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36화 (436/1,277)

##  436화

집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바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전권을 받은 집사장 예고르가 전적으로 날 케어했다. 의사가 저택에 상주하며 시간별로 내 식단과 상태를 체크했고, 나제즈다를 비롯한 고용인 분들도 내게 엄청 신경을 쏟았다.

예고르에게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저번 여름 단기적인 피로로 쓰러지긴 것과 지금은 다릅니다. 빅토르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시력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안과에 갔다 왔다는 것까지 파악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쓰러진 시점에서 빅토르는 오늘 내가 무엇을 했는지 전부 털어놓아야 했을 테니까.

그나저나, 그에겐 항상 미안한 일뿐이다. 내가 이렇게 쓰러지면 날 수행하는 빅토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늘 제멋대로 굴기나 하고……. 빅토르를 보면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모르겠다.

입을 꾹 다문 날 보던 예고르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빅토르에게 책임을 묻거나 하진 않았으니 그런 표정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씨.”

“……!”

“그렇다고 그렇게 좋아하실 일도 아니고.”

“…….”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꾸물거리자 예고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엄격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유리 님께선 아직 모르십니다. 알려야 마땅한 일이지만 아가씨께선 그걸 바라지 않으시는 것 같고…….”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난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시력에 문제가 생긴 건 병 같은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마음먹고 해결하고자 한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가깝다. 여러 사람을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예고르는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으로 날 보더니 이윽고 마음을 정했는지 조용히 말했다.

“의사도 일시적인 현상일 것 같다고 하니 며칠간은 지켜보겠습니다. 하지만 딱 며칠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

예고르도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내가 곤란해하든 말든 그냥 아버지에게 있는 그대로 보고하는 게 그로서는 마음 편했을 텐데, 일부러 이렇게 내게 기회를 주고 있다.

그는 다시 한 번 내 방의 온도를 체크하고는 나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빨리 나으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난 다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고르가 나가고, 난 곧장 침대 위에 다시 누웠다.

바짝 곤두세운 신경이 지쳐서 조금 가라앉을 만하면 또 다른 생각이 불쑥 끼어들어서 다시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곤 했지만, 난 억지로 눈을 감고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하려 애썼다.

***

좀처럼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것과 정반대로, 막상 일어나서 활동하고 싶을 땐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일단 눈앞이 여전히 흐릿했다. 쇼팽의 소나타도 이제 칠 일 없을 테니, 가만 쉬면 저절로 나아지리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단순하진 않았다.

스마트폰이나 책을 보기 위해 집중하면 그래도 초점이 돌아오긴 했다. 하지만 잠시만 집중을 흐트러뜨리면 바로 제대로 볼 수 없었고, 금방 머리가 멍해져서 제대로 무언가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도 이따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거나 숨이 답답해지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다.

난 무언가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멍하니 누워 있거나 예고르가 준비한 스케줄에 따라 의사를 만나기도 했다.

식사는 되도록 식당에 가서 가족들과 하고 싶었지만, 별생각 없이 그렇게 하려다가 복도에서 한 번 넘어질 뻔하고는 나제즈다가 가져다주는 카샤로만 식사했다.

“…….”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니 위기감이 들었다.

당장 이틀 후면 개학이다.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난 지금 몸이 왜 이렇게까지 악화되었는지 그 원인을 안다. 그리고 음악으로 망가진 건 음악으로 회복시켜야 했다. 재작년 겨울에도 그랬으니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땐 어떻게 했었더라.

“…….”

일단 노래를 다시 해봐 야 할 것 같다.

쇼팽의 소나타에 매달려야 했던 망령의 음악이 아닌, 이 목이 낼 수 있는 본연의 목소리가 필요했다.

“음…….”

일단 목표를 하나 꺼내 들어 앞에 놓으니 발을 내딛기 쉬워졌다.

난 지금까지 종종 불러왔던 가곡들을 쭉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성악과의 폴리나 선생님에게 레슨 받았던 내용들, 혼자 연습하면서 체득했던 노하우 등을 떠올린다.

요 몇 주간 전혀 신경 쓰지 않아서 그런지 어떻게 했었는지 느낌이 잘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입을 열어 보았다.

“아아.”

말이 아닌 음악으로 내놓는 내 목소리는 약간 어색하게 들렸다. 난 신경 쓰지 않고 기본음인 C4부터 천천히 음을 올려가며 목소리를 냈다.

딱 한 번 음계를 불러 보았을 뿐이지만 충분했다. 자전거 타는 법을 한 번 익혀 놓으면 한참 동안 타지 않아도 잠깐 연습하는 것만으로도 감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난 금세 익숙해질 수 있었다.

조금 더 용기를 얻은 나는 막 생각나는 가곡들을 흥얼거리기도 했다.

아픔도 버거움도 없었다. 난 편안하게 노래할 수 있었다.

다른 목소리는 낼 수 없었다.

“아…….”

결국 이것뿐인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음악에 쏟아붓고 있던 집중이 깨졌다. 목이 콱 졸리면서 머리에 새카만 먹물이 부어진 느낌이었다. 급속도로 기분이 안 좋아졌다.

갑자기 노래도, 음악도 다 싫어지려 한다.

난 살면서 처음으로 그런 감정을 느꼈고, 곧 그것은 소름이 돋을 정도의 공포로 다가왔다.

“아니…….”

팔이 덜덜 떨렸다. 난 옆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가, 양손으로 내 뺨을 툭 쳤다.

괜히 이상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은 명료하다. 이 노래를 쥐고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 위에 풀어 놓으면 된다. 난 이기적으로 굴지 않을 이유가 있었고, 그렇게 한다면 모든 게 자연스러워질 테지.

“아가씨.”

때마침 나제즈다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난 일부러 창밖을 보고 있었던 것처럼 돌아서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필요하신 것 없으신가 해서 왔어요. 그런데…… 노래하고 계셨어요?”

“들렸나요?”

“그래서 잠깐 기다렸죠.”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내가 고개를 돌리고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자 나제즈다는 싱긋 웃으며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듣기 좋았는데…… 중간에 가사를 까먹으셨나 봐요?”

노래를 하다 만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다행이다. 난 고개를 끄덕여 답하곤 마주 웃어 주었다.

나제즈다는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내게 이것저것 질문했다. 몸은 괜찮은지, 간식이나 차가 필요하진 않은지 등등 어떻게든 내게 도움이 되어 주려 했다.

난 그런 것들이 필요하진 않았지만, 나제즈다에게 부탁할 건 있었다.

“나제즈다.”

“예. 말씀하세요.”

“저 연습실에 가고 싶어요.”

아직도 기분이 엉망이었지만, 난 이럴수록 더더욱 뒷걸음질 치면 안 된다는 의무감 또한 느끼고 있었다. 오늘 피아노 앞에 앉아서 분명하게 정리를 해야만 했다.

나제즈다는 내가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는지 조곤조곤한 어조로 날 설득했다.

“아가씨가 피아노 연습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진 잘 알지만…… 적어도 오늘까지만이라도 쉬시는 게 어떠세요? 아까도 체력이 제대로 다 돌아오지 않으신 것 같았는데…….”

“연습을 할 건 아니에요. 그냥…… 해야 할 것이 있어서요.”

“……연습이 아니라고요?”

“예.”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대답했는데도 나제즈다는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묻지 않고 내 옆에서 일어났다.

“그럼 괜찮겠죠. 알았어요, 도와 드릴게요.”

“고마워요. 나제즈다.”

난 그녀의 도움을 약간 받아 겨울옷을 걸쳤다.

천천히 신경 써서 움직인다면 혼자서도 할 수 있었지만 이미 한 번 쓰러졌는데도 또 혼자서 움직이다가 만에 모를 문제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나제즈다에게 이렇게 도움을 청한다면 그녀가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할 것 같았고.

그렇다고 부축을 받고 싶은 건 아니어서 최대한 비틀거리거나 이상하게 보이지 않게 집중해서 걸었다. 나제즈다는 조용히 내 뒤를 따라왔다.

그렇게 별관에 도착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

검은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난 어떤 머리 아픈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이 연습실에 와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저기에 앉으면 어떤 상황에서든 거리낌 없이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쉽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아까 노래를 하면서 느꼈던 무언가가 내 발뒤꿈치를 붙잡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럴 거야? 이젠 지친다고 나도.

오기로 발을 떼어 앞으로 향했다. 도망칠 이유가 전혀 없다.

난 피아노 앞까지 가선 건반 덮개를 열고 의자에 앉았다.

“타티아나 아가씨, 연습은 안 하신다고…….”

“잠깐이면 되어요.”

나제즈다가 내 옆까지 다가왔다. 난 그녀를 잠깐 올려다보고는 다시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문득, 너무 멀리 가진 말아 달란 리처드의 말이 생각났다.

그 말은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말란 말과도 같았다.

난 이미 충분히 깊은 곳까지 내려왔을지도 모르겠다. 수면은 아득하게 멀다. 수온은 너무 차갑고 수압은 너무 강하다.

이제 올라가야 할 때였다.

흰 건반 위에 손을 올리고 살짝 만져 보다가, 난 방금 불렀던 노래를 천천히 떠올리며 건반을 눌렀다.

“…….”

수없이 연구했었던 음색이 피아노에서 흘러나왔다.

첫 음을 치자마자 그 소리가 내 몸에 파고들어서 저릿거리던 곳곳에 달라붙었다. 난 의심의 여지없이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제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음을 몇 개 쳐 나가면서 시시각각 모든 게 호전됨을 느꼈다. 온몸을 짓누르던 압력이 언제 그랬냐는 듯 느슨해졌다.

손끝이 아니라 긴 나무젓가락을 쥐고 멀찍이에서 건반을 때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둔해졌던 감각도 점점 가까워지며 손끝으로 향했고, 난 조금 더 섬세하게 건반을 누를 수 있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터치를 받은 피아노는 제대로 된 소리를 내 주었다.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불과 어제만 해도 쇼팽의 소나타를 연주하면서 건반을 한 번 누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분해되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었는데, 모든 게 마치 거짓말 같다.

이를 악물고 무언가 참을 필요도 없었고, 악착같이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그저 자연스럽다.

허락받은 음악은 이렇게 쉬웠던가.

“……아.”

오른손만으로 멜로디를 이어나가고 있을 뿐인데도 난 상황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단순히 감각만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봐도 이 음악이 옳다. 음악을 행하고, 듣는 연주자로서 나는 지금 들리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머릿속이 울렁거렸다.

“아가씨?”

“예……?”

난 나제즈다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가, 그제야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을 멈추고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갑자기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쉽게 멎지 않았다.

답을 찾았다는 기쁨으로?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어둡고 깊게 가라앉은 무언가가 바닥을 기며 날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손가락으로 그걸 집어 들고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릴 것 같아 그만두었다.

미하일 선생님이 말했던 나드리브가 내 코앞까지 와 있었다는 걸 직감했다. 옆에 나제즈다가 없었다면 참지 못했겠지. 그녀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다.

난 다시 거칠게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나제즈다.”

“갑자기…… 괜찮으세요?”

“괜찮죠. 그냥…… 하루 만에 피아노를 쳤더니 너무 좋아서요.”

일부러 경쾌하게 말했더니 나제즈다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웃으며 다시 건반을 꾹 눌렀다.

“모처럼인데 신청곡을 받고 싶기도 하지만…… 미안해요. 전 지금 그냥 피아노를 만져 보고 싶을 뿐이라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야말로 아가씨가 피아노 앞에 있는 걸 보기만 해도 좋은걸요.”

“그런가요.”

나제즈다가 좋아하는 것처럼, 나 역시 피아노 앞에 있는 날 좋아한다.

모든 걸 끝내고 나서 건강을 되찾는 건 예상했던 대로 하니 이렇게 쉬웠다. 당장 내일이면 정상 컨디션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초연해질 수 있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조금만 더 있을게요.”

다른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었다. 난 생각을 비우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기계적으로 건반을 누를 때마다 모든 것이 납작하게 되었다. 바닥을 보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앞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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