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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428화 (428/1,277)

##  428화

잠시 날 바라보던 그가 피식 웃더니 양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이야기가 약간 길어질지도 몰라. 차 마실래?”

“……부탁할게요.”

머릿속이 복잡해서 차 끓이는 걸 도와주겠다고 말할 여력도 없었다. 무슨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조용히 차를 끓이는 리처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비스듬하게 서서는 찻잎을 찻잔에 덜어 내고 있었다. 난 그를 부르려다가 그냥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후, 리처드는 내게 허브티를 건네주고 옆 의자에 가서 앉았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할 테니 맞은편에 앉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리처드는 나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이렇게 나란히 앉은 채 이야기하고 싶은 것 같았다. 굉장한 고민,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로 목을 축이고, 앞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어마어마한 연주가 폭발했었던 연습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리처드도 아마 같은 광경을 보고 있겠지.

이윽고 그가 먼저 고요를 깨뜨렸다.

“아까 맨 처음에 내가 물어봤었지. 혹시 전생 같은 건 믿느냐고.”

“……그랬었죠.”

이번에도 조금 엉뚱하게 들리는 이야기가 시작되었지만 난 가만히 대답하기만 했다. 아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리처드가 말하는 것들은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조금 더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이상한 소리 말라며 딱 잘라 말했지. 그게 일반적인 반응이야. 그래서 난 그 애한테 괜한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어.”

“…….”

“그리고 넌 조금은 믿는다고 했었고. 그 차이야.”

리처드는 내게만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 이유를 밝혔다. 전생 같은 신비한 주제에 관대하냐 그렇지 않느냐는 그에게 있어 상당히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

“지금부터 하는 건 진짜 괜한 소리니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으면 그냥 원래부터 이런 이상한 놈이었구나 생각하면서 들어도 돼.”

옆에 있어서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가 갈등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난 옆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면서 다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그가 그 침묵 한가운데에 말을 던졌다.

“나에겐 전생에 대한 기억이 있어.”

“예……?”

난 나도 모르게 옆을 돌아보았다. 그가 꺼낸 이야기는 바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신중하나 싶었는데…… 장난인가? 하지만 리처드는 지금 장난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니다.

“…….”

애쉬그레이의 머리칼에 녹색 눈동자. 살짝 시크한 면이 있어서 다가가기 어렵게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다정한 영국인 친구.

난 리처드가 이 학교에 있는 이유가 꽤 특별할 거라 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이런 이야기가 갑자기 튀어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멍하니 있자 그가 조금 더 설명을 덧붙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이 시간을 살아 본 기억이 있어. 몇 년 후 어떠한 재해가 닥치고, 어떤 세계적 금융 위기가 오는지 모두 겪어 봐서 알고 있기도 해.”

예시를 들으니 이 시간을 살아 보았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있었지만, 쉬이 납득하긴 어려웠다.

리처드는 분명하게 말했다.

“긴 미래에 대한 예지, 그런 거랑은 조금 달라. 난 지난 15년간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거의 다 맞췄을 뿐더러, 상당히 선명한 개인적인 기억들도 가지고 있거든.”

“…….”

“난 내가 시간을 거슬러 왔다고 생각해. 이상한 일이지.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거나, 천국이나 지옥에 가야 할 텐데.”

그 말을 듣고, 난 리처드의 말을 완전히 믿기로 했다.

죽은 뒤에 겪어선 안 될 이상한 일을 겪은 사람이 할 만한 생각들. 난 같은 고민을 해 본 사람으로서, 그런 것들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놀랍긴 했지만, 사실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난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되레 말을 멈추고 내 눈치를 보는 것 같던 리처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내가 이상하게 봐 달라고 했는데도, 이상하게 보는 것 같지 않네.”

“제가 왜 이상하게 봐야 하나요?”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같은 학교 친구에게서 전생의 기억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바라보거나 경원시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처한 상황도 그에 못지않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전 리처드의 말을 믿어요.”

“말이 안 되는 소린데?”

“세상엔 그런 일들이 종종 있곤 하죠.”

“타티아나, 너 정교회 신자 아니었어? 솔직히 이런 소리 하면 욕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리처드가 이해받고 싶은 건지 부정당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 마음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그런 걸 당하실 거라 생각하고 말씀하신 건가요?”

“……아니.”

“절대 그럴 일은 없어요.”

난 빙그레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전 리처드가 미술관에서 관심 있게 봤던 작품들을 기억하고 있어요.”

이제야 리처드가 보던 작품들의 특징들이 생각났다. 물감이 아니라 고뇌와 갈등으로 색을 칠한 것 같던 그림들. 리처드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그 작품들을 본 게 아니라, 깊은 생각과 감정 등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렇게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리처드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

리처드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짙게 서린 복잡한 감정들. 그중엔 이 와중에도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듯 후회하는 감정도 엿보였다.

하지만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사이, 다른 건 몰라도 후회하는 감정은 스르륵 자취를 감추었다. 그의 목소리엔 조금 더 믿음이 실렸다.

“어쨌든 믿어 준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할게. 난 태어날 때부터 수십 년어치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모든 면에서 다른 애들보다 앞서갈 수 있었지.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실제로 그랬어.”

그제야 리처드가 왜 이런 이야기를 갑자기 털어놓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까 아나스타샤도 있던 자리에서 말했던 이야기의 보충인 것이다.

그는 아까도 거짓을 말하진 않았지만 바로 이 진실은 나에게만 전하고 있었다.

난 상황을 이해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럼 어머님께서 믿으셨다는 건…….”

“맞아. 내가 말했었거든. 저번 생의 기억이 있다고. 두 살 때.”

그는 스스로 말하고도 경솔한 사람처럼 보이기 싫었는지 얼른 자기변호를 덧붙였다.

“참고 참다가 말한 거야. 그땐 먹고 자고만 하는 게 답답해서 뭐든지 빨리 시작하고 싶었어. 뒹굴거리면서 시간 낭비할 것 없이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고 싶었던 거지.”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기억이 있었다면 사실 2년간 버틴 것도 참을성이 대단했다.

하지만 그는 후회했다.

“정말 미련한 짓이었지만.”

리처드는 찻잔을 기울이고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분히 자신의 이야기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어머니는 처음엔 약간 우스갯소리로 생각했던 것 같아. 어려서부터 들었던 칭찬 같은 걸 스스로 진짜라고 착각하고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신 거겠지. 하지만 내가 나이를 먹기 시작하니까 조금씩 눈빛이 달라지시더라고.”

난 리처드가 자신의 이야기를 가족에게 말한 이후 상황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도 모르게 나왔던 저번 생의 기억이나 습관들은 어머니를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만들었지.”

리처드는 그저 신경질적이라는 단어로 대체했지만 난 그 짧은 단어에서 위화감과 공포, 경계심 등의 어두운 단어들을 끌어낼 수 있었다.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그는 그때를 떠올리는 듯 먼 허공을 쳐다보았다.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었어.”

“선택이요…….”

“그래.”

리처드는 찻잔을 옆에 내려놓고는, 이젠 다 끝난 이야기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하는 듯 말했다.

“영국엔 겟세마네 동산이 없으니 뒷산에 올라서 하룻밤동안 있었어. 그런데 아무 답도 없더라고. 그래서 혼자 생각했지.”

다른 무언가가 끼어들 틈 없이 결정되어진 문장을 그가 읊조리듯 입으로 내었다.

“전생에 나무였다고 해서 이번 생에도 가만히 있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갑자기 날갯짓을 해서 날 필요도 없을 것 같다고. 그리고 나무는 활활 타오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싶더라.”

리처드의 은유는 난해하지 않고 명확했다. 짧은 망상이나 충동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깊은 상념과 통찰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깃들어 있었다.

그는 말을 맺고는 문득 쑥스러워졌는지 멋쩍게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렇게 혼자 결정하고, 지금까지 실행 중이야. 그게 다야.”

리처드의 미소를 보며 난 다시 한 번 확신했다.

그가 돋보이려 하지 않고 적당히 성적을 평균에 맞춰 유지하는 이유는 내가 청소년 콩쿠르에 나가지 않는 이유와 비슷했다. 이전 생에서 얻어온 것을 완전히 활용할 순 없다는 생각.

그는 조금 더 결연하게 현재를 살기로 했다. 타협과 다짐. 그런 것들이 느껴졌다.

난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일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난 내 이야기도 조금쯤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기분을 느꼈다. 친구 사이에도 저울이 있을 테고, 그렇다면 이쪽에도 추를 올려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내 맹세가 이런 충동적인 마음으로 깰 수 있는 거라면 진즉에 열 번도 더 깨졌을 것이다.

그리고 리처드는 단순히 비밀을 공유하기 위해 이런 말을 꺼내는 것 같진 않았다. 그는 그렇게 가벼운 사람이 아니다.

잠시 고민하며 생각을 정리한 다음, 그를 바라보았다. 리처드는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가지만…… 말해 주실 수 있나요.”

“뭐든 물어봐.”

“리처드는 이전 생에서도 중앙음악학교에 다녔었나요?”

리처드는 가볍게 답했다.

“맞아. 그게 내가 이 학교를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해.”

그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뒤로 쭉 젖혔다. 천장에 있는 무언가를 찾는 듯 위를 바라보면서 그가 이야기했다.

“아예 환경이 바뀌었으니 아예 다른 걸 배워 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이 시기엔 이 학교에 다니고 싶었어.”

“…….”

저번 생의 그는 영국에 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있었는데, 환경이 바뀌었단 말을 들으니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 학교에 온 것을 보면, 그는 결연하게 현재를 살기로 했으면서도 약간의 미련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미련을 아예 끊어 놓을 순 없었던 것이다.

리처드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가 손가락을 흔들며 물었다.

“다른 하나는 뭔데?”

난 훨씬 더 주의 깊게 그를 살피며 물어보았다.

“결정을 내리셨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제겐 이야기 하시는 건가요?”

리처드가 어머니에게 지금 어떻게 대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성적도 평범해졌으니 전생의 이야기 같은 건 그냥 어릴 적 헛소리로 넘길 수 있도록 언행을 고쳤을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그는 아나스타샤에게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는 내가 전생을 조금 믿는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라고 먼저 말하긴 했었지만, 겨우 1년 정도 본 내게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이유로는 너무 빈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리처드는 내가 이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겠지. 그냥 아나스타샤에게 했듯 적당히 설명하고 넘겨도 괜찮았을 테고.”

내가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그가 똑바로 날 바라보았다.

“타티아나.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이번엔 대결을 하자고 하진 않았다. 그냥 듣기 싫으면 거절해도 괜찮다는 투였다. 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오늘 내기거리로 삼으려 하셨던 질문이요?”

“그래, 그거.”

“하셔도 좋아요.”

리처드가 어떤 질문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 물어왔다.

“넌 8학년에 편입해 왔잖아? 그런데 원래는 우리 학교 올 생각이 없었지 않았어?”

오늘 참 신기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싶었지만, 이번엔 정말 황당했다. 갑자기 무슨 말이지?

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조금 흐르자, 난 리처드의 말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데, 리처드는 내 표정을 보더니 곧장 사과했다.

“내가 너무 내 생각에만 파묻혀서…… 음악원에 가지도 않고 우리 학교에 남아 있어 주는 애한테 이상한 소릴 했네. 미안.”

“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사실 이게 지금까지 쭉 했던 내 이야기랑 이어지는 건데.”

그는 바닥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람들이 다 그럴진 모르겠는데 난 특히나 더더욱 자기중심적으로 생각을 할 수밖에 없거든? 이건 좀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어.”

“……?”

“아무튼, 그런 내가 보기에 상당히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어.”

갑자기 대화의 분위기가 덜컥 기울어졌다.

지금까지 모두 리처드에게 가 있던 중심이 이쪽으로 휙 쏠렸다. 깜짝 놀라기도 잠시, 그가 의자에서 몸을 슬쩍 일으키며 말했다.

“분명히 같은 시간대의 같은 학교인데, 다른 건 다 틀림없이 똑같은데, 이상하게도 그땐 없었던 학생이 한 명 생겼거든.”

“……예?”

“그게 바로 너야. 타티아나.”

“!?”

그가 묘하게 내게 흥미를 보였던 것. 그리고 다른 친구들에겐 절대 해 주지 않을 이야기를 내겐 털어놓은 이유.

그건 바로 내가 원래 이 학교에 없어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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