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25화 (425/1,277)

##  425화

리처드가 갑자기 날 도발한 것처럼, 갑자기 리처드와 아나스타샤 사이에 대결이 성사되었다. 난 참관인이자 심판으로서 함께하게 되었다.

사실 끝까지 내가 그를 상대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내가 그와 대결을 했다간 형편없이 질 것이 불 보듯 뻔했고, 그랬다간 아나스타샤의 눈에 리처드가 어떻게 보일지도 뻔했다. 지금 리처드는 누가 봐도 안 좋은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자처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그간 리처드에게 쌓인 게 많아 보였는데 더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고 차라리 지금 나는 빠져 주면서 그녀가 리처드와 한 번 깔끔하게 피아노로 대결할 수 있도록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앞서 가면서 계속해서 투닥거렸다.

“꽤 자신 있어 보이는데, 아나스타샤.”

“어쩌라고. 관심 없다며?”

“……관심 생기게 만들어 준다며. 네가 뭔가 보여 줄 것 같이 그러니까 궁금하잖아?”

“그리고 보니 너 원래 말 되게 많은 애였지?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니?”

친구들이 다투는 모습은 심각하게 봐야 하는 상황인데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리처드도 아나스타샤도 항상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곤 했었는데, 저렇게 붙여 놓으니까 정말 평범한 열여섯 살들이었다.

물론 분위기는 살짝 험악했다.

두 사람은 정말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리처드는 무표정한 가면을 벗어던지곤 짐짓 살벌하게 읊조렸다.

“아나스타샤, 내가 이기면 각오해. 아깐 필요 없다고 했었지만 마음이 바뀌었거든. 지금 벌칙으로 뭘 할지 궁리 중이야.”

“너나 각오해, 리처드. 수치심에 몸부림치다 죽고 싶게 만들어 줄 테니까.”

“뭐?”

리처드가 반문하자 아나스타샤는 그와 어깨가 완전히 닿을 정도까지 다가가며 협박조로 말했다.

“내가 이기면 넌 오늘부터 리처드 피츠앨런 하워드가 아니라 에밀리 피츠앨런 하워드가 될 거야.”

“미친,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서 이해해.”

나도 모르게 웃어 버릴 뻔했다가 간신히 참았다. 대결에 걸린 내기 내용으로 벌칙이 왔다 갔다 하고, 이젠 정말 두 사람의 피아노 실력대결이 되어 버렸다.

이 대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같은 건 아예 잊어버리고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은 정말 평범해 보였다. 조금 어이없긴 하지만, 난 약간 안도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방학이라서 거의 모든 연습실이 비어 있었기에 적당한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차 어떠세요?”

“괜찮아.”

“너 마셔, 타티아나.”

차를 권해도 들은 척도 안 하고 리처드와 아나스타샤는 각자 코트를 옷걸이에 거는 것으로도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난 혼자 차를 마시기도 어색해서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대결 내용을 기다렸다.

두 사람은 유치하게 말싸움을 툭툭 던지긴 했지만, 연습실에 들어와서 피아노를 앞에 두니 이전과는 분위기를 달리했다. 둘 다 대결을 장난처럼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리처드가 진지하게 물었다.

“따로 정해 놓을 건?”

“글쎄.”

아나스타샤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마음 같아선 템포 무제한 자유곡으로 뭔가 결정 날 때까지 하고 싶긴 한데. 나도 타티아나도 이따 레슨 받아야 하거든?”

“시간이 없네.”

“빠르게 하자. 되도록 에튀드 위주로. 싫으면 알아서 하고.”

각자 레퍼토리가 바닥나거나 지칠 때까지 번갈아 연주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같을 땐 빠르게 결론을 짓는 게 나았다.

리처드도 승낙했다.

“좋아. 그렇게 하자.”

리처드는 날 힐긋 바라보았다. 지금 참관인인 내게 허락을 묻는 것 같았다. 이럴 때 보면 종종 느끼지만, 리처드는 정말 착실한 사람이었다.

난 어차피 두 사람이 정한 것들에 대해서 참견할 생각이 별로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누가 먼저 할래.”

순서를 정하는 것도 꽤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답했다.

“동전 던져. 난 앞면.”

“……나 그런 거 약한 거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지?”

“와, 이제 와서 약한 척이야?”

아나스타샤가 킥킥 웃자 리처드가 인상을 쓰더니 말했다.

“알았어. 난 뒷면.”

그리고 그는 동전을 하나 꺼내서 바라보더니, 갑자기 내 쪽으로 내밀었다.

“타티아나, 공정하게 네가 대신 던져 줘.”

누가 던진다고 해도 동전 던지기는 공정할 것 같지만, 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내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가 준 동전을 쥐고, 손가락으로 튕겨 보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영화 같은 데선 한 손으로 잘만 하던데.

이제 와서 물어보자니 심판의 권위가 손상될 것 같고, 난 그냥 검지와 엄지로 동전을 잡고 던지기로 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난 내 저주받은 운동 신경과 둔해진 몸 상태를 간과하고 있었다.

“…….”

한 손은커녕 양손으로 잡으려다가 놓친 동전이 짤그랑 하는 소리를 내며 연습실 바닥을 굴렀다.

당장 연습실을 박차고 도망치고 싶어졌다. 너무 창피해서 죽을 것 같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할 말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난 조용히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주웠다.

“뒷면이네요…….”

“응…….”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놀리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진지했던 대결 분위기는 짤그랑거리는 동전 소리와 함께 산만하게 되었지만, 리처드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바로 말했다.

“네가 먼저 해.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말없이 양팔을 번갈아 당기는 스트레칭을 짧게 하고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어떠한 전조 없이 곧장 연주를 시작했다.

“…….”

쇼팽 에튀드 op.10의 8번.

가느다란 트릴과 함께 시작되는 하방 아르페지오가 순식간에 연습실을 휘감아 오른다.

바장조의 아름다운 선율은 끊이지 않고 흐르면서 귓가를 간지럽혔다.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선명하고 감미로운 음악이지만 이 곡은 쇼팽의 에튀드 중에서도 상당히 악명이 높은 에튀드 중 하나였다.

아르페지오로 3옥타브가 넘는 음계를 알레그로의 속도로 오르내리는 일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 숙련된 연주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르페지오에 섞인 아티큘레이션을 살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손을 움직이면서 동시에 4개 음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악센트를 강조해야 했다.

상당히 숙련된 연주자들도 이 아티큘레이션은 그냥 뭉개 버리는 경우가 흔하게 있었다.

“…….”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연주는 굉장히 깔끔했다.

정확한 템포에 정확한 악상. 선율의 흐름이 눈앞에 보일 것같이 끊임없이 흐른다.

아나스타샤의 왼손이 건반을 짚고, 마치 그 반동으로 뛰어오르듯 튕겨 올랐다가 다시 다른 건반을 짚었다.

이 곡의 주제는 바로 왼손에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정말 또렷하게 그것을 그려 냈다.

목가적인 환상을 나타내는 것 같은 주제 멜로디와 그것의 주위를 휘몰아치며 꾸미는 아르페지오.

똑같은 템포지만 바쁘게 종종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가 느긋하게 늘어지는 것 같기도 한,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이어졌을 때, 이 곡은 완벽하게 표현된다.

아나스타샤의 완성도는 거의 완벽했다. 한 곡의 연주를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지만, 난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

언제 이렇게 실력이 늘어났지?

솔직히 말해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가장 최근에 그녀의 실력을 봤던 것이 바로 작년 11월경이었다. 그 후로 아나스타샤는 콩쿠르 준비를 하면서 개인 연습 시간을 많이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불과 두 달 정도밖에 안 되는 사이에 그녀의 실력은 깜짝 놀랄 정도로 좋아져 있었다.

작년 5월, 자선 연주회에서 에르네스트와 피아노 듀엣을 했을 때도 굉장히 좋은 실력을 보여 주었는데 그때보다 훨씬 더 나아졌다.

단지 테크닉만 좋아진 게 아니다. 전체적인 표현력과 음악성, 모든 것이 훌륭해졌다. 난 그녀의 성장이 정말 기뻤다.

넋이 나가서 연주를 듣고 있자니 2분은 금방 지나갔다. 아나스타샤는 멋지게 곡을 마무리 짓고 손을 내렸다.

“자.”

아나스타샤가 어떻냐는 듯 우릴 돌아보며 웃었다.

난 마음 같아선 박수를 치고 그녀를 끌어안아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대결 중이었다. 그저 잘했다는 뜻으로 살짝 웃어 주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그런 아나스타샤의 상대인 리처드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 없이 아나스타샤가 막 일어선 피아노 쪽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은 리처드는 목을 양옆으로 까딱이고는, 건반 위로 손을 올렸다.

“…….”

왼손이 연달아 튀어 오르고, 오른손의 엄지, 검지, 중지 손가락 세 개까지 총 네 개의 손끝이 한 건반을 빠르게 연타했다. 건반은 막 눌려졌다가 올라오기도 전에 다시 손끝에 눌려 들어갔다.

양손이 한 건반만을 기계적으로 연타할 뿐인데도 미묘한 악센트가 가단조의 음형을 살려 낸다.

그렇게 길게 뽑아져 나오는 음악을 손으로 쥐고 더더욱 길게 늘이는 것처럼, 건반을 연타하던 양손이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폴란드의 작곡가 모리츠 모슈코프스키의 op.37 스페인 기상곡caprice espagnol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

스페인 기상곡이라고 하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관현악이 주로 유명했지만 피아노 독주곡 스페인 기상곡은 바로 이 곡을 가리킨다.

마치 토카타처럼 들리는 빠른 템포와 통통 튀는 리듬. 빠르고 발랄하게 연주하라는 지시인 비바체에 따라 리처드의 양손이 빠르게 건반을 넘나들었다. 정말 깔끔하고 멋진 실력이다.

하지만 스페인 기상곡의 진정한 백미는 바로 이 뒤에 드러난다.

“……!”

격렬한 화음을 쌓아 올리며 크레셴도로 그 크기를 키워 나가던 음악은 곧장 콘 푸오코, 즉 정열적으로 연주하란 지시를 받아서 한순간에 이곳을 스페인 투우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교차하는 양손이 화음을 두들긴다. 조성도 마치 마술처럼 다장조로 바뀌었다. 열정적인 멜로디는 스페인 특유의 감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다.

격정적이고, 환상적으로.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심취해서 기준을 잃고 흔들리지 않게, 마치 투우사들의 절제미가 녹아 숨 쉬는 것처럼 리처드는 곡을 연주해 나갔다.

“…….”

정열적이면서도 아기자기하다. 듣기에 편하면서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데가 있다.

리처드는 붉은 천을 든 마타도르처럼 천을 흔들어 청중들을 유혹하다가, 글리산도로 건반을 긁으면서 휙 비껴 지나갔다.

화려한 색으로 눈앞에 나부끼는 음악은 아주 직설적이고 명료하다. 이런 음악은 보통 실력을 가지곤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리처드는 학교의 실기 시험이나 위클리 연주회 등에서 늘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연주를 해 오곤 했지만, 사실 이렇게 화려한 곡으로 자신을 얼마든지 드러낼 수도 있는 연주자였다.

난 가만히 리처드의 연주를 듣다가, 옆에 앉아 있는 아나스타샤를 살짝 살폈다.

역시 그녀의 얼굴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리처드는 상상 이상의 실력자였던 모양이다.

“…….”

연주는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갔다. 메노 모소meno mosso. 보다 느긋하고 정중한 흐름으로 음악이 흐른다.

지금까지 듣던 토카타풍의 음악과는 다른, 심지어 약간은 재즈적 감성도 느껴지는 음악이었다. 리처드의 해석과 연주는 참신하면서도 매력적이었다.

리처드는 빠른 속주도 굉장히 훌륭하게 해냈지만, 이런 음악성을 표현하는 부분에 사실 훨씬 더 재능이 많았다.

단지 음 하나를 눌러도 음악처럼 들린다. 깊이 있으면서도 두터운 음색이었다. 저 음색에 대체 얼마나 많은 연구과 연습이 집약되어 있을지 모르겠다.

난 리처드가 이미 자신의 음악이라는 부분에서 어느 정도 일가를 이루었다고 확신했다.

음악만 놓고 보자면 아나스타샤가 연주했던 쇼팽의 에튀드보다, 사실 지금 리처드의 연주가 조금 더 나았다. 그건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흠…….”

아나스타샤는 작게 소리를 내며 리처드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모르겠다.

모슈코프스키의 스페인 기상곡은 다시 첫 번째 주제로 넘어가서 가단조로 격렬하게 날뛰다가, 마지막 피날레로 향했다. 양손이 번갈아서 건반을 연타하며 피아노를 등반하듯 올라갔다가 주르륵 흘러내리며 수백 개의 소리를 하나로 엮고, 말끔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테크닉의 과시까지 완벽했다. 너무 대단한 연주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제 컨디션으로 리처드와 붙었다 한들 이런 연주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정말 신경을 많이 써서 선곡을 하고 연주를 했어야 할 것이다. 그는 정말 견고하고 강한 연주자였다.

손을 슥 내리며 리처드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내가 너무 세게 받았나?”

농담 같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아나스타샤와의 실력적 격차는 분명히 보였고, 이대로라면 리처드가 이겼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장 심각해야 할 아나스타샤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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