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4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구세프 선생님을 사사하면서 사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지만, 그때도 항상 선생님과 나 사이엔 피아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선생님이 계셔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이렇게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어색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타티아나.”
그런데 구세프 선생님은 스마트폰으로 무언가 툭툭 쓰더니 내게 물었다.
“링거는 다시 맞지 그러냐.”
“…….”
내가 맞고 있던 링거는 대충 옆에 늘어져 있었다.
쓰러졌다가 일어난 지도 얼마 안 되었고, 제대로 나으려면 저걸 다 맞는 게 옳겠지만…… 도저히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가만히 고개만 도리질했더니 구세프 선생님이 피식 웃었다.
“바늘이 무서운 게냐?”
“……예.”
혈관에 파고드는 바늘을 상상하기만 해도 기분이 오싹해진다. 이 느낌은 사실 두려움이랑은 조금 다른 것 같았지만, 달리 설명할 방법도 없었다. 난 대충 수긍했다.
“……그럴 수도 있지.”
선생님은 날 엄하게 야단치거나 간호사를 부르는 대신 그냥 고개를 주억이며 의자에 허리를 묻었다.
난 평소와 다르게 태도가 물렁해지신 구세프 선생님을 보며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한 건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쓰러질 땐 쓰러지더라도 차에 오른 다음에 쓰러졌어야 했는데.
“…….”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다가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정말 놀라고, 걱정해 주시는 분을 옆에 두고 나는 아직도 이기적이고 못난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구나.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진다.
이젠 정말 잘해야 하는데…… 대체 뭘 하는 걸까.
“타티아나. 미하일이 올 게다.”
“……!”
멍청하게 누워 있는데 구세프 선생님이 문득 그런 말을 했다. 난 깜짝 놀라 머리를 들어 올렸다가, 힘없이 다시 베개 위로 떨어뜨렸다.
구세프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다가 쓰러졌는데 내 지도 선생님에게 연락이 가지 않을 리 없었다.
미하일 선생님의 얼굴은 어떻게 봐야 하지? 날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허락해 주셨는데 이렇게 쓰러진 걸 보시면 무어라 하실지 모르겠다.
“어떡하죠……?”
중얼거렸더니 구세프 선생님은 눈썹을 찡그렸다.
“미하일은 무섭나?”
“…….”
미하일 선생님이 내게 실망했다는 듯 말씀하신다면 정말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이미 저번 실기 시험 때 만족스럽지 못한 연주로 실망시켜 드렸을 텐데, 그 결과가 이 모양이라니……. 절망적이다.
억지로라도 앉아 있어야 하나 싶어 꿈틀거리고 있는데, 미처 어떻게 하기도 전에 병실 문이 열렸다.
“…….”
난 숨죽이며 기다렸다. 잘 보이지 않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형체를 갖추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살짝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며 날 내려다보았다. 난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태라서 꽁꽁 얼어붙어 있기만 했다. 지금 도망치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만이 날 가만히 있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몸은 어떻니, 타티아나.”
농담으로라도 안 좋다고 할 순 없었다. 난 슬쩍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지금은 괜찮아요.”
“다행이구나. 그렇다면 기분은 어떻고.”
“…….”
가볍게 안부를 묻는 말이었으나, 정말 많은 고민을 하신 끝에 나온 말이라는 것이 곧바로 느껴졌다.
혀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냥 가볍게 좋다고 대답하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곧 내 깊숙한 곳에서,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끌어 냈다.
“분해요…….”
난 양손을 꽉 모아 쥐며 대답했다. 손도 목소리도 바들바들 떨렸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순식간에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난 조금 더 이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뱉어 내고 싶어져서 막 입을 열다가, 도로 다물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대체 왜 짜증을 내고 억울함을 느끼는 거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막 뜨겁게 달구어졌던 머리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죄송, 죄송해요.”
“아니란다. 그만큼 열심히 했으면 분할 만도 하지.”
“더 열심히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다시 나도 모르게 멋대로 입이 움직이려 한다. 난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말하지 않을게요.”
“말하는 게 편할 수도 있단다. 타티아나.”
“모두 변명이에요. 변명은 하지 않고 싶어요.”
내가 내 입으로 직접 말해서 결정지은 것은 구세프 선생님 앞에서 말한 것으로 충분했다. 그 외엔 그 어떤 말도 해선 안 된다. 난 더 나약해지진 않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하일 선생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선생님?”
“아, 미안하구나. 갑자기 너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서 말이다.”
그때라면 나도 기억하고 있다.
기본기가 자리 잡지 못해서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는 손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었지. 그리고 난 그때도 억울하다고 생각하거나 누군가에게 변명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연주했을 뿐.
미하일 선생님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을 이었다.
“네 그런 올곧은 태도를 보고 데리고 오긴 했지만…… 정말 바뀌지 않았구나. 타티아나.”
그 말은 감탄처럼 들리기도 했고, 약간은 한탄처럼 들리기도 했다.
선생님이 보기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키도 하나도 안 컸고, 고집대로 하다가 결국 쓰러지기나 하고…… 예전과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정말 많이.
“몇 번이나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이젠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며칠 쉬면…… 나아지겠죠. 건강해져서 돌아갈게요.”
이미 구세프 선생님 앞에서 한 번 말한 덕분인지, 두 번째는 조금 더 쉬웠다. 세 번째는 더 쉬울 테고 네 번째쯤 반복할 때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나 스스로를 납득시켜 갈 수 있겠지.
합리, 타협, 관성 같은 것들이 스며든다. 난 내가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지만 좋은 방향인지 나쁜 방향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좋은 방향이라 믿을 뿐이다.
미하일 선생님은 걸터앉은 그대로 잠시 날 바라보시더니, 차분히 말씀하셨다.
“나드리브를 경계하라고 조언하긴 했지만…… 그래서 정말 괜찮겠니. 타티아나.”
선생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들과 지금까지 어렵게 해 왔던 레슨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스로 매듭을 짓는 일까지 모두 한꺼번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정말 괜찮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바라던 연주를 제대로 해냈더라도 결과를 마주하고 나면 평소처럼 돌아가기로 했으니까. 내가 생각만 멈추고 눈만 꾹 감는다면 별반 다를 것 없다.
“괜찮아질게요.”
“…….”
미하일 선생님은 내 말에 무어라 대답하려 하셨지만, 결국 한 손만 허공에 휘휘 젓고는 축 늘어뜨렸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미안함을 담고 내게 향했다.
“난 정말 하나도 네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구나.”
“예?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
난 고개를 저으며 바로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말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가 보라 하신 것도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데요…….”
“뭘 봤었지?”
“그……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과…… 겨울나무 위에 까마귀들이 앉은 작품이랑…….”
사실 다녀오자마자 미하일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그날 리처드에게 워낙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몸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기도 해서 적당한 때를 찾지 못했었다.
난 늦게나마 미술관에서 본 것들이 큰 도움이 되었음을 이야기하다가, 보지 못해서 더더욱 미련으로 남았던 한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
“그런데……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의 작품은 보지 못했어요.”
“아, 혹시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예.”
“그래…… 그 작품은 취객이 망가뜨렸다고 했었지.”
미하일 선생님도 씁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 씁쓸함을 넘어 허무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 일련의 사태는 예술에 대해 약간 교조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던 내게 상당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난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꺼내놓았다.
“그렇게 영원히 보존되어야 함이 마땅해 보이는 훌륭한 작품도 쉽게 훼손되어서 사라졌는데, 그보다 못한 것들이 쉽게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 선생님.”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고 싶어졌는진 모르겠다. 어떠한 섭리에 대한 깨달음을 확인받고 싶은 걸까. 하지만 이건 내 마음속의 변명이 새어 나온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난 후회하며 내 무릎 부근을 노려보았다. 경계하고 있지 않으면 난 이렇게 실수를 하곤 한다. 화가 났다.
그렇지만 미하일 선생님은 내 말에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살짝 고개를 비틀며 말씀하셨다.
“그게 왜 사라졌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구나. 다시 걸어 두기 위해 복원중인데.”
“복원한다 한들…… 같은 작품이 아니잖아요.”
“……무슨 소리지?”
“일리야 예피모비치가 그린 완벽한 작품이 아니게 되잖아요.”
어쩔 수 없이 질문에 대답하지만 계속해서 후회만 쌓여 간다.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입 다무는 게 낫지 않을…….
“푸하하하, 하하.”
“……?”
그런데 미하일 선생님이 한 번 더 웃음을 터뜨렸다. 난 내게 선생님을 웃기는 재능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심지어 이런 병실에서.
멀거니 바라보니 미하일 선생님이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로…… 완고한 말은 또 오랜만에 듣는구나.”
“완고하지 않아요. 그저 당연한…….”
“타티아나.”
미하일 선생님은 내가 더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서로 토론을 할 주제가 아니라,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살짝 고쳐 주시려는 모습이었다.
어느새 레슨실 같은 분위기가 되어 버린 병실에서, 미하일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명료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술의 형태가 덧씌워지면서 갱신되는 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란다.”
“……예?”
내가 반문하자 선생님이 창밖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세계에서 제일 거대한 그리스도 구세주 대성당도 완전히 무너뜨렸다가 도로 말끔히 복원해서 지켜 나가는 세상인데, 그림의 찢어진 부분을 보수한다고 해서 그 위대한 작품이 지닌 의미가 얼마나 훼손되겠니?”
“감쪽같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 자세히 보면…….”
“그건 이제 정통성의 문제겠지. 그 부분만 보면 네 말대로 훼손되었다고 할 수 있겠구나.”
복원한 예술품은 완전히 같지 않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선생님이 예로 든 그리스도 구세주 대성당은 본래 19세기 건물이었으나 스탈린이 정교회를 탄압하면서 전부 철거해 버렸고 이후 2000년이 다 되어서야 다시 지은 건물이었다.
분명 똑같이 짓긴 했지만, 누가 이 건물에 역사적 정통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타티아나, 남겨진 작품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감동은 정통성에서 오는 게 아니란다.”
그 말을 듣고, 난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리스도 구세주 대성당을 봤을 때 전율을 느낄 정도로 감동했었던 게 떠오른 까닭이었다. 황금색 지붕과 흰 대리석으로 된 벽면의 조화가 이루는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이 성당이 모스크바의 자랑 중 하나이기에 전혀 모자람 없었다.
거기엔 다시 지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똑같지 않다는 진실도 전혀 상관없었다.
“…….”
이미 전부 알고 있던 사실들인데도, 미하일 선생님에게 이렇게 들으니 갑자기 머리가 아플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헛공부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왜 나는 이런 간단한 이야기에도 똑바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거지?
내가 침묵하고 있자 미하일 선생님은 약간 더 부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는지 옆에 잠자코 계시던 구세프 선생님을 불렀다.
“여기 구세프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바흐의 전문가지.”
구세프 선생님이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미하일 선생님은 아랑곳 않고 웃으며 물었다.
“자, 구세프. 자네가 바흐의 정통성을 얼마나 재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그 말에 구세프 선생님은 코웃음 치며 명쾌하게 대답했다.
“전혀.”
난 그 프라이드 높은 구세프 선생님이 이런 대답을 하셨다는 것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구세프 선생님은 왜 그런 눈으로 보냐는 듯 도끼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