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5화
구세프 선생님이 바흐 음악의 스페셜리스트다. 내가 선생님에게 바흐를 배워 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수많은 평론가들이 세계적인 바흐 스페셜리스트 중 한 명으로 구세프 선생님의 이름을 언급하고, 또 그 음반을 수많은 연주자들이 레퍼런스로 활용해서다.
수백 년에 걸쳐 다른 음악가들이 그러했듯, 바흐를 영생케 만드는 굉장히 중요한 음악가 중 한 분인 것이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자신 있게 고개를 저었다.
미하일 선생님이 장난스레 웃으며 물었다.
“하나도 말인가?”
“일단 피아노로는 불가능해. 하프시코드가 아니잖나.”
정론이었다. 당시 하프시코드로 작곡되고 연주된 바흐의 음악들은 피아노로는 아무리 잘 연주하더라도 제대로 재현해 냈다고 할 수 없었다. 때문에 현대에도 원전 연주를 중요시하는 연주자들은 하프시코드로 고전 음악가들의 곡들을 연주한다.
그렇게 따진다면 구세프 선생님의 음악에서 바흐의 정통성 같은 걸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선생님은 한술 더 떴다.
“그리고 바흐의 복원된 곡들은 템포나 지시 등이 불확실하고 녹음본은 당연히 없으니 레퍼런스가 모호하지. 난 그저 수많은 해석들 중 하나를 가지고 있을 뿐이야.”
“그런 자네의 그 해석이 주는 감동은 요즈음 레퍼런스 취급 받고 있지 않나?”
“제대로 이해한 놈들은 없는 것 같던데.”
신랄하게 그렇게 말씀하시던 구세프 선생님은 문득 날 돌아보더니 덧붙였다.
“몇 명은 빼고 말이다.”
내가 구세프라는 세계적 연주자의 음악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분명히 선생님의 음악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과, 나도 저렇게 연주하고 싶다는 들끓는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
두통은 가라앉지 않고 계속되었다.
평소 구세프 선생님은 악보라는 확실한 근거에 의거한 연주가 아니면 전부 몹쓸 연주라고 평하는 깐깐한 연주자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바흐의 음악을 하프시코드가 아닌 피아노로 연주하고 있다.
일종의 타협이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걸까.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미하일 선생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타티아나. 중요한 건 형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 이해하겠니.”
“하지만 형태가 없으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어요. 연주자들은 그 형태를 만들어 가야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요? 콜록, 그……그리고 일리야 예피모비치나 바흐의 작품들은 어떤 형태를 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대단한 작품들이잖아요?”
일단 생각나는 것들을 약간 정돈되지 않은 채로 두서없이 이야기했더니 이번엔 구세프 선생님이 대답해 주었다.
“네 말대로다. 바흐의 음악은 구조적으로 완벽해서 사실 현악기로 연주해도 그 음악성이 크게 훼손되진 않을 게다.”
이미 구조적으로 완벽한 음악은 어떻게 해도 흔들기 어렵다. 그건 궁금해하고 있던 것에 대한 간접적인 대답이기도 했다.
그런데 바흐처럼 위대한 작곡가의 작품이라면 그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즈음, 구세프 선생님이 살짝 이야기를 덧붙였다.
“하지만 타티아나. 굳이 바흐까지 가지 않아도 예술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
“언제나 여기에 박혀 있다가 어느 순간 튀어나오곤 하지.”
선생님은 엄지손가락으로 가슴 부근을 쿡 찌르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난 그게 튀어나올 때 그야말로 살을 찢는 것 같은 고통을 동반한다는 건 왜 말씀해 주시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었다.
“어렵네요.”
난 순간적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끼곤,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강하게 찍어 누르며 그저 그렇게 중얼거렸다.
두 선생님들과 대화는 그 이상 없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내게 계속해서 떠들지 말고 얌전히 누워서 잠이나 자라고 했다. 나와 이야기하기 싫은 게 아니라, 쓰러진 지 얼마 안 된 환자니까 쉬면서 안정을 찾으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곱게 잠이 올 리 없었다.
시력에 이상이 올 정도로 몸에 문제가 있었고, 극도로 피곤하기도 했지만 난 몸이 말을 안 들을수록 거기에 딸려 들어가지 않고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며 버티려 하는, 습관 아닌 습관이 있었다.
이젠 그만 고집부리지 말고 자는 게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일이겠지만 지금까지 해 왔던 게 있어서 그런지 좀처럼 잠드는 게 쉽지가 않다.
그리고 곁에 있는 선생님들도 신경이 쓰였다. 자리를 뜨지 않고 계시는 분들을 두고 팔자 좋게 자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난 이런저런 이유로 창밖만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렇게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음과 함께 검은 슈트의 남자들이 들어섰다.
잘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버지가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올 것이 왔구나.
“타티아나.”
건강에 유의하지 않았다고 아버지에게 혼이 나는 건 각오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병실에서 마주하니 죄책감이 무겁게 마음을 짓눌러 온다.
내겐 아프지 않아야 할 의무도 있었다. 연주자로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몸을 혹사시킬 필요가 있어서 그간 멋대로 행동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쓰러져 버린 건 정말 큰 잘못이었다.
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저번 여름을 떠올렸다.
음반을 녹음하면서 밤을 지새워 연주하고 결국 쓰러진 다음 내가 했던 건 자체적인 외출 금지였다.
이번엔 뭘 해야 할까.
“아버지…….”
“유리 알렉세예비치. 이런 일로 다시 뵙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구세프 선생님이 일어섰다. 그러고는 아버지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내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듣고 오셨는지 조용히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사실 그리 길게 설명할 것도 없었다. 레슨을 받고 나서 쓰러진 게 전부였다.
하지만 설명에서 그치지 않고 구세프 선생님은 말을 이어 나갔다.
“모두 제 책임입니다. 타티아나가 쉬지도 못하게 방학에도 매일같이 불러내어 레슨을 하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 어떻게 사죄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난 깜짝 놀라다 못해 거의 기겁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 선생님의 책임이라 말씀하시긴 했지만, 이렇게 말씀하실 줄은 미처 몰랐다.
“…….”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선생님이 바라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면 정말 전부 선생님이 잘못하신 게 된다. 그런 건 싫었다.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 레슨을 조른 것도,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데도 억지를 쓴 것도 제 쪽이었어요.”
내가 끼어들자 구세프 선생님은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듯 낮게 말했다.
“설령 그렇다 한들 적절히 레슨을 조절하는 게 내 일이었다.”
“전 선생님이 당연히 그리하실 거라 생각해서 괜찮은 척하며 선생님을 속였어요. 제일 나쁘고 미련한 행동이었죠. 그렇지 않나요?”
“……모두 내 책임이라는 이야기 아까 충분히 했었고 잘 알아들은 것 같았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타티아나?”
“이건 옳지 않아요. 구세프 선생님.”
나와 선생님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구세프 선생님이 모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계시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아버지가 선생님에게 책임을 추궁한다면 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바보짓은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었다.
평소엔 절대 하지 못할 기 싸움을 그렇게 하다가,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음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
아버지가 조용히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꿈쩍 않고 계신데도 거대한 압력이 느껴졌다. 난 얼른 입을 다물었다.
순간 아버지가 미소를 보인 것 같았다. 착각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는데, 아버지가 말했다.
“타티아나. 난 네 성격을 알지.”
“……예?”
“구세프 선생이 저리 말한다 해서 내가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줄 알았느냐?”
어차피 내가 고집을 부렸다는 것 정도는 이미 꿰뚫어 보신 지 오래인 것 같다. 난 뜨끔해서 입을 꾹 닫고 살짝 시선을 피했다.
아버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시선을 다시 되돌려놓았다.
“열심히 한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네 훌륭한 선생님들을 너무 걱정시키진 말거라.”
“명심할게요…….”
아버지는 바쁜 와중에도 내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는 수행원분들을 이끌고 오셨지만, 사실 날 질책하거나 하실 생각은 별로 없으셨던 것처럼 보였다. 그냥 괜찮은지 확인한 것으로 만족하신 것 같다.
병실을 한 번 쭉 둘러본 아버지가 말했다.
“지금은 괜찮아 보여 다행이구나. 그래…… 개학 때까진 여기서 간호를 받으며 푹 쉬거라. 무언가 불편한 것이 있다면 말하고. 내가 조치를 취해 줄 테니.”
그 말을 듣고서야 난 지금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래.”
“저……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
조심스레 말하자 아버지는 가만 날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왜지.”
호화로운 1인실 병실. 망가진 몸을 조금이라도 빠르게 회복시키려면 최고의 장소다. 그렇지만 난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지금은 선생님들이 계셔 주셔서 잡생각이 파고들 틈이 없다. 하지만 하루 종일 계실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언젠가 나 혼자 남게 될 텐데, 이 새하얀 병실에 혼자 남을 자신이 없다.
난 책도 피아노도 없는 병실에서 미치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제한되어 있었다. 난 뭔가 그럴싸한 이유도 대지 못했다.
아버지는 얼마나 기가 막힐까. 어이가 없을 정도로 무리를 한 끝에 쓰러졌고, 기껏 좋은 병실에 입원시켰더니 몇 시간도 못 버티고 나가고 싶다고 하고. 나라면 벌컥 화를 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유를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자꾸나.”
그 한마디에서 난 깊은 이해심을 느꼈다.
***
타티아나의 퇴원 수속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의사가 마지막으로 간단한 검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진단명은 단순했다. 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
큰 병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겨우 열여섯 살짜리가 과로와 스트레스로 쓰러졌다는 건 사실 병보다 더 심각한 일일지도 모른다.
구세프는 유리와 타티아나가 탄 검은 차량과 경호 차량까지 줄지어 병원을 떠나는 것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다가 담배를 빼물었다. 이상하게 담배도 하나도 맛이 없었다.
잠시 그렇게 서성이고 있자니 미하일이 다가왔다. 구세프는 담배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곤 말했다.
“미안하네, 미하일. 우려했던 일이 터져 버렸군. 내가 그 애를 적절히 막아섰어야 했는데.”
“아닐세.”
이렇게 쓰러질 정도로 매달릴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때문에 타티아나와 한 약속을 이행하는 것을 주저하기도 했었지만, 결국 음악을 사이에 두면 타티아나도 구세프도 설렁설렁하진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정이 어쨌건 미하일은 불과 얼마 전 제자를 잃었던 사람이다. 구세프는 그런 그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한 것에 대해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구세프는 정말 지금이야말로 타티아나에게서 손을 떼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다가도, 혹시 그만둘 거냐며 애처롭게 바라보던 눈빛을 떠올리면 도저히 그럴 수도 없었다. 이미 약속도 해 버렸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무슨 말을 해도 뻔뻔하게 들릴 것 같아서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미하일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잖나?”
“무슨 소릴……. 난 없네.”
“없기는.”
미하일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손가락을 흔들었다.
“금방이라도 손에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곡이 사실은 결코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죽고 싶을 정도의 절망감과 분함을 느끼지 않아 본 연주자가 어디 있다고.”
“…….”
당연히 구세프도 겪어 본 일이었다.
세상엔 먼저 간 사람들이 남긴 수많은 음악들이 있지만, 그 모든 걸 전부 소화해 낼 수 있는 연주자는 없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으면 손이 따라주지 않고, 손이 따라 주면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곡들이 세상엔 정말 많았다. 연주자들은 자신에게 맞는 곡들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했다.
맞지 않는 곡들을 현명하게 대하는 것도 중요했고.
“가볍게 볼 일은 아니야. 미하일.”
하지만 가끔은 타티아나처럼 요령 없이 올곧게 손을 내밀었다가 새파랗게 날이 선 칼날에 피투성이가 되는 연주자들도 있다.
구세프는 상황을 꽤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난 타티아나가 이 정도로 체념한 걸 본 적이 없어. 어지간해선 자네 말처럼 누구나 겪는 거니까 알아서 이겨 내도록 내버려 두면 될 일이지만…… 난 그 애가 뭘 얼마나 했는지 옆에서 직접 지켜본 사람이잖나.”
도저히 맞지 않는 곡을 가슴에 품고 1년도 넘게 기다렸고, 실력을 한층 더 쌓아올린 후 이제야 무언가 해 보려는데, 결국 정신적인 문제인지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무리가 와 쓰러져 버렸다.
“그 애가 어떤 기분인지 상상도 못 하겠군.”
이런 일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타티아나는 지워 버리려고 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 상흔으로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이런 일은 앞으로 연주자로 활동하는 데에도 문제를 주는 일이 많다. 구세프는 트라우마처럼 남은 곡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잘 알고 있다.
구세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피아노의 신을 저주해도 모자랄 와중에도 완고하게 모범생 같은 소리나 하고…….”
타티아나는 강인하게 행동하지만, 그건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이번에도 타티아나는 어리니까 조금 더 나중에 도전해 보겠다며 변명하거나 회피하는 대신 단호하게 미련을 끊어 버리는 쪽을 택했다. 그 모습은 조금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꾸 걱정은 되는데 뭘 어떻게 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구세프는 막연한 짜증을 느꼈다.
그런데 미하일은 담담하게 말할 뿐이었다.
“피아노의 신을 저주해서 될 일은 없다는 걸 그 애도 아는 거겠지.”
미하일은 종종 구세프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감각적으로 느끼곤 했다. 구세프는 그 부분들을 존중하지만, 지금은 신경질적인 반응이 먼저 툭 튀어나왔다.
“그럼 기도라도 해야 했나? 숭배하고?”
“아니.”
비아냥거림에 대응하지 않고 미하일은 타티아나가 가 버린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난 그 애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네.”
“…….”
구세프는 다시 한 번 짜증스럽게 대꾸하려다가 진지하게 굳어 있는 미하일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