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33화 (433/1,277)

##  433화

죄책감과 무기력함이 온몸을 꼼짝도 못 하게 내리눌렀다. 난 가까스로 눈만 들어 구세프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잘 보이지 않아도 거대한 피아노 연주자의 존재감이 이 작은 개인 병실을 가득 채우는 게 느껴졌다. 사나운 무언가가 이쪽을 향한다.

“…….”

당장 고함을 치실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제정신이긴 한 거냐고 윽박지르신다면 난 조금이라도 제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무슨 말씀이라도 해 주셨으면 좋겠다.

“왼손 이리 줘 봐라.”

그런데 내 옆에 다가온 구세프 선생님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씀하실 뿐이었다.

난 하라는 대로 왼손을 내밀려다가, 손이 피로 지저분해져 있는 것을 보고는 멈칫했다.

실제로 손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바늘을 뽑고 지혈을 제대로 안 해서 이렇게 된 것뿐이지만, 이런 손을 피아노 선생님에게 보여 드리는 건 해선 안 될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구세프 선생님은 내가 손을 빼지 못하고 붙잡고는 손수건으로 손등을 눌렀다.

“…….”

커다란 손과 손수건이 내 손을 덮자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온다. 그 온기는 손등에서 팔을 타고 목 부근까지 올라왔다. 난 간신히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

가만히 불러도 구세프 선생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내 손등을 지혈하는 데에만 집중하셨다.

난 입을 다물었다. 지금 보기엔 큰 소리를 내시지도 않지만, 사실 굉장히 화나 계시다는 게 느껴졌다.

한참 동안이나 왼손을 맡긴 채 있자니, 곧 피가 멎은 듯했다. 선생님은 손수건을 다시 접어 넣고 내게 말했다.

“누워라. 타티아나.”

“아니에요, 괜찮…….”

“누워.”

난 한 마디도 더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누웠다. 늘 경외심으로 바라봤던 선생님을 누워서 보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당장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매서운 분위기에 눌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날 내려다보던 구세프 선생님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언제나 그렇듯 약간 찡그리고 있는 인상은 오늘따라 피곤함을 담고 있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타티아나. 지금 난…… 네게 상당히 감정이 좋지 않다.”

“…….”

“학생을 감정적으로 대하면 안 된다는 건 교사가 지켜야 할 첫 번째 철칙이지만, 지금은 널 감정적으로 대하고 싶다. 이해하나?”

섬뜩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생님을 저렇게 만든 건 나였으니까.

난 베개에 파묻힌 머리를 끄덕거렸다.

“……이해해요. 선생님.”

“빌어먹을. 내가 묻긴 했지만, 이해하긴 뭘 이해한다는 게냐?”

“제가 선생님의 신뢰를…… 잃었다는 점이요.”

“…….”

구세프 선생님은 입을 벌리고 다시 무어라 호통을 치시려다가, 말이 잘 나오지 않는지 잠시 가만히 계시더니 급기야 답답하다는 듯 손으로 무릎을 팡 쳤다.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병실에 깔리고, 이어서 우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까지 교사로 있으면서 별의별 학생들을 가르쳐 봤지만…… 네가 날 제일 힘들게 하는군.”

이제 와서 죄송하다고 해 봐야 의미 없었다. 난 그간 충분히 죄스러움을 느끼면서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지금 이런 생각도 고집스러운 걸까. 모르겠다.

“타티아나.”

구세프 선생님은 내 얼굴을 들여다보시더니 중얼거리듯 내 이름을 불렀다.

“세상엔 이유가 없어도 이상은 있는, 그런 연주자들이 있다는 걸 나는 안다. 때문에 보조자로서 널 도왔지.”

그 말씀대로 선생님은 내게 가르칠 곡을 내어 주셨을 때도 필요 이상으로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이상이 분명하다면 이유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듯, 그저 내가 원하는 걸 알아볼 수 있게 그려서 가지고 와 보라고만 했을 뿐이다.

그때, 난 가르침 받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구세프 선생님이 음악가로서 나와 제대로 마주했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무리를 안 할 수는 없다고 봤다. 뭔가를 얻어 내려면 당연히 고생을 해야지. 그리고 밤새워 하는 포커게임도 따면 피곤하지 않다. 난 그 희열을 타티아나 너도 안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얻어 낼 수 있을지 없을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손을 뻗어야 한다. 연주자들의 업이란 대체로 그렇다.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얻어 냈을 때의 성취감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때론 멈출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병실에 누워 있게 되어 버리면, 그냥 바보 같은 학생으로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네 행동은 이기고자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쓰러질 때까지 내게 한 마디도 안 한 건 왜냐?”

“……이기고 싶었어요.”

“그런 말 듣고자 하는 게 아니다.”

구세프 선생님의 목소리가 나무라듯 날카로워졌다.

“문제없다는 진단서까지 받아 왔었잖나? 난 그걸 보고 널 믿었다. 적어도 자기 컨디션 관리는 알아서 할 수 있을 거라고.”

분노와 실망이 점점 형태를 드러냈다. 평소 야단을 치는 고함 소리보다 이런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겐 더 아프게 다가왔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무리하는 게냐. 이유를 말해라.”

이번에도 구세프 선생님은 날 도우려 하신다. 난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선생님은 이번엔 날 제지하지 않았다.

난 앉은 채로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선생님은…… 이번 기한이 끝나면 다음에 다시 해 보자 하셨죠. 접근법이나 레슨법을 달리할 수도 있고…… 제가 지금 할 수 없는 것들을 나중엔 더 잘할 수 있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죠.”

“그래. 아무리 봐도 네가 원하는 건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전 이번을 마지막으로 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래서 이번 기회를 전부 쓰고 싶었어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 날카롭게 곤두섰다가, 스르륵 내려앉았다. 선생님은 내가 멍청해서 이렇게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다.

“왜지? 타티아나.”

“…….”

내 이유는 참 복잡했다.

마지막 미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구세프 선생님과의 약속으로 구체화되어 남았다. 난 이걸 언제까지고 끌고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결과를 마주하고 싶었다.

그렇게 받아 든 곡은 시간을 들여서 차분히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곡이 아니었다. 완성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몸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는 점만 갈수록 분명해졌다.

할 수 없을 것 같단 예감은 이미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건 단순한 실력의 벽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거대하게 날 틀어쥐고 있는 무언가였다. 난 나약한 운명론자로 남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길 생각을 한 것부터가 실수였을까.

아마 두 번째 기회를 얻은 시점에서 첫 번째의 모든 건 깔끔하게 내려놓는 게 옳았겠지. 결코 허락되지 않을 일이고.

사실 모든 건 예전부터 분명했었다.

이젠 결과가 나왔으니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저도 철이 들어서 현실주의자가 된 걸까요.”

“……뭐?”

“아하하, 이렇게 누워서 말하니 설득력이 하나도 없네요. 하지만 그냥…… 약간…….”

회피하면 안 된다. 정확하게 내 입으로 말해야 했다.

난 선생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집중력을 끌어모으니 시야가 조금 또렷해졌다. 난 혹여나 헛소리를 하지 않도록 신경 써서 말했다.

“길었던 판별이 끝났다고 말씀드릴게요.”

머릿속에서만 가득했던 것들을 선생님이라는 증인 앞에서 입 밖으로 발음하니 비로소 돌이킬 수 없게 매듭이 지어졌다.

단호하게 모든 걸 끝내기로 했다.

“선생님께선…… 약속을 지켜 주셨는데.”

“…….”

“약속을 못 지킨 건 제 쪽이었네요.”

구세프 선생님은 인상을 쓰며 날 바라보고 계셨다. 난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울 수는 없어서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괜한 고집 부려서, 또 받아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자꾸만 몸에서 힘이 빠진다. 아픈 것처럼 보이기 싫으니 자세를 똑바로 하고 싶은데 그럴 힘이 없었다.

이제 내 손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두 번째 기회를 진지하게 마주하기로 결정하면서 거기에 방해되는 것들은 2년 전에 모두 내려놓았고, 마지막까지 쥐고 있었던 건 연주자로서 날 증명할 수 있으리라 믿는 음악들뿐이었다.

하지만 모두 내 착각이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것들이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었고, 난 오늘 그걸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촛불은 일렁이다가, 꺼졌다. 전부 세상에 드러날 수 없도록 굳혀서 깊은 곳에 파묻었다.

이젠 헛수고하지 말고 올바른 길을 따라가야 했다. 몇 번이나 다짐했으니 이젠 정말 지켜야 할 때다.

하지만 모든 게 생각처럼 잘 정리되진 않았다.

추할 정도로 할 만큼 해 봤으니 이젠 깔끔하게 모든 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데, 겉으로 단호한 만큼 반동이 솟구쳐선 목과 가슴 그 중간 어느 부분을 두들겼다.

잇달아 파고드는 어두운 감정들이 마음을 새카맣게 물들여 갔다. 엉망진창이다.

갑자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얗고 마른손을 내려다보니 문득 이 손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주먹을 꾹 쥐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내려놓은 미련만큼이나 새로 생긴 미련도 많았다. 남겨진 것들, 내겐 지켜야 할 것들이 한 가득 있었다.

바로 곁에 계신 구세프 선생님도 그중 하나였다.

“선생님.”

난 조용히 선생님을 불렀다.

“절 가르치시는 것…… 이제 그만두실 건가요.”

구세프 선생님은 흠칫하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미 겨울에 접어들면서 선생님은 내 레슨을 조금씩 줄여 나가고 있었다.

난 이 견고하고 강경한 선생님과 가까워지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조금씩 알 수 있었다. 나와 한 약속을 마무리 짓는 것으로 불안과 조급함을 정리해 주고 나면 자신의 역할은 끝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

하지만 지금 선생님의 눈엔 분명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처럼.

가습기가 돌아가는 약한 소리만이 들렸다. 나도 선생님도 침묵 속에서 시선으로만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았다.

결국 서로 같은 걸 느낀다는 걸 확신했을 즈음, 구세프 선생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삐뚜름한 미소가 거기에 맺혀 있었다.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타티아나. 지금 네가 여기 누워 있는 게 전부 네 탓이라 생각하나?”

“……그렇지 않나요?”

“아니다.”

까불지 말라는 듯, 선생님이 말했다.

“하나부터 끝까지 전부 내 잘못이다.”

당황해서 눈만 깜빡이고 있자 선생님이 팔짱을 끼며 턱을 당겼다.

“내 학생의 컨디션도 제대로 못 헤아렸고, 믿을 수 있는 선생처럼 보이지도 못했고, 원하는 곡을 연주할 수 있도록 가르치지도 못했지.”

“아니에요, 선생님. 그건…….”

“그러니까 이건 내 실수고, 내 잘못으로 넌 여기에 누워 있는 게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이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다.

연주자가 곡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한 걸 다른 누군가가 책임져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건 온전히 내 책임이었고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선생님은 더더욱 단호하게 내 잘못과 실패를 지적하셨어야 했다.

하지만 그리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책임을 나눠 가져가려 했다.

“……제 문제라는 거 아시잖아요.”

난 내가 여기서 나약하게 굴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인상을 팍 썼다.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

“아깐 제게 감정이 좋지 않다고 하셨으면서…….”

“시끄럽다고 했다.”

한 마디도 더 허락하지 않으실 모양이다. 선생님은 거의 억지로 내 말문을 틀어막았다. 입을 다물고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강압적인 태도였지만, 지금 보이는 건 선생님의 약한 모습이었다. 난 그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가슴 아프면서도, 감사하다.

“아무튼, 난 네 레슨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 난 그렇게 책임감 없는 선생이 아니다.”

구세프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다가 말고 문득 내 시선을 살피듯 바라보다가, 심술궂게 덧붙였다.

“물론 네가 내게 배우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미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아시면서 묻는 질문이다. 난 계속 느껴 왔던 바를 있는 그대로 말했다.

“전 가능하다면 졸업하지 않고 계속 배우고 싶어요. 계속이요.”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는군, 또.”

선생님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난 진심이었다.

이미 피아노는 내 삶에 너무 깊게 파고들어 있다. 학교, 친구들, 가족들.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의미 있게 다가가기 위해선 계속해서 연주자로서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한다.

내 운명이 어디까지 허락할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결정으로 피아노를 그만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젠 피아노를 치려면 이 몸으로 익힌 그녀의 노랫소리를 연주해야만 했다.

아직 난 완전하게 그 모든 소리를 체득했다고 할 수 없었고, 배우고 훈련해야 할 부분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 모든 걸 다시 차곡차곡 탑으로 쌓아올려야 했다.

그런 내게 있어 구세프 선생님의 도움은 필수적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니 선생님이 손을 내저었다.

“어쨌든……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쉬어라. 옆에 있을 테니.”

“…….”

구세프 선생님은 내가 괜찮은 것을 확인하시고도 날 홀로 두지 않고 곁에 남아 주셨다.

난 이만 가셔도 된다고 말하지 못했다. 작은 초를 꺼버린 내겐 빛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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