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1화
방학 동안엔 중앙음악학교의 교사들에게도 휴가가 주어지지만 구세프에겐 의미 없는 휴가였다. 그는 방학 중에도 할 일이 많았다.
아침 식사를 한 구세프는 당연하다는 듯 코트를 입고 출근길에 올랐다. 학기 중과 똑같은 시간이었다.
“……한산해서 좋군.”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자신의 레슨실로 향한 그는 차를 한 잔 마시자마자 피아노 앞에 앉았다.
바흐에서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아침 연습은 구세프가 지난 30년 넘는 세월 동안 해 왔던 일이었다. 정말 특별한 일이 있어 피아노 앞에 앉지 못하게 된 경우를 제외한다면 구세프는 연습을 쉬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여전히 바흐 스페셜리스트로서 이름을 날리며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이런 꾸준한 자기관리 덕분이었다.
“크흠.”
피아니스트로서 해야 할 일들을 짧고 굵게 마치고, 그다음은 선생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시작할 차례였다.
평소 같았으면 수업 준비를 시작하겠지만 지금은 방학이라 학생들이 없었다.
대신 구세프는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세프 선생님.”
“뭘 또 기다리기까지.”
구세프가 퉁명스레 답하자 그의 옛 제자인 사무엘이 웃었다.
“하하, 귀한 기회니까요.”
이젠 음악원 학생이 된 과거 제자들이 레슨을 청하는 일은 아직도 종종 있는 일이었다.
구세프는 이젠 괜한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말고 음악원의 쟁쟁한 교수들에게 레슨을 받으라고 몇 번이고 말했지만, 생판 모르는 학생들도 아니고 그래도 음악학교 시절 가르쳤던 제자들인데 이제 음악원에 갔으니 알아서 하라고 매몰차게 대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정작 그 교수들마저 학생들에게 바흐만큼은 구세프에게 가르침을 구해도 괜찮다고 공공연하게 허락을 내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암묵적 허락을 받았다 해도 객원 교수처럼 본격적으로 레슨을 할 순 없었다. 때문에 구세프는 그를 원하는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마스터클래스를 하는 형식으로 가르치곤 했다.
이 마스터클래스는 구세프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청강을 원하는 학생들도 많이 참가했다.
구세프는 강당의 좌석을 죽 둘러보곤 말했다.
“오늘따라 뭐 이렇게 많이 모였나?”
사무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 연구회 친구들인데, 이번에 선생님의 음반을 듣고는 그만 반해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냐.”
다시 자세히 보니 학생들은 저마다 노트와 필기구를 꺼내들고 이 클래스에서 하나라도 더 얻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열성적인 학생들을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구세프는 지체하지 않고 레슨을 시작했다.
“이 프레이즈를 살리고 싶다면 이렇게 해 봐라. 리듬감을 살리면 듣기에 좋지.”
구세프는 일부러 조금 더 목소리를 키웠다. 금방 목이 건조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 마스터클래스 예정자는 사무엘뿐만이 아니었다. 구세프의 제자였던 학생들, 그리고 청강생 중에서도 마스터클래스를 요청하는 학생들이 있다 보니 예정했던 것보다 더 많은 학생들과 곡들을 가르쳐야만 했다.
구세프는 예정에서 어긋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이런 상황에선 딱딱하게 굴지 않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진행하다 보니 오전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 버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오냐.”
오전 내내 음악원에 붙잡혀 있다 보니 구세프로서도 진이 빠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터프한 체력은 이 정도 일정을 소화하는 데엔 문제없었다.
가볍게 점심 식사를 하고 음악학교로 돌아온 구세프는 그 이후에도 선생으로서의 업무에 집중했다.
맡고 있는 학생들의 스케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다음 학기가 시작되면 어떤 커리큘럼으로 가르칠지 꼼꼼하게 계획을 검토했다.
이런 부분에서 구세프는 대충하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효율적으로, 그리고 안전하게 성장시킬 수 있는지 연구하고 고민하는 게 그가 늘 하는 일이었다.
가끔은 골치가 아프기도 했다.
“에르네스트…… 지금 나랑 장난하나?”
- 그럴 리가요. 전 진지하게 이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세프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가 간신히 참았다.
에르네스트가 막 메일로 보내 온 악보 스캔본엔 또 일반적으론 볼 수 없는 기호가 있었다.
저번에 한 번 고함을 질러서 쫓아냈더니 다이어그램 같은 걸 그리진 않아서 다행이지만, 이번에 에르네스트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구세프가 협박조로 말했다.
“이딴 식으로 할 거면 작곡이고 뭐고 네 마음대로 해라. 에르네스트.”
- 제 마음대로 한 걸 인정받고 싶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해서든 인정받고 말겠다는 의지가 전화 너머에서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구세프는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미치겠군.”
수백 명이 넘는 구세프의 제자들 중에서도 손에 꼽는 천재라 할 수 있는 애제자 에르네스트는 평소엔 뭐라 나무랄 데가 없었다.
머리가 좋은 건 물론이고, 무엇이 뛰어난 예술인지 읽어 내는 심미안도 뛰어나서 제대로 가르치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여 습득해 버리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가끔 이렇게 무언가에 꽂혀서 고집을 세울 때가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이렇게 고집스럽게 나오면 선생인 구세프도 쉽게 꺾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을 몇 번 겪어 봤던 구세프는 어차피 권위 같은 걸로 해결이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차라리 진지하게 마주 봐 주는 게 낫다.
그런데 이번엔 제대로 봐 주려고 해도 메일로 보내 온 악보 부분 스캔 한 장밖에 없어서 뭘 볼 수가 없었다.
구세프가 짜증스레 말했다.
“차라리 그렇다면 이렇게 일부분만 찍은 스캔본만 덜렁 보내 놓고 전화를 할 게 아니라 제대로 악보 전체를 들고 날 찾아오든지, 이 녀석아!”
-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아서요.
에르네스트는 전혀 당황해하지 않고 이야기했다.
- 절 심사해 주셔야 하는 분께 심사 전에 미완성본을 가지고 가서 피드백을 받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그건 맞는 말이었다.
구세프는 에르네스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지도 선생이지만, 동시에 에르네스트가 작곡한 곡을 심사해야 하는 심사 위원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번엔 스스로 완성할 때까지 직접적인 도움을 구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상황을 보자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구세프는 다시 한 번 메일을 확인하며 물었다.
“지금 완성되지 않은 걸 보내오지 않았나?”
- 아뇨, 보내 드린 건 완성된 기호입니다. 왜 심사 결격 사유가 아닌지 말씀드리기 위해……
“하…….”
정말 할 말이 없다. 이쯤 되자 완성된 기호라는 게 무슨 소린지 듣고 싶어질 정도였다.
구세프는 일단 한 발자국 물러서 주기로 했다.
“설명해 봐라.”
- 예. 선생님.
에르네스트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놓았던 설명을 짧고 간략하게 전했다.
그가 만든 것은 아티큘레이션에 더하여 쓰는 단순한 기호였다. 그런데 설명을 듣고 보니 정말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이고, 심지어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극히 효율적으로 정리된 수학 공식 등을 보면 가끔 이러한 아름다움을 느낄 때가 있는데, 에르네스트의 기호가 바로 그랬다.
“…….”
이런 것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
원래 다른 악상 기호 같은 것들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음악의 신이 선물로 내려 준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음악가들이 하나씩 만들어 낸 것이잖은가.
- 어떻습니까? 선생님.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던 구세프는 약간 기대감을 안고 재촉하는 에르네스트의 목소리를 듣고는 심술궂게 대꾸했다.
“영리하군.”
- 감사합니다.
“기호가 아니라 이렇게 전화로 살짝 떠보는 방식이 영리하다는 말이다.”
- …….
“아까 내가 차라리 악보를 다 들고 날 찾아오라고 말했긴 하지만, 정말 직접 들고 왔으면 이야기를 듣기 전에 널 눈밭에 파묻어 버렸을 게다.”
에르네스트는 말이 없었다. 구세프의 성격이 얼마나 불같은지 잘 알고 있으니 그 부분도 생각을 하긴 한 것 같다.
구세프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는 이 기호를 고안해 낸 진짜 영리한 녀석이 누군지 안다.
한 녀석은 만들고, 한 녀석은 영감을 얻어선 본격적으로 다듬어 써먹으려 들고……. 말은 강하게 하고 있지만, 두 녀석의 합공이라면 이길 도리가 없다.
“네 마음대로 해라.”
구세프는 한숨을 푹 쉬고는, 또 결국 이번에도 에르네스트의 고집에 넘어가 주었다.
에르네스트는 선생의 관용을 느꼈는지 보다 진중하게 말했다.
-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 그 실망하지 않을 곡은 언제쯤 내게 보여 줄 수 있지?”
- 방학이 마치기 전까진 해내겠습니다.
“알겠다.”
전화를 끊고 책상 끄트머리를 노려보던 구세프는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가르치는 대로 잘 하다가 이따금 이렇게 자기 고집을 세우는 게 정말 골치 아프다. 하지만 이런 신선한 맛도 없다면 제자를 뭐 하러 키운단 말인가?
구세프는 에르네스트가 가지고 올 곡을 기대하며 다시 펜을 들었다.
“……흠.”
그렇게 얼마나 업무를 보았을까, 구세프가 시간을 확인하니 곧 2시였다.
정말 영리하면서도 골치 아픈 제자가 한 명 더 올 시간이었다. 구세프는 서류들을 대충 정리하고는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선생님. 타티아나입니다.”
정확하게 1시 50분 즈음이 되자마자 타티아나가 레슨실 문을 똑똑 노크했다. 정말 한 번도 이 시간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들어와선 코트와 모자를 걸어두곤 구세프의 맞은편에 앉았다. 언제나 그렇듯 차분하고 성실한 태도였다.
타티아나도 평소엔 나무랄 데가 전혀 없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근래 구세프는 오늘 앞서 만났던 수십 명의 제자들이나 심지어 에르네스트보다 더 타티아나를 주의 깊게 신경 쓰고 있었다.
오후 스케줄을 하나도 잡아 놓지 않고 모조리 빼 버린 것도 바로 타티아나의 개인곡 레슨을 위해서였다.
“연구는 좀 해 봤나?”
“예. 약간 더 색이 뚜렷해졌다고…… 생각해요.”
“흠, 그래. 들어 보면 알겠지.”
구세프가 손짓하자 타티아나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타티아나가 막 연주를 시작하려는 모습을 구세프는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건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뭔가 안개처럼 흐릿하던 분위기가 푹 가라앉듯 어두워졌다.
잠시 후, 타티아나의 손가락이 들어 올려졌다.
그간 구세프의 앞에서 100번도 넘게 연주되었을 쇼팽 피아노 소나타 1번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
여전히 연주는 그녀의 본실력에 비해 형편없었다.
그나마 방향을 찾아가고 있긴 하지만 한 순간 흐트러지는 것만으로도 음악 전체가 이상해졌고, 가끔은 두 종류의 음악이 섞여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간혹 흘리는 음색엔 깊고 심원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건 음악가라면 분명 원할 만한 가치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위험하게 느껴졌다.
“……음.”
저 음악은 타티아나의 정신에 정말 어마어마한 부담을 주고 있었다.
연주자들이 가끔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감각이 이상해져서 음악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곤 하는데, 지금 보면 타티아나의 경우가 그것과 비슷했다.
그리고 그런 정신적인 부분은 곧장 몸에도 문제를 만들기 마련이었다.
타티아나는 그 점을 내보이고 싶지 않은 것 같았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집중해서 버티고 앉아 있어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처럼 보였다. 타티아나에게서 늘 느껴지던 높다란 성 같은 견고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젠 미술관 관람으로 지쳐서 그랬다고 둘러대기에 넘어가 주었지만, 오늘 다시 보니 그렇게 대충 눈감아 줄 상황이 아니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레슨을 봐 주고 있지만, 정말 무슨 일이든 다 벌어져도 되는 건 아니었다.
위기감이 들었다. 그만두게 하는 게 옳겠다는 직감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늘 하듯 무뚝뚝하게 그만두라고 하면 가장 간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모든 고통을 감내하면서 내색하지 않고 레슨을 받으려 하는 타티아나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건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다.
고민하던 구세프가 택한 방법은 조금 더 혹독하게 타티아나를 몰아붙여 보는 것이었다.
“그 구간만 다시 반복해 봐라.”
힘들어서 못하겠단 소리를 입으로 내지 않아도 좋다. 살짝 힘든 척만 해 주더라도 구세프는 타티아나를 그만두게 할 명분이 생긴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
하지만 타티아나는 가면 갈수록 더더욱 집중력을 날카롭게 끌어모으고 있었다.
결국 항복한 것은 구세프였다. 어쩔 수 없이 구세프는 연주를 일단 중단시키고 생각에 잠겼다.
“사흘…….”
자기도 모르게 그만 입 밖으로 말이 나와 버렸다.
타티아나가 올려다보았다. 구세프는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안쓰럽고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집중해보기로 했던 기한이 이제 사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 타티아나도 잘 알 것이다.
그럼 현실적으로 무리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겠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하지만 타티아나는 무릎을 내려다보고 있기만 했다.
구세프는 길게 이야기해서 좋을 것도 없지만 침묵이 길어져도 안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분위기를 환기하듯 말했다.
“다른 신경 쓰지 말자, 타티아나. 남은 기간도 레슨은 같은 시간이다. 알겠나?”
“예, 선생님.”
“좋아, 오늘은 이만 가 봐라.”
일단은 타티아나를 집에 보내서 쉬게 해 놓고 생각을 해야 할 것 같다.
구세프는 막 레슨실 밖으로 나가는 타티아나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는, 문이 닫히고 나서야 긴 한숨을 내쉬며 품을 뒤적였다.
“빌어먹을.”
하지만 담배는 한 개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구세프는 투덜거리며 거칠게 일어섰다. 나가서 사와야 할 참이다.
“!”
하지만 막 레슨실 문을 열었을 때, 구세프의 머릿속에서 담배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레슨실 바로 옆, 차가운 복도엔 타티아나가 쓰러져 있었다.
“타티아나!”
구세프가 급히 달려가 타티아나를 부축했다. 하지만 일으켜 세우고 큰 소리로 불러 보아도 정신을 잃은 타티아나의 머리는 힘없이 흔들거리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