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7화
리처드는 말없이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벌칙을 예상했을 뿐, 갑자기 이렇게 물어보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참이나 무언가 고민하다가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별걸 다 말해 달라 하네. 그런 게 왜 궁금한데?”
“궁금하면 안 돼?”
아나스타샤가 딱 잘라 말했다. 마치 우리에겐 궁금해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투였다.
그간 리처드의 학교생활에 의문이 많았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나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리처드를 지켜본 만큼 쌓여 있는 의문도 더 많았나 보다.
그래도 깊게 캐묻는 건 실례일지도 모른다. 리처드에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테니. 하지만 지금 아나스타샤는 승자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무리한 질문을 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리처드도 질문 자체에 불쾌하기보단,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빠져나가려는 쪽을 택하려 했다.
“뭘 그렇게 실력이라고까지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너 자꾸 버릇처럼 우릴 바보 취급하는 거 알아?”
“…….”
아나스타샤는 리처드가 빠져나가게 두지 않았다.
섭섭함과 짜증이 한데 섞인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리처드가 입을 다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이어 말했다.
“왜 자꾸 그러는 거지? 이유를 모르겠네 정말?”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야.”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 것 같으니까 더 화가 나서 그래. 뭔가 감추고 있다가 보여 주는 데에서 카타르시스 같은 걸 느끼는 취미가 있는 거라면 차라리 이해라도 하겠어. 하지만 넌 그것도 아니잖아? 내가 그간 봐 온 게 틀린 거야?”
짜증스러운 목소리이지만 리처드에게 향하는 믿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그저 리처드를 비난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었다.
리처드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 툭 던졌다.
“그런 카타르시스 솔직히 좀 느끼는데.”
“……내가 그간 널 잘못 본 것 같네. 우리 앞으로 거리를 좀 두는 게 좋겠어. 타티아나도 이리 와.”
소름 돋는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내 쪽으로 손짓했다. 리처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불공평하네. 아나스타샤 너도 오늘 알캉을 숨기고 있었잖아. 날 방심시켰다가 한 방 먹이면서 기분 좋아했던 것 같은데?”
“난 그게 작전이었거든?”
“거짓말하지 마.”
이번엔 아나스타샤가 조용해졌다.
그녀가 알캉을 비밀 무기처럼 숨기고 있었던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것으로 리처드에게 항복을 받아 내고 기뻐했던 것도 사실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리처드는 이렇게 따지고 들 생각은 없다는 듯 이야기를 돌렸다.
“아무튼 그간 어떻게 봐 왔는진 모르겠는데…… 내가 잘못한 것 같긴 하네. 미안했어.”
“잘못한 것 같긴 한 게 아니라 많이 잘못했지.”
“그래. 많이 잘못했어.”
대충 말하는 것 같지만, 상당히 솔직한 사과였다. 아나스타샤의 섭섭했던 진심을 리처드 역시 느낀 것 같다.
리처드가 진실하게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아나스타샤가 한 번 더 물어보았다.
“그럼 말해 봐. 왜 그래야만 했는지.”
“…….”
내가 느끼기로는 이게 그녀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승자로서 질문 정도는 무엇이든 해도 괜찮은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리처드가 싫어한다면 무리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묻고 그만둘 생각이다.
때문에, 이건 리처드가 솔직하게 답할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
리처드는 다시 진지하게 갈등하며 아나스타샤와 나를 슥 돌아보고는, 나지막히 운을 떼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그냥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대충 넘겨들었으면 좋겠어.”
우리 두 사람은 귀를 쫑긋 세웠다. 처음으로 리처드의 입에서 그의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첫 마디는 정말 황당했다.
“아나스타샤, 넌 전생 같은 거 믿어?”
“?”
기대와 긴장을 반반쯤 나눠 쥐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맥이 탁 풀렸는지 턱을 치켜들며 눈을 흘겼다.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래?”
“안 믿는구나. 타티아나는?”
리처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곧장 내게 물었다.
난 전생 같은 초자연적인 이야기들을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조금은 믿어요.”
“그래.”
그는 알겠다는 듯 팔짱을 끼더니 천천히 이야기했다.
“영국에 계신 어머니는 전생을 믿는 분이었어. 그리고 내가 전생에 음악가였다고 생각하고 계셨지. 이유는 뭐 평범한 이유야. 내가 어려서부터 피아노도 빨리 익히고 그랬었나 봐. 지금은 기억도 잘 안 나지만.”
그의 이야기는 평범하다면 평범했다.
어려서부터 재능을 타고났고, 때문에 여러 기대를 받았다는 이야기. 우리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이와 비슷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대부분 가지고 있었다.
리처드는 발을 까딱였다.
“기대가 많으셨지. 공부도 많이 시켜 주셨고, 좋은 선생님들을 모셔서 레슨도 받게 해 주시고…… 연주회도 했었지. 그게 일곱 살이었던가.”
리처드는 영국에서 정말 엘리트 음악가의 코스를 밟은 듯하다. 실제로 지금 실력을 보면 그만한 재능도 있었을 테고.
하지만 그는 그것들에 그리 감사해하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그것까진 괜찮았는데, 베노 모이세비치의 환생이라느니 그런 말을 들으면 어이가 없지 않겠어?”
베노 모이세비치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귀화한 20세기 피아노 연주자로, 당대 낭만주의 음악가들 사이에서 음색의 시인이라 불릴 정도로 이름 높은 연주자였다.
그런 연주자의 환생이라는 말을 들으면 정말 부담스러울 만도 하다. 그가 툭 내뱉었다.
“그런 말을 듣는 건 조금 싫더라고.”
“…….”
“아나스타샤 너도 어려서 그런 말 많이 들었으니 이해가 가려는지 모르겠네. 얼마 전엔 슬럼프도 꽤 심하게 왔었고.”
리처드는 우리라면 이해해 줄 수 있지 않냐는 듯 물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순 있었다. 나도 앙팡 테리블이라는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원 시절 별명을 들었을 땐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었으니까. 과거의 음악가와 비할 정도의 기대를 받고도 웃고 즐길 수 있는 자신감을 지닌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내 이야기는 됐고. 리처드 너 그래서 뭐야.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대충하고 있다? 기대라는 게 없어질 때까지?”
“그렇게 들으니까 창피한데, 비슷해.”
“당연히 창피해해야지. 너 바보야?”
아나스타샤는 피아노 앞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빈 의자를 하나 가지고 와서 리처드 앞에 던지듯 놓고는 앉았다.
그녀가 리처드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어중간한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란다고? 그게 뭐야 대체. 그럴 거면 이 먼 우리 학교엔 왜 왔어? 왜 다녀?”
리처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다시 일갈했다.
“심지어 집에서 유학 반대하고 있지 않니? 그냥 영국 왕립 음악학교 다니지?”
“…….”
“거기서 지금 하듯 대충하지 그랬어?”
사실 리처드가 이곳에 있는 것도 의문스럽긴 했다. 영국에도 훌륭한 클래식 음악학교가 굉장히 많은데 굳이 반대를 무릅쓰고 지원도 받지 않으면서 유학 생활을 할 이유가 있을까 싶다.
그리고 그 의문엔 아나스타샤가 리처드 대신 해답을 꺼내 놓았다.
“너도 결국 세계 최고의 학교에 다니고 싶은 거잖아?”
그녀는 정말 당당하게 중앙음악학교를 세계 최고라 선언했다. 영국에선 성에 안 찰 게 분명하다는 듯.
리처드는 반박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말이 없는 리처드를 보며 약간 풀어진 투로 말했다.
“리처드, 저번 학기 때 한승우 못 봤니?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필사적인지 말이야.”
“봤어.”
“그런데도 아무 생각도 안 들어?”
“그 애는 그 애고, 나는 나지.”
또 버릇처럼 나오는 시큰둥한 말투. 앞에 있는 사람을 약간 바보 취급하는 듯한 어조로 리처드가 말했다.
하지만 이번엔 아나스타샤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리처드를 가리키면서 보다 확고하게 말했다.
“잘 알고 있네. 네 말대로 너는 너지. 그럼 왜 이상한 것에 얽매이는 건데? 어차피 네 인생은 네가 사는 거 아니야?”
“…….”
아나스타샤는 모든 이야기의 흐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모두 한데 엮어서 리처드를 찌른다.
“기대가 부담스러웠다는 것 자체는 이해가 가. 실제로 그런 걸로 굉장히 힘들어하는 애들도 많으니까. 그래도 난 너처럼 적극적으로 자기 인생을 깎아내리려 드는 애는 처음 봤어. 정말로.”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처럼 짜증에 차 있지 않고 마치 긴 한숨처럼 들렸다. 리처드에게 조금 실망한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난 두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리처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 진실을 덜 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게 리처드는 지금 어느 정도 안심하는 것처럼만 보였다. 이유 모를 반응이다.
조금 더 유심히 리처드를 지켜보았다. 그는 무표정하게 아나스타샤의 말을 듣다가, 별안간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보이는구나.”
“당연한 거 아니야?”
아나스타샤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고 리처드는 웃기만 했다.
그는 진지할 땐 진지할 수 있는 사람인데.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웃고 있는 걸까.
가만히 보고만 있자니, 갑자기 리처드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타티아나 너도 같은 생각인 건가? 나한테 콩쿠르 안 나가냐고 말하기도 했었잖아.”
그것뿐만이 아니라, 난 리처드가 왜 학교 성적을 일부러 낮추는지에 대해 은근히 몇 번이나 묻기도 했었다.
그의 실력이 정말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아낌없이 도와주고 싶었다. 그는 늘 피하곤 했었지만.
“…….”
그리고 대략적인 사정을 들은 지금, 여러 생각이 뒤섞인다. 리처드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전혀 몰랐고 지금 정말 놀랐다고 말할 수 있나?
“잘 모르겠어요.”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했고.
아나스타샤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다리를 꼬며 고개를 들었다.
“아무튼, 너 앞으로도 이렇게 지내려고? 우리 다음 학기만 지내면 10학년인데?”
“글쎄, 생각 좀 해 보고.”
“무슨 생각을 해? 너 콩쿠르도 어릴 때 한 번 나갔던 거 말고는 없잖아?”
“콩쿠르가 다는 아니잖아.”
“계속 바보 같은 소리 할래?”
아나스타샤가 심각하게 앞으로 우리에게 몇 년이 남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갑자기 진지하게 커리어 관리와 진로를 상담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리처드는 약간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다. 적어도 그녀가 괜한 마음으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건 아는 것이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리처드가 졌다는 듯 말했다.
“알았어. 나중에 성인 콩쿠르에 나가면 될 거 아냐.”
“알긴 뭘 알아. 나중에 갑자기 뭘 하겠다고. 차근차근 쌓아 나가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어떻게 우리 어머니랑 하는 말이 그렇게 똑같냐?”
“뭐?”
아나스타샤가 눈을 부라리자 리처드가 찔끔하며 의자 뒤로 바짝 붙었다. 난 옆에서 숨죽여 웃었다.
“아, 바보 같은 이야기 그만할래. 몰라. 알아서 하든가 말든가.”
짜증스럽게 투덜거리며 아나스타샤가 일어섰다. 리처드는 여전히 영문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마워. 아나스타샤.”
“너 진짜 제정신 아닌 것 같아.”
이렇게 쏘아붙여도 고맙다고 말하는 리처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옷걸이 쪽으로 가서 코트를 들었다. 더 이상 무언가 이야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난 레슨 받으러 간다. 타티아나, 넌?”
“전 조금 시간이 남아서요.”
“그러니.”
조금 더 남아 있으려는 날 보며 아나스타샤는 이런저런 말 하지 않고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까딱였다.
“먼저 갈게.”
그녀가 자리를 비켜 주고, 난 리처드와 단둘이 남았다.
오후의 햇빛이 그의 모습을 비췄다. 약간 시니컬해 보이는 표정이 슬쩍 비틀리다가 내 쪽으로 향했다.
“타티아나, 네가 그간 궁금해했던 건 좀 해소가 되었어?”
그의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모든 면에서 평범하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그게 기대 받지 않기 위해서라면 할 말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난 분명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석연치 않은 점이 남아 있지만요.”
“뭔데?”
흥미진진해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리처드에게, 생각하고 있던 것을 그대로 전했다.
“제가 이해한 대로라면…… 리처드는 다른 사람에게서 부담감 같은 것을 느끼는 타입이 아니에요. 그런 건 신경 쓰지도 않지 않나요?”
“……지금까지 내가 한 말 제대로 듣긴 한 거야?”
“이야기 말고, 피아노에서 들었어요.”
난 사람의 이야기에서 거짓을 찾아내거나 진실을 들춰내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보통은 있는 그대로 믿어 버리는 편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피아노 소리를 들어 봤을 땐, 약간 더 많은 것들을 읽어 내기도 한다.
“제가 잘못 들었나요?”
지금은 내 귀와 음감도 믿을 수가 없어서 조심스레 덧붙였지만, 리처드는 푸핫 하고 웃어 버리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대로 들은 게 맞을걸.”
“…….”
생각하면 할수록, 리처드가 부담감에 짓눌려서 평균에 맞춰 왔다는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다.
단순히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지어낸 이야기일까? 하지만 만들어 낸 이야기가 친구들을 실망시킬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는 그도 잘 알 텐데.
아나스타샤가 나가 버린 지금, 난 다시 한 번 리처드의 프라이버시에 한 발 내디뎠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인가요?”
그는 상체를 수그리며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덜 말하긴 했어. 그런데 너한텐 나머지도 말해 주려고.”
왜 수년간 봐 온 아나스타샤보다 날 더 믿는다는 것처럼 말하는 건지,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