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0화
리처드와 나눈 이야기들을 되돌아볼 시간은 없었다. 난 바로 레슨실로 가서 그 후로 2시간 가까이 피아노에 모든 집중력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
기절할 것 같다.
오전에 미술관 관람을 한 게 상당히 체력에 부담이 많이 간 모양이었다. 간신히 레슨은 이상하게 않게 받은 것 같지만, 끝내고 집중력이 풀어지고 나니까 고개를 제대로 들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냥 이대로 쓰러져 잠들어 버리고 싶다.
“귀에 들리는 건 좀 낫게 들리나?”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그 뒤로도 무언가 검사하듯 내 상태를 물어보셨다. 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대답했다.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네 연주도 조금씩 제대로 방향을 찾아가는 것 같이 들리긴 한다.”
구세프 선생님은 내가 제대로 하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쇼팽 소나타 1번을 다시 잡았던 첫날엔 너무 많은 소리가 머릿속에서 뒤섞이고 귀로 듣는 소리도 이상하게 들려서 감도 못 잡고 있었는데, 이젠 적어도 그렇진 않다. 내 귀로 듣는 피아노 소리는 분명 어느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곡에 익숙해질수록 어림도 없다는 것처럼 몸은 더더욱 제대로 가누기 힘들어졌다.
서서히 날 피아노에서 떨어뜨려 놓는다.
“…….”
난 철저하게 지배당하고 있는 것 같은 소름 돋는 기분을 애써 무시했다.
이미 결론이 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번 방학이 끝날 때까진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내가 끝내지 않는다면 할 수 있다.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건반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구세프 선생님이 물었다.
“그런데 어디 아프나?”
“예?”
난 막 힘이 빠지던 목에 힘을 주며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을 돌아보니 살짝 찌푸린 눈빛이 내게 와 닿았다.
“며칠 전부터 느끼긴 했는데, 왜 이렇게 맥을 못 추지? 타티아나.”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신경을 썼지만, 그래도 구세프 선생님의 예리함에서 완벽히 벗어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냥 연구에 애를 먹는 줄만 알았는데…….”
선생님이 지금까지 잠자코 있어 주신 건 내가 정신적으로만 힘들어하고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떤 분야든 그렇지만 힘들지 않고 얻어 낼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정도 정도가 넘어서면 선생님으로선 걱정을 하실 수밖에 없다.
“넌 본래 체력이 그리 좋진 않지만, 그래도 그 약간의 체력을 건반으로 정교하게 밀어 넣는 데에 아주 능숙한 학생이었다.”
“…….”
“그런데 지금은 아예 그 약간의 체력도 없는 것 같군. 몸이 안 좋은 게냐?”
너무 정확한 진단이라서 그냥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몸 상태를 사실대로 말하면 구세프 선생님이 어떻게 반응하실진 불 보듯 뻔했다. 난 그냥 약간 컨디션 난조 정도로 보여야만 했다.
제발 태연한 목소리가 나오길 기도하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타티아나. 이 곡은 지금 네게 정신적으로 부담이 크다. 너도 알겠지. 처음엔 아예 첫 마디도 못 쳤으니까.”
아니라고 변명할 수 없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세프 선생님은 팔짱을 끼시더니 딱딱하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걸 알면서도 고집한다는 걸 아니까 나도 막지 않고 지금 가르치고 있지만…… 흔들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건강까지 상하는 걸 그냥 지켜볼 생각은 없다.”
스스로 자각은 별로 없었는데 선생님이 보시기엔 오늘 내가 정말 엉망진창으로 레슨을 받았나 보다. 난 입술을 살짝 깨물며 후회했다. 이렇게 흐트러지면 안 되는데.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약간 피곤하긴 하지만 괜찮아요. 오늘은 오전에 미술관에 갔다 와서 그래요.”
“미술관?”
“예. 미하일 선생님이 가 보라 하셔서…….”
“흠. 그 때문이었나.”
어쩔 수 없이 변명했다. 할 수 없었다. 사실이기도 했고.
내 변명을 듣고 구세프 선생님은 어느 정도 납득하셨다. 내가 레슨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되도 않는 변명을 하진 않으리라 믿으시는 것 같았다. 가슴 안쪽이 쿡쿡 쑤신다.
선생님은 엄격하게 말씀하셨다.
“오전에 돌아다니느라 피곤할 수도 있단 건 알겠는데, 레슨에까지 영향을 미치면 되나? 타티아나.”
“죄송합니다. 선생님.”
“…….”
조금 더 훈계를 하실 것처럼 팔짱을 끼고 있던 선생님은 갑자기 그럴 마음이 사라지셨는지 감히 날 내려다보시더니 팔을 내렸다.
작은 한숨이 들릴락 말락 하게 흐르고, 선생님이 건반 덮개를 탁 닫았다.
“오늘은 이쯤하자. 오늘 살짝 감을 잡은 것같이 보였는데, 그걸 쥐고 다시 잘 고민해 봐라. 네 음악은 결국 네가 찾는 거다, 타티아나.”
“예.”
“잘 알고 있겠지. 연이어 괜한 소리만 하게 되는군. 가 봐라.”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래.”
레슨실 밖으로 나오니 찬 공기가 코트 사이로 스며든다. 어깨가 떨렸다.
2시간 동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땐 더위를 느꼈었는데, 이번엔 정말 순식간에 추워졌다. 도무지 중간이라는 게 없었다. 춥다가 덥고 덥다가 춥다.
요즘 들어 늘 이런다. 별로 이상하지도 않을 정도였다. 내 방에서 온도를 제대로 맞춰 놓았을 때도 갑자기 땀이 흐르거나 추위에 떠는 일은 몇 번이나 겪었다.
난 대수롭지 않게 감기에 걸리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코트를 더 단단히 여몄다.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졌다. 주차장까지 가면 빅토르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잠시 쉬었다 가야 할 것 같아서 멈춰 섰다.
난 힘없이 스마트폰을 들고 전원을 켰다. 레슨이 끝나면 말해 달라는 아나스타샤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막 레슨이 끝나서 로비에 내려왔다고 답장하고, 잠시 숨을 돌리며 기다리자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가 계단을 내려왔다. 교내 어딘가에 있다가 내 메시지를 받자마자 움직인 모양이다.
“오래 기다렸나요? 아나스타샤.”
“괜찮아. 연습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네가 늦은 게 아니라 내 레슨이 일찍 끝난 편이니까.”
그녀의 메시지가 도착한 건 약 1시간 전. 콩쿠르 예비 레슨이 1시간 만에 끝났다는 건 상당히 좋은 신호로 받아들여도 되는 일이었다.
난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피드백할 부분이 별로 없었나 보네요?”
“응.”
아나스타샤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연주할 것도 없이 한 번 만에 전부 문제없다는 평가받았거든. 오늘 컨디션이 좋아서 그런가?”
항상 지적당할 걸 예상하고 받아야 하는 레슨을 이렇게 상쾌하게 받으면 기분이 나쁠 수가 없다.
아나스타샤는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그 이유를 내게 돌렸다.
“이것도 다 네 덕분이야. 타티아나.”
그러더니 갑자기 팔을 확 뻗어 날 껴안았다. 난 안 그래도 힘이 없어서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갈 뻔했다가, 간신히 마주 안을 수 있었다.
그녀가 내 옆머리에 대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렇게 자신감 있게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있었던 것도…… 알캉의 에튀드 같은 상상도 못할 곡에 도전해야겠단 생각을 해서 해낼 수 있었던 것도…….”
난 그녀의 중얼거림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조금 더 팔에 힘을 주며 이야기했다.
“정말…… 네가 없었으면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거야. 아마 그 끔찍했던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제자리만 빙글빙글 돌고 있지 않았을까? 하염없이……. 결국 지쳐서 다 포기할 때까지 그랬을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어.”
“……아나스타샤.”
“그런데 지금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피아노만 칠 수도 있을 것 같아. 정말로.”
당연한 말이지만, 좋아하는 일을 잘하게 된다면 훨씬 더 즐겁게 할 수 있다.
아나스타샤는 원래 피아노를 정말 좋아했었지만 슬럼프에 빠지면서 잘하게 되는 방법을 잊어버렸었고, 이제야 다시 힘들게 연습량을 늘린 끝에 발을 들어 올려 한 계단 더 올라설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그녀가 나지막이 물었다.
“이런 기분을 느낀다면 너랑 조금은 더 가까운 곳까지 갈 수 있는 걸까? 타티아나.”
“…….”
아나스타샤가 날 따라오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고, 또 약간은 그렇게 되도록 유도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직접 들으니 뭐라고 말해 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난 잠시 생각하다가, 일단 말했다.
“숨 막혀요…….”
“미안, 미안.”
아나스타샤가 날 놓아주었다. 따뜻했던 온기가 멀어지고 다시 찬 공기가 끼어든다.
조용히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웃으며 받아 줄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그냥 하고 싶었던 걸 하기로 했다. 이번엔 내 쪽에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
“……아까 연습실에서 리처드와 대결하셨을 때 쇼팽의 에튀드를 먼저 연주하셨잖아요?”
“응? 그랬지.”
쇼팽의 에튀드 op.10의 8번. 난 아나스타샤의 연주를 아직도 기억했다. 그것은 혼탁하고 어지러운 내 마음 속에서 뚜렷한 기쁨이 되어 주었다.
그녀의 자신감과 예술성, 단단한 노력이 음악 안에 잠재되어 있었다.
요즘 정말 어렵게만 느껴지던 음악이 사실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다는 걸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음색이었다. 내가 얼마나 감격했었는지 그녀는 알까.
“그땐 심판이어서 말하지 못했지만…… 지금 말해 줄게요. 아나스타샤, 너무나 훌륭한 연주였어요.”
이렇게 말해도 되나 싶어 꾹 눌러 참고 있었던 칭찬을 해 주면서, 난 정말 큰 만족감을 느꼈다.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더 상냥한 목소리가 내 위에서 들려왔다.
“그렇게 들어 줘서 고마워.”
“그뿐만이 아니죠. 알캉의 에튀드는 리처드도 저도 연주하지 못하는 곡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셋 중엔 아나스타샤가 제일인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아나스타샤가 깜짝 놀라며 날 떼어 냈다. 올려다보니 정말 황당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난 아나스타샤가 세상에 몇 없을 재능을 노력으로 꽃피운 피아노 연주자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나나 리처드는 사실 약간 반칙을 이용해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반칙 같은 것으로도 엄두를 못 낼 수준에 손이 닿고 있었다.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고, 아나스타샤는 정말 굉장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얼마 전까지도 슬럼프에 빠져 있었던 기억 때문인지, 극구 부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건 그냥…… 이런 곡도 한 곡쯤 칠 수 있어야겠다 싶어서 하다 보니 된 거야.”
“알캉은 그냥 하다 보면 되는 곡이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나 그 곡 연습한지 얼마 안 됐어. 제대로 못 쳐 아직…… 그게, 속도를 내면서 대충…….”
아나스타샤는 당황하며 말했지만, 스스로 말하고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는 곡을 자신 있게 대결 자리에 꺼낸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내 눈을 피하며 횡설수설했다.
난 괜히 곡의 완성도를 놓고 따지기 싫었다. 지금 아나스타샤에게 해 줄 말은 달리 있지 않았다.
“제가 언젠가 그랬을 거예요. 아나스타샤는 천재니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 말이죠.”
“…….”
“그 말이 이루어져서 전 너무 기뻐요.”
리처드에게 들었던 다른 아나스타샤의 이야기가 자꾸 생각나서 그런지, 난 더더욱 그녀와 마주 보고 이렇게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상황이 감격스러웠다.
아나스타샤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다가, 순수하게 기뻐하다가, 마지막으론 다시 무언가를 다잡은 사람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멀었어.”
그녀는 반론은 받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이어 말했다.
“네가 뭐라고 하든 간에, 난 아직 나보다 네가 100배는 낫다고 생각하고 있고…… 리처드를 이긴 것 정도로는 부족해.”
“리처드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나도 알지만, 그래도 부족해. 난 걔보다 더 잘하는 애도 이기고 싶어.”
아나스타샤의 말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으니 너무 기뻐하지 않겠단 의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올곧은 의지는 마지막에 내 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더 기대해 줘.”
“…….”
마지막으로 리처드와 나누었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그는 내게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지금처럼 옆에 있어 달라 말했다. 친구로서 내게 그렇게 부탁했다.
아나스타샤도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말은 눈송이처럼, 혹은 빗줄기처럼 내 수면 위에 파문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