요.”
리처드는 분명하게 날 지목했다. 지금 상태로 그를 이길 자신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그에게 악의가 없다면 아무래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있었다.
“…….”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눈을 가늘게 뜨며 힐난하듯 날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막 나서 준 건 리처드에게 짜증이 난 탓도 있지만 내 대신이 되어 주겠다는 의도도 있는 것이다.
“아니야, 단순하게 봐도 그래. 우리 학교 수석인 너한테 리처드가 중간 단계도 거치지 않고 바로 도전장을 던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일단 나부터 이겨 보라고 하고 싶은데, 이건 당연한 거지?”
난 그녀의 논리에 멍하니 있다가, 말해 주어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려 냈다.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마지막으로 고민해 보고, 작게 이야기했다.
“리처드는 본 실력을 숨기고 있어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금 성적은 그가 일부러 만들어 내고 있는 거예요.”
리처드가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는 이야기를 이렇게 대신해도 괜찮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 리처드는 연습실로 가서 자기 실력을 그대로 보일 생각인 것 같으니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아나스타샤는 내 말을 잘 믿어 주니까, 이렇게까지 말하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줄 것 같기도 했고.
하지만 그녀는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는 투로 말했다.
“나도 알아.”
“예?”
“피아노로 붙어 본 적은 없지만, 쟤랑 본 게 벌써 몇 년인데 그런 것도 모르겠어?”
멍하니 올려다보니 아나스타샤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옛날부터 그랬어, 리처드는. 다른 누구는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시험이며 피아노며 다 자기는 대충 해도 상관없다는 듯 적당히 하기나 하고…….”
“…….”
“솔직히 나도 대충 해 왔으니까 할 말이 없긴 한데 적어도 난 만사 따분하다는 것처럼 주변을 보거나 애들 바보 취급하진 않았거든? 난 잘하고 싶었어, 언제나.”
내 생각보다 훨씬 쌓인 게 많았나 보다.
어쩌면 정말 오늘 리처드와 무언가 매듭을 지어야 할 건 아나스타샤였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타티아나, 오늘 꼭 저 애랑 대결 같은 거 하고 싶은 건 아니지? 몸도 안 좋고 말이야.”
“……예.”
“그럼 오늘은 참관해 줄래?”
난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고민했다. 리처드가 보여 주었던 피아노 연주는 정말 뛰어났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근래 들어 실력이 부쩍 늘어나긴 했지만…… 재작년의 리처드와 비교해 보더라도 어떻게 될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참관인으로서 같이 연습실에 들어선다면 일방적으로 아나스타샤의 편을 들어 주거나 할 순 없었다. 그건 우리 모두의 긍지가 달린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말없이 생각중인 날 보던 아나스타샤가 더 복잡할 것 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보지 마. 나 쟤랑 심각하게 싸울 생각 없으니까. 애초에 그럴 거였으면 피아노가 아니라 이 자리에서 가만 안 뒀지.”
“그……런가요?”
“응. 대결 같은 걸 하자고 한 건…… 나도 적당한 상대를 찾고 있었는데 때마침 리처드가 걸렸을 뿐이야.”
“걸렸다고요?”
“아주 잘 걸렸지.”
가볍게 웃는 그녀에게선 감정적인 악의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리처드에게 향하는 순수한 승부욕만이 느껴진다.
“그냥 공정한 심판으로 들어 주면 돼.”
난 그녀의 말에서 여러 가지를 읽어 낼 수 있었다. 막연하게 느끼는 실력의 향상과 자신감, 수많은 경쟁자들과 경합해야 하는 콩쿠르를 앞두고 지금 자신의 실력이 어디까지 통할지에 대한 궁금증. 그 모든 것이 뭉친 열의.
약간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아나스타샤는 비단 리처드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손에 걸리면 얌전히 놓아줄 생각이 없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