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6화
아나스타샤의 쇼팽 에튀드 op.10의 8번 곡. 그리고 리처드의 모슈코프스키 스페인 기상곡. 두 곡의 대결은 리처드의 승리로 보였다.
아마 나 혼자 그렇게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아나스타샤나 리처드도 거기에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아무렇지도 않게 까르르 웃더니, 박수를 짝 쳤다.
“모슈코프스키의 카프리스 에스파뇰이야?”
“맞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낫네. 솔직히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싶기도 하고.”
정말 놀랐다는 듯 이야기하던 아나스타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대단한 걸 감춰 두고 있었네? 리처드.”
“…….”
놀리려는 투는 전혀 아니었다. 몇 년이나 리처드를 봐 오면서도 몰랐던 그의 면모에 감탄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리처드의 실력을 완전히 인정했다.
하지만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아나스타샤의 투지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리처드가 연주자로서 강하면 강할수록 더 잘되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럼…… 난 이다음에 뭘 쳐야 널 잡을 수 있을까?”
“더 할 거야?”
“당연하지. 난 내가 졌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드는데?”
“…….”
시큰둥하게 묻던 리처드의 표정이 굳었다.
아나스타샤의 말은 처음 연주한 쇼팽의 에튀드는 그저 인사일 뿐이고, 리처드의 연주에 맞설 만한 곡을 더 보여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한 곡만으로 결정하기로 한 건 아니었으니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리처드는 자신의 연주에도 웃으면서 다음 곡을 고르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만만찮을 것이란 걸 예감한 것 같았다.
“무슨 곡인진 모르겠지만 기대되네.”
아나스타샤는 짐짓 태연하게 말하는 리처드를 보더니 바보 취급 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난 어쩌면 네가 에르네스트와 비슷한 정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고 여기에 왔어. 그런데 나 나름대로 믿는 구석도 없었을까 봐?”
“…….”
리처드도 말을 상당히 잘하는 편이었지만 아나스타샤에겐 상대가 안 된다. 그녀는 에르네스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으로 리처드를 도발하면서 동시에 그를 바보로 만들었다.
리처드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약간 약이 올랐을지도 모르겠다. 아나스타샤의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상당히 그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약간 엉뚱한 말을 했다.
“날 시금석으로 삼을 생각이었어?”
“응…… 뭐, 조금은?”
아나스타샤는 선곡으로 머리가 복잡한지 대충 대답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리처드의 말에 답했다. 난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짧은 대화가 오간 뒤 리처드의 태도가 변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신경질적인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포근하게 누그러진 눈빛으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참 재미있는 애야.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가 징그럽게 굴지 말라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런 말은 됐고, 이리 나와. 내 차례니까.”
그녀가 윽박지르자 리처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흐음…….”
아나스타샤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심호흡을 하면서 조금 더 신중하게 손을 풀었다.
어려운 쇼팽의 에튀드를 연주하면서도 대충 팔을 스트레칭하는 것 이상은 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조금 더 확실하게 준비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스트레칭을 마칠 때까지 약 10초. 연습실엔 완전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고요 한가운데를 가늘고 날카로운 음악이 꿰뚫고 나왔다.
“…….”
조성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오묘한 음향.
꿈틀거리며 유영하는 선율을 순간적으로 잡아채려고 해도 자꾸 여기저기로 빠져나가서 난 잠깐 동안 이 음악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첫 진행이 지나가면서 언젠가 들었던 음악이 떠올랐고, 동시에 난 이 곡의 이름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샤를 발랑탱 알캉의 12개의 단조 에튀드 op.39의 1번 곡. 부제는 바람처럼comme le vent.
“알캉……?”
옆에서 리처드가 작게 경악했다. 그가 이렇게 목소리를 낸 시점에서, 이 대결의 향방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그 정도로 의외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피아노를 감상하는 도중엔 입을 열지 않도록 훈련받은 우리가 기겁할 정도로.
세상에, 누가 열여섯 살의 피아노 연주자가 알캉의 에튀드를 연주할 수 있다고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19세기의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 샤를 발랑탱 알캉은 수많은 프랑스 연주자들을 모두 꼽아보아도 반드시 한 손 안에 들어가는 피아노 연주자였다. 동시대의 유명인들에 비교하자면 폴란드의 쇼팽이나 헝가리의 리스트와 비슷한 정도의 기교를 보였다고 평가될 정도였다.
비록 말년엔 활동을 하지 않고 은둔하면서 많이 잊히긴 했지만, 역사적인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 남은 그는 수많은 피아노 곡 역시 후대에 남겼다.
그리고 12개의 단조 에튀드는 그가 남긴 유산 중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중 하나였다.
“…….”
단조 에튀드 제1번. 난 이 곡의 템포를 기억하고 있었다.
프레스티시마멘티prestissimamente.
다른 곡들에선 찾아 볼 수 없는 템포 지시다. 없는 게 당연했다. 이 프레스티시마멘티는 일반적으로 가장 빠른 템포를 뜻하는 프레스티시모보다 더 빠른 템포를 지시하기 위해 알캉이 만들어 낸 것이니까.
이 지시는 단 한 곡을 위해 만들어졌고, 그 한 곡이 바로 지금 아나스타샤가 연주하는 이 에튀드였다.
“……!”
장난이나 과장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템포 지시에 따라 아나스타샤가 곡을 연주해 나갔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빠르다. 얼마나 빠른지 아나스타샤가 음악을 연주하는 게 아니라 거의 이 음형 자체를 쥐고 휘두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우리가 연주하는 쇼팽이나 라흐마니노프 에튀드의 속도조차 뛰어넘어 있었다.
난 필사적으로 그녀의 음악을 분석하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감각이 둔해져 있는 나로선 지금 들리는 것들을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웠다.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정도였다.
기절할 정도로 빠른 셋잇단음표의 향연이 바람처럼 지나가고, 아나스타샤는 양손으로 파도처럼 아르페지오를 이루어 이 주제를 크게 펼쳤다.
그다음, 거의 뭉쳐서 톤클러스터 주법처럼 들리기 직전의 음형을 마치 소리의 폭력처럼 쏟아 냈다.
손을 미끄러뜨리는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고 정확하게 터치한다.
그저 빠르게 손을 움직이는 데에 집중해야 할 것 같은데, 엄청나게 강한 힘으로 건반을 찍어 눌러 음을 뽑아낸다.
아나스타샤는 나와 리처드의 넋을 완전히 빼놓았다.
“…….”
게다가 이 곡의 묘미는 단순한 속도에만 있지 않았다.
이 곡은 1920년경 라흐마니노프가 콘서트를 할 때 레퍼토리에 넣고 자주 연주하던 곡이었다.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레퍼토리에서 빼 버릴 정도로 까다로운 피아니스트였다. 그렇게 엄격한 기준을 가진 라흐마니노프가 연주회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이 에튀드는 아름다운 음악성도 갖추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동시대를 살았던 쇼팽이나 리스트의 음악보다 더 파격적이고 현대적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쇼팽의 음악적 에센스와 리스트가 피아노를 다루는 기법 등이 함축되어 담겨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양손을 크게 벌리고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챙길 수 있는 한 모조리 챙겼다.
“…….”
난이도도 음악성도 뛰어나다. 난 경악을 금치 못하는 상태로 아나스타샤의 연주를 조금도 놓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신경을 곤두세웠다.
알캉의 곡들은 기교적으로 너무 난이도가 높아서 피아노 연주자들이 한 번쯤 연주해 보길 갈망하지만 제대로 레퍼토리로 삼거나 하진 않는 편이었다. 지금 전 세계를 따져도 알캉을 레퍼토리에 넣는 연주자는 잭 깁슨이나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같은, 슈퍼 비르투오조 연주자들에 한한다.
나도 알캉의 곡들은 들어 보기만 했지 연주해 본 적이 없었다.
고전부터 현대까지 수많은 작곡가들의 곡들을 꽤 많이 레퍼토리에 넣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알캉의 피아노 곡은 나중에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미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아나스타샤는 알캉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높은 완성도로.
용감하고, 천재적이다.
아나스타샤가 지닌 재능이 분명 언젠가 활짝 개화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지금 보니 살짝 핀 것만으로도 놀랄 정도다.
“…….”
정말 기쁘고, 약간은 감동적이기도 했다.
재작년, 슬럼프를 겪다가 내 연주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면서 테크닉 연습에 몰두하던 그녀를 떠올리자면 지금 그녀의 성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그간 나는 아나스타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까?
곡에 집중하기도 바쁜데, 자꾸만 다른 생각이 끼어들어서 감상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난 이러저런 생각들에 휩쓸리면서 아나스타샤의 연주를 조용히 감상했다.
한 순간도 템포를 늦추거나 절뚝이는 일 없이 아나스타샤는 처음 그랬던 그대로 마무리도 거침없이 몰아붙이고는, 슬며시 사라지듯 끝냈다.
그녀가 연주를 마치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리처드가 대신 입을 뗐다.
“알캉……. 나 참, 어이가 없네, 진짜.”
“내게 너무 빠르게 쳤니?”
아나스타샤가 킥 웃으며 말했다. 아까 리처드가 너무 세게 받았냐고 도발한 것에 대한 대꾸였다.
리처드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힘없이 말했다.
“너 무슨 연습을 한 거야? 아나스타샤.”
무슨 소리냐는 듯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처드가 자신이 들은 감상을 그대로 전했다.
“일반적인 레퍼토리는 절대 아니야. 넌 왜 이 곡을 가지고 있는 건데?”
“가지고 있으면 안 돼?”
“……이 알캉은 피아노 연주자끼리의 대결에서 상대를 찍어 누르기 위해 만든 무기처럼 들리는데.”
“오, 정확히 짚었어.”
아나스타샤는 대단하다는 듯 싱긋 웃더니 대답했다.
“오늘 같은 날이 오면 쓰려고 만들어 놨지. 누군가에게 실험해 보고 싶었는데, 리처드 네가 처음이야. 영광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진짜 청중이 아니라 다른 연주자를 상대할 생각만으로 연습해 놨다고?”
“응.”
이 곡의 접근성이나 난해함 등을 생각한다면 무기로 써도 충분했다.
하지만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연주자와의 대결이라는 굉장히 국소적인 목적을 위해 이 곡을 연습했다는 말은 약간 무섭게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 순간 내가 떠올린 것은 알캉이 은둔해 버린 이유였다.
알캉은 스승이었던 파리 음악원의 피에르 치메르만이 은퇴한 뒤, 교수 자리를 이어받기 위해 동기인 앙투안 마르몬텔과 경합을 벌였다. 하지만 패배했고, 이후 모든 활동을 그만두게 된다.
프랑스를 들썩이게 만든 천재 피아노 연주자의 은둔은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단 한 번의 연주로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있고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연주자의 삶을 살면서, 아나스타샤는 이런 강력한 무기도 하나쯤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그녀는 단조롭게 말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니까.”
“……정말 난 시금석이었군.”
리처드는 또 알 수 없는 대답을 하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기도 하고, 다시 한숨을 쉬기도 했다. 심경이 많이 복잡해 보인다.
“라흐마니노프의 에튀드 같은 걸 꺼냈다면 나도 어떻게 맞상대할 방법이 있겠는데, 알캉은 정말 상상도 못 했네. 적어도 속주에선 이 곡을 상대할 만한 곡이 없어. 프레스티시마멘티라니, 어떻게 하라고?”
“그럼 음악성으로 덤벼 보면 어때. 난 감미로운 것도 좋아하거든.”
“……글쎄.”
리처드가 난색을 표했다.
이 대결의 참관인이자 심판인 나도 약간 당황스러웠다.
음악성만으로 따지자면 리처드의 스페인 기상곡이 조금 서정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어서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기교 면에서는 아나스타샤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공정하게 하자면 지금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연주하는 중이니까 리처드가 다시 한 곡을 연주하면 그걸 듣고 판단하는 게 옳겠지.
하지만 리처드는 어떤 곡을 꺼내야 할지도 잘 떠올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아나스타샤가 던져 넣은 알캉의 충격은 컸다.
한참이나 갈등하던 리처드는 난 힐끔 바라보고는, 결국 스스로 선택했다.
“항복할게. 졌어.”
“야, 뭐야. 재미없게.”
“이쯤 하는 게 맞지 않나 싶네. 너희들한테도 미안하고.”
그는 조금 강압적이기도 하던 태도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평소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진심이냐는 듯 리처드를 모로 바라보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네가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었구나?”
“…….”
리처드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이럴 때 정말 무자비했다.
“그런데 말야…… 리처드, 아까 내가 했던 말은 기억하는거지?”
“솔직히 그건 좀 아니지 않냐?”
“왜? 잘못도 했고 대결도 졌으면 벌칙을 받아야 하잖아?”
“……그냥 날 죽여 주면 안 될까.”
리처드가 시시각각 후회하는 모습이 선하게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승복 못 한다고 박박 우길 걸 그랬다고 생각하는 중임이 분명했다. 그래도 그걸 입 밖으로 내진 않는 점이 좋았지만.
아나스타샤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정당한 권리 행사 시간이 있겠습니다.”
“아, 제발.”
리처드가 창밖으로 뛰어내리기 직전, 아나스타샤가 권리를 행사했다.
“너 지금까지 그 정도 피아노를 칠 수 있으면서 꽁꽁 숨겨 두고 있었던 이유가 뭐야. 나랑 타티아나가 이해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설명해.”
“……!”
리처드는 물론 나도 깜짝 놀랐다. 놀려 먹을 심산으로 가득해 보이던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진지하게 이렇게 물어볼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피아노 의자를 툭툭 치더니 말했다.
“내가 너 괴롭히자고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을 줄 알았니?”
리처드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훨씬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