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9화
자신의 세계에서 내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는지 말하던 리처드는, 내가 멍하게 바라보자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오해하진 말고. 여태 이상한 소리만 했지만 방금 그건 이상한 의미로 말하는 거 아니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요…….”
“그럼 다행이고.”
그가 다른 바람이 있어서 이렇게 장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미 한 번 겪은 시대라서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안다는 것에 대해 실제로 무언가 물어봐서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난 그가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고 믿었다.
내가 믿어 준다는 걸 느꼈는지, 리처드가 이어 말했다.
“처음엔 착각인가 했어. 내가 음악학교 다닐 시절 친구들을 모두 외우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타티아나 너처럼 강렬한 피아니스트를 잊어버릴 수가 없거든.”
중앙음악학교의 1학년부터 11학년까지의 전교생은 약 400명, 거기에서 피아노 전공자만 추린다면 훨씬 적었다. 적어도 한 번쯤 본 적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분명히 알 수 있다.
리처드는 내가 없는 중앙음악학교를 다녔었다.
“…….”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그땐 음악을 하지 않고 일반 학교에 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평범하게 일반 교과목들을 배우고, 어쩌면 경영학 같은 걸 전공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내가 피아노를 고집하지 않았다면 살게 되었을 삶. 그게 어떤 모습일지 조금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땐 당연히 음악학교의 리처드와도 인연이 없었을 테니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 달라 할 수도 없었다.
다만 리처드는 한 사람이 없었던 중앙음악학교가 어땠는지 기억하고, 비교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네가 나타나면서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었어.”
“많은 것들이……?”
“그래. 일단 한승우. 그 녀석은 지금 우리 학교에 없어야 해.”
이번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지금은 모든 게 잘 풀렸지만, 만약 내가 학교에 없었다면 한승우는 그대로 끌려갔었을까.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며 물었다.
“부모님을 설득하지 못해서요?”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내 기억으론 입학시험에서 통과를 못 했어.”
그런데 리처드의 이야기는 조금 충격적이었다.
“아직도 기억나. 한바탕 난리가 났었거든.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이 한국인 학생은 자기가 책임지고 뽑았으니 상관하지 말라고 했었고, 구세프 선생님은 절대 인정 못 하니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사표 쓰겠다고 했었던가. 결국 떨어졌었지.”
“뭐라고요……?”
입학이야 어차피 내정되어 있었으니 어떻게든 들어와선 1년 정도 있다가 결국 끌려갔겠거니 생각했는데, 아예 입학조차 못 했다고?
난 내가 실기 날 끼어들었던 일을 아직도 흑역사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리처드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게 아니었다.
리처드는 깜짝 놀란 내 얼굴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내가 처음 한승우를 도와줘야겠다 생각했던 건, 선생님 두 분이 싸우고 떨어졌다는 이야기뿐이었던 녀석이 이번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입학에 성공해서였어.”
“…….”
“그리고 그 이유를 듣자 하니, 네가 입학시험장에서 살려 줬다면서?”
난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리처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어물거리는 날 보며 손가락을 탁 튕겼다.
“네가 나타나서 그렇게 한 걸로 우리 학교는 내가 아는 것과 상당히 많이 달라졌지. 모든 게 미궁에 빠졌어.”
“죄송……하다고 해야 하나요?”
“뭐? 하하하, 뭐가? 난 지금이 훨씬 더 즐거워. 타티아나.”
리처드의 입장에선 전생에 알던 학교와 똑같은 쪽이 여러모로 유리했을 텐데, 그는 그런 것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유쾌하게 웃었다.
그저 반복되지 않고 자신이 모르는 흐름이 생겨서 즐겁다는 투가 아니었다. 리처드의 말에선 기쁨과 감사함 등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난 그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리처드가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까지 여기 있었던 아나스타샤, 그 애가 걱정하는 걸 보니 원래 그 애는 굉장히 따뜻한 애였을 것 같단 생각이 새삼 들더라.”
그는 내가 모르는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내 기억 속 그 애는 지금보다 훨씬 더 차갑고 날카로웠어. 슬럼프는 몇 년이나 이어졌고, 주변엔 도와줄 사람도 없었거든. 항상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처럼 방황하고 다녔었지.”
“……아나스타샤가요?”
“학교에서 상당히 유명했었어.”
아나스타샤는 이전에도 몇 번이나 슬럼프를 극복하는 데에 내 힘이 컸다고 말해 주곤 했다. 난 굳이 내 도움 없어도 아나스타샤라면 혼자서 얼마든지 슬럼프 정도는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기대와 달리 그리 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약간 심경이 복잡해져서 어두운 표정을 짓자 리처드가 말했다.
“하하하, 왜 그런 표정이야 타티아나? 지금 그 애를 봐. 슬럼프는 말끔하게 해결했고 심지어 알캉을 연주하기까지 했지. 난 그게 그 애가 널 만난 덕분이라고 봐.”
“설마요…….”
“옆에서 지켜본, 그리고 네가 모르는 모습까지 기억하는 내가 보기엔 분명히 그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그냥…… 우리 학교에 내가 있어도 되고, 또 친구들 곁에서 내가 무언가 도와줄 수 있어도 괜찮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휙 없어지더라도 우리 학교나 친구들에겐 큰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란 생각도 있었다. 언제나.
그런데 내가 없으면 문제가 많았을 거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여러 생각이 번갈아 스쳐 지나간다. 불안감과 안도감, 그리고 약간은 기쁘기까지.
이 얼마나 단순하고 바보 같은 감정인지.
난 멍청하게 착각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리처드의 이야기는 더 남아 있었다.
“그래, 에르네스트 녀석도.”
“에르네스트요?”
“타티아나, 그 녀석을 어떻게 생각해? 피아노 연주자로서.”
에르네스트야말로 내가 없더라도 전혀 문제없을 사람이었다. 수많은 콩쿠르를 휩쓸고 공로 예술가 훈장까지 받아서 러시아 피아노계의 기린아로 기대받게 된 건 모두 내가 없을 때 그가 해낸 업적이었다.
난 확신을 가지고 답했다.
“훌륭하죠. 앞으로도 훨씬 잘하시리라 생각해요.”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하지만 내 기억 속 에르네스트는 머잖아 피아노를 그만둬.”
“……예?”
멀거니 되물었다.
그가 피아노를 그만둔다고?
“말도 안 돼요. 왜요?”
“여러 이유가 있었지. 그리고 세상에 말이 안 되는 일은 없어.”
“…….”
리처드는 자세히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난 순간적으로 몇 가지나 되는 상황들을 떠올렸다. 피아노 연주자가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는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갑자기 등줄기에 서늘한 느낌이 들어서 어깨를 바르르 떨자, 리처드가 섬뜩한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미안해. 일부러 놀라게 하려고 할 의도는 없었어.”
“머잖았다면…….”
“아니, 아니야. 지금 내가 보기엔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전혀 없어. 진짜 심각한 상황이라면 내가 너한테 이렇게 가볍게 말하겠어?”
어떤 사고 같은 걸 당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겠단 생각에 리처드를 바라보았더니 그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투로 말했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거든. 난 그걸 봤었기 때문에 이번엔 어떻게든 고쳐 보려고 했어. 어려서부터 자주 싸웠던 것도 그것 때문이야. 물론 내가 한 걸론 어림도 없었지만.”
해결? 고친다고?
리처드는 늘 에르네스트와 사이가 나빴다. 그냥 에르네스트를 싫어해서 그랬으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들어 보니 그게 아니라 에르네스트를 도와주기 위해 그런 것 같다.
리처드는 내 추리를 확실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런데 결국 포기하고 8학년이 되었는데, 갑자기 기억에 전혀 없던 네가 편입을 오더라고?”
“……아.”
“그 자식은 정말 너 만나서 콧대가 한 번 부러지고 나서야 사람 된 거야.”
리처드가 고치고 싶었던 게 정확히 무엇이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에르네스트가 피아노를 그만둬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리처드가 농담을 하는 모습을 보니 적어도 지금은 그 위험들이 모두 사라진 게 분명해 보였다.
비로소 난 안도할 수 있었다.
“…….”
들었던 이야기들이 다들 충격적이라서 몸에 힘이 잘 안 들어갈 정도였다. 난 힘없이 찻잔을 들었다가, 비어 있는 걸 보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리처드는 앞을 보면서 너무 복잡할 것 없다는 것처럼 웃었다.
“자기중심적으로 말하자면 넌 내 세계에 갑자기 나타난 특이한 사람이야. 하지만 그건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내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상관없는 세계의 이야기니까 말이야.”
“…….”
“지금까지 한 말들 모두 가벼운 헛소리라고 생각해도 좋아. 그런데 이상한 놈이라고 절교는 안 당했으면 좋겠네. 난 그냥 지금 이 학교가 정말 좋거든.”
“아하하,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어서 머리가 아플 리처드가 이렇게 웃으며 농담을 하는데, 내가 어렵게 생각하는 것도 우스운 일처럼 느껴졌다.
“전…… 제가 그런…… 아니, 아니에요.”
두서없이 말을 꺼내다가, 도로 삼켰다.
난 무언가 의견을 내기보단 그냥 내 단순한 기분을 전하기로 했다.
“그냥…… 정말 모든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난 리처드의 저번 생엔 없었던 특이한 사람이지만, 내가 끼어듦으로서 무언가 나빠지지 않고 보다 좋아졌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리처드는 구부정한 자세로 피아노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답했다.
“왜 네겐 이런 말들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던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나도 지금 말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인 것 같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던 그는 구부정했던 허리를 펴고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무튼, 타티아나. 그러니까 피아노 그만두지 마.”
“예?”
아까도 계속 날 놀라게 하더니 갑자기 이번엔 또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화들짝 놀라 눈을 뜨자 리처드가 냉정하게 말했다.
“가끔 넌 피아노 한 번 치고 모두 그만둘 사람처럼 보이거든. 오늘도 그렇고.”
갑자기 말문이 탁 막혔다.
그는 날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걸까? 심지어 가끔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지금만 말하는 게 아니었다. 재작년에도 그는 내게 일단 무조건 쉬라고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난 이번 방학동안 도전하기로 했던 곡을 제대로 되찾지 못하더라도 피아노를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쌓아올리던 탑을 다시 쌓아나갈 뿐이다.
하지만 지금 난 당당하게 리처드가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가슴 정중앙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박힌 것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리처드가 허공의 무언가를 손으로 짚어 가며 말했다.
“이젠 다른 애들의 미래도 알 수가 없지만…… 난 특히 네 미래에 대해선 전혀 몰라. 그래서 뭘 조심하라고 말해 줘야 할지 잘 모르겠어.”
잠시 고민하던 그는 손가락을 슥 내리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한 가지만 말하자면…… 피아노 연주자인 널 좋아하는 애들이 정말 많으니까, 너무 멀리 가진 않아 줬으면 좋겠어.”
“…….”
“이건 지금까지 한 전생 이야기 같은 거랑은 관계없는 이야기라는 거, 알지?”
리처드는 장난스레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그의 본심을 느꼈다.
지금까지 리처드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그 나름대로 부담과 위험을 무릅쓰고 한 이유는 결국 모두 날 위해서였다.
원래 없어야 했을 사람에게 흥미가 생겨서도 아니고, 지금 총 몇 살인지 모를 정신연령을 지니고 약간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그는 오로지 친구로서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나 역시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리처드에게 웃어 주었다.
“알겠어요. 그렇다면 전 마지막 이야기만 듣고, 나머지는 잊을게요. 괜찮죠?”
그는 약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
리처드는 지금까지 만나면서도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내게 감사를 전하곤, 갑자기 휙 표정을 달리 하며 자세를 삐딱하게 고쳐 앉았다.
스마트폰까지 꺼내 든 그는 뭔가 화면을 휙휙 넘기면서 딴청을 피우더니 불쑥 말했다.
“슬슬 레슨 받으러 갈 시간인가?”
“예. 그래요.”
“뭐…… 수고해. 난 기숙사 가서 게임이나 해야겠네.”
난 그냥 웃기만 했다.
코트를 챙기고, 가방을 들었다. 오늘 머리 아픈 이야기들을 정말 많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슨을 쉴 순 없었다.
“먼저 가 볼게요. 리처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던 그는 손을 살랑 흔들다가 멈칫했다.
“타티아나.”
“?”
그는 스마트폰을 유심히 보면서 뭔가 생각하더니 내게 말했다.
“지금 인터넷 뉴스 기사 보니까…… 북극해 항로 사업에 너희 베르체노프 콘체른도 관심을 조금 보이고 있나 봐?”
북극해 항로 사업? 갑자기 무슨 말이지.
난 아버지가 정말 여러 사업을 하고 계시다는 걸 알지만, 정확히 뭘 하시는진 전혀 모른다.
“글쎄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하자 리처드가 눈만 살짝 들어서 날 바라보았다.
“음, 가스관 사업보단 앞으로 이쪽이 훨씬 괜찮아 보여서. 혹시 너라면 뭔가 아나 싶었지.”
“…….”
평소 이런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고 날 편하게 대해 주는 리처드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쉽게 짐작이 갔다.
오늘 이야기를 잘 들어 준 것에 대한 보답인 걸까?
하지만 여기서 고맙다고 하는 건 재미없다. 리처드도 그런 걸 바라고 있지 않음이 분명했고.
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도 조금 알아볼게요. 전 사업적 식견이 전혀 없어서…… 부끄럽네요.”
“무슨 소리야? 나도 그냥 해 본 말인데.”
리처드는 크게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했지만,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