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32화 (432/1,277)

##  432화

오늘은 악몽을 물리치고 일어났을 때부터 무언가 달랐다.

전신이 무겁게 느껴지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별로 피로하지 않았다. 되레 조금은 편하기까지 했다.

묘한 기분이었지만 몸이 말을 듣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몰아붙인 결과가 어느 정도 나오나 싶었다.

난 캄캄한 새벽의 어둠을 뚫고 연습실에 가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다시 차분하게 연습해 본 쇼팽의 소나타도 지금까지 했던 것 중 가장 괜찮은 느낌으로 나왔다.

찾고 있던 과거의 편린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 보다 확실하게 다가왔다.

이제야 감을 잡은 건가 싶다. 방학이 끝나기까지 사흘 정도 남았는데, 구세프 선생님과 상담해서 기간을 조금만 더 늘리는 건 어떨까 고민되었다.

“……?”

그런데 약간 들떴던 기분은 막 동이 터 오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서서히 가라앉았다.

뭔가 어지럽게 울렁거리는데 잘 보이지 않고 시야가 흐릿했다. 창문에 김이 서린 건 아니었다.

창가로 가까이 다가가서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하자, 그제야 하얀 눈밭에서 뛰어다니고 있는 벨카가 보였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창밖을 노려보다가, 책장에서 책을 두어 권 뽑아 펼쳤다. 책의 글자들도 집중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흐릿했다.

“갑자기 왜…….”

목 뒤에서 어른거리던 무언가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느낀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혀 온다. 난 이대로 서 있다간 쓰러질 것 같아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해졌다.

어질어질한 머리로 최대한 집중해서 지금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애썼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모든 심증은 한 곳으로 향했다.

지금 겪는 이 이상 증세는 재작년에 내가 고집대로 그대로 행했으면 겪었을 일이었다.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생기기 시작한 문제는 단순히 건강에서 시작되어 손끝의 감각이나 음감 같은 예민한 부분을 망가뜨리고, 이젠 다른 감각에까지 번져 가고 있었다.

난 이것을 회복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은 괜찮으리라 생각하고 억지로 몸을 끌고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이렇게 눈이 잘 안 보이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모든 게 정리되고 나면 다시 전부 회복될 거라 생각하고 싶지만 시력 같은 부분은 영구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뭐가 어떻게 될진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갑자기 모든 게 무서워져서 어깨가 떨렸다.

“…….”

앞을 잘 볼 수 없게 되리란 것도 두려웠지만, 결국 내 미련이 모든 걸 망치고 말 것이란 생각이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내겐 스스로를 망가뜨릴 권리가 없었다. 피아노라는 한 부분만 빼낸다면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도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내 의무였다.

그렇다면 지금 난,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안 돼.”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정말 머릿속은 캄캄하고 눈앞은 흐릿했지만, 가만히 앉아서 무언가 날 집어삼키거나 아니면 그냥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건 정말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

눈가를 비비고 일단 식당으로 향했다.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는 일찍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아침인사를 건네고, 식사를 하며 근래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실 배고픈 것도 잘 모르겠고 뭔가를 먹어도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무조건 먹고, 무조건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엔 곧바로 빅토르를 찾아갔다. 전화를 해도 되겠지만, 지금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빅토르.”

“어쩐 일이십니까?”

숙소에서 운동을 하던 빅토르가 물었다.

늘 하는 레슨이라면 오후에 있고, 오전에 약속이 있다면 항상 전날에 이야기해 주는 내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자 의아한 모양이다.

“빅토르, 가까이 와 주시겠어요?”

빅토르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털레털레 다가왔다. 난 빅토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제 눈 좀 봐주세요. 약간 충혈되어 있는 것 같지 않나요?”

“……그렇습니까?”

빅토르는 가까이에서 봐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쨌건 상관없었다. 난 살짝 신경은 쓰이지만 큰일은 아닌 것처럼 말했다.

“간밤에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눈이 피로해서 그런데…… 오후 스케줄도 있으니 오전에 안과에 갔다 오면 어떨까 해서요.”

“…….”

빅토르는 조금 더 유심히 내 눈을 바라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사가 아닌 그가 무언가 더 알아낼 순 없었다.

그래도 보기엔 멀쩡해 보이니 한시름 놓았는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다시 방으로 가서 조금 더 두텁게 옷을 입고 나오니 빅토르는 이미 깔끔한 슈트 차림으로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완벽한 모습의 빅토르를 보며 나 역시 완벽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여전히 시력에 문제가 느껴졌고, 자꾸만 불안감이 차올랐다.

“그나저나 무슨 책을 그렇게 읽으신 겁니까? 재미있는 거면 저도 추천 좀 해 주시죠.”

“별로 재미는 없었어요.”

“음, 그렇습니까?”

“그…… 다음에 재밌는 책을 찾으면 추천해 드릴게요.”

점점 불안이 심해지면서 신경이 날카로워지는걸 나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난 빅토르에게 날카롭게 대답하지 않기 위해 집중하면서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안과에 도착한 뒤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난 모스크바에서 가장 실력이 좋다는 안과의와 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앞이 흐릿하시다고요? 양 눈 다 말입니까?”

“예…….”

“언제부터입니까?”

“오늘 아침이에요.”

“급성 각막염이라기엔 증상들이 안 보이고…… 어디 검사를 한번 해 볼까요.”

난 문제점에 대해선 그대로 이야기하고 의사를 따라갔다. 몇 종류나 되는 기계들이 내 눈을 검사했다.

눈을 오래 뜨고 있느라 힘들어져서 눈물을 닦아 내고 있는데, 곧 의사가 검사 결과를 알려 주었다. 그는 정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검사 결과로는 정상입니다.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흐릿하게 보입니까?”

“그냥…… 세상이 전부…….”

“문자를 읽으면서 눈가를 찡그리는 걸 보니 그렇게 하면 조금 보이는 것 같은데, 그렇습니까?”

“집중하면 조금은 잘 보이는 것 같아요.”

“이상하군요, 시력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다른 병변도 보이지 않고. 시신경의 문제라기엔…….”

모스크바에서 가장 유명한 안과의도 똑바로 된 진단을 내리지 못하고 정말 이상하다는 듯 이런저런 다른 원인을 찾고 있었지만, 난 안과의도 모르는 문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시력 저하는 눈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겪어 왔던 감각의 문제가 심해졌을 뿐이다.

막연한 불안감은 덜해졌다. 하지만 겪고 있는 문제들의 심각함이 덜해지는 건 아니었다.

난 이런 문제들을 일련의 경고라 느끼고 있었다.

이젠 공포감마저 느껴지는 경고들이 내 팔을 붙잡고, 목을 조여 온다.

“…….”

혼자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의사가 대강 설명을 마쳤는지 마지막으로 말을 맺었다.

“이 상황에서 약을 쓰거나 다른 조치를 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금방 회복할 수 있는 일시적인 증상일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안정하시며 푹 쉬고, 사흘쯤 뒤에 다시 한 번 내원해 주시죠.”

결국 잘 모르겠다는 말이지만, 그래도 상당히 정확한 진단이었다.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밖으로 나왔다.

“…….”

세상은 흐리멍덩하게 보였다. 마치 내가 가는 길을 암시하는 것처럼.

할 수 있는 곡도, 비전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심지어 이젠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자체도 흐려져 버린 내가 뭘 할 수 있는 걸까.

멍하니 서 있자 빅토르가 옆에 다가와선 이야기했다.

“피곤하셔서 잠깐 그러신 거겠죠. 괜찮으실 겁니다.”

“…….”

“아무튼…… 그러니까 오늘 오후 레슨은 빼고 쉬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방학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받으셨으니 하루 정도는 쉬는 것도…….”

“아뇨.”

난 딱 잘라 말했다.

“레슨을 쉴 순 없어요.”

사실, 지금도 굉장히 무섭다. 이젠 정말 그만둘 때라는 강렬한 직감이 날 사로잡고 있었다.

앞이 잘 안 보인다는 건, 심지어 이게 시작이고 더 심해질 수 있다는 건 생각만 해도 정말 몸서리쳐질 정도였다. 당장에 하던 걸 그만두고 하루빨리 재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오늘도 피아노 연주자로서 날 기다리고 계실 구세프 선생님에게 사흘을 남겨 놓고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 드릴 순 없었다.

선생님도 나도 납득하려면 적어도 정해 둔 기한 내엔 최선을 다 해야 한다. 모든 미련에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의 매듭은 지어 둬야 했다.

눈에 힘을 주며 빅토르를 올려다보니, 그는 내가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신뢰가 담긴 미소를 보내 왔다.

그리고 난 몇 시간 만에 내가 그의 신뢰를 배신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

머리가 몽롱하다. 검은 안개 속에 홀로 던져진 것처럼 주변이 캄캄했다.

단지 난 작은 촛대만 하나 움켜쥐고 있었다. 촛대 위 초에 붙은 촛불은 작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어둠을 밝히는 건 어림도 없었다.

난 이 촛불을 왜 쥐고 있는 걸까.

약간 의아해하며 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세상이 뒤로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난 뒤편으로 쓰러졌다.

“……아.”

눈을 뜨니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잠깐 동안 머리가 제대로 돌지 않아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허…… 윽.”

몸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고, 난 숨을 크게 토해 내며 손을 끌어모았다.

기절할 것같이 머리가 어지럽고 목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힘든 상태에서도 내가 확인한 건 손의 상태였다.

왼손 손등엔 투명한 튜브가 꽂혀 있었다.

보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난 나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튜브를 쥐고 힘을 줬다가, 천천히 내려놓았다. 억지로 뜯어내면 다칠지도 모른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할 때다.

일단 양손의 상태를 확인했다. 가느다란 팔도, 손목도, 손가락도 움직이는 데엔 큰 불편이 없었다. 보기에 어디 다친 곳은 없었고 둔하게나마 내 의사대로 움직여 주었다.

“…….”

일단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조금 더 몸 상태를 돌아본 다음 내가 한 것은 링거를 뽑아내는 일이었다. 누군가 날 위해 꽂아 둔 것이겠지만, 소름이 끼쳐서 참을 수가 없었다.

붙어 있는 테이프와 거즈를 조심스레 뜯어내고, 손등에 꽂힌 바늘을 잡았다. 이걸 빨리 뽑지 않으면 어떤 충동에 휩쓸릴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천천히 바늘을 당기자 정말 기분 나쁜 감각이 손등을 타고 올라온다. 이를 악물고 노려보며 뽑았다.

핏방울이 맺힌 바늘을 뽑아서 멀찍이 던져 놓고 나자 미칠 것 같던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비로소 조금 안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후…….”

정신이 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흐릿하게 보아도 이곳이 개인 병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에 왜 왔는지를 떠올려보다가, 이젠 정말 다 끝났음을 깨달았다.

“…….”

구세프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았던 것까지는 기억난다.

눈이 잘 안 보일 정도로 심신의 괴리는 최악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사흘 남은 레슨은 마쳐야 했고, 난 평소보다 훨씬 더 집중해서 피아노에 매달렸다.

구세프 선생님은 내가 갈피를 잡은 것처럼 느끼셨는지 평소보다 조금 더 혹독하게 여러 가질 요구하셨다. 난 어떻게든 그것들을 다 해냈다.

그리고 내 기억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건 차가운 문손잡이의 감촉이었다. 레슨을 마치고 나와서 문을 닫자마자 기억이 툭 끊어졌다.

결국 못 버티고 레슨실 앞에서 쓰러졌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날 가장 먼저 발견했을 게 누구일진 안 봐도 뻔했다.

“핫.”

순간 입 밖으로 실소가 툭 터졌다.

구세프 선생님은 이제 나에 대한 신뢰를 잃으셨겠지…….

레슨은 끝났다. 이렇게 쓰러져선 사흘 안에 피아노 앞에 다시 앉을 수 있을 리도 없다.

그리고 다시 앉는다고 해도, 다시 도전할 기력이 없다.

결국 이런 형태로 매듭을 지어지는구나.

“모두 끝났…….”

뭐가 어찌 되든 간에 결과를 마주하게 되면 조금은 마음의 정리가 되어서 홀가분해지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난 며칠간 정말 끝장을 보려고 매달렸던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의 선율이 스르륵 흩어져 간다.

다시 손을 뻗을 힘도 없이 멀거니 바라보고 있자니 수많은 감정들이 솟아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분노, 회한, 짜증, 절망감. 그리고 체념.

체념이라는 녀석은 조용히 일어서서 다른 모든 감정들을 잡아먹었다. 그 거대한 덩치는 어찌할 도리도 없다.

난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체념이 휘두른 발톱에 가슴을 찔리고 주저앉았다. 비명 소리도 낼 수 없었다.

“…….”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난 양손을 그러쥐고 모든 것이 진정되길 숨죽여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날 그렇게 기다려 주지 않았다.

“……타티아나.”

“!?”

기겁해서 고개를 들자 구세프 선생님이 막 문을 연 자세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급기야 나가 달라는 축객령이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 구세프 선생님이 삐딱하게 말했다.

“손등이 그렇게 아프면 링거는 뽑지 말지 그랬나.”

“…….”

난 손등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양손을 늘어뜨렸다.

구세프 선생님은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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