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7화
2월 중순. 9학년 2학기 개학일에는 모스크바 전역을 뒤덮는 눈보라가 몰아쳤다.
오늘 같은 날은 학교 쉬어도 되는 거 아닌가? 에르네스트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를 맞이하는 눈보라와 새하얀 거리를 보며 학교에 가기가 싫어졌다.
하지만 지금보다 심한 폭설이 쏟아져도 학교엔 가야 했다. 구세프에게 보여 줄 곡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챙겨 놓았던 악보를 다시 꺼내어 확인했다. 일반적인 악보에는 없는 생소한 기호가 눈에 들어왔다.
타티아나가 고안한 이 기호는 그녀가 음악에 가지는 지식과 열정, 그리고 표현력이 아이디어화되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처음 이걸 보고 머리가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은 기분마저 느꼈다.
구세프를 설득해서 쓸 수 있도록 허락받은 건 괜한 치기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이 기호를 완벽하게 사용할 자신이 있었다.
“……로열티 줘야 하는 건 아니겠지?”
자신이 있는 것과 별개로 약간의 책임감이 들었다.
물론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가 그녀의 기호를 사용했다는 말을 듣곤 그저 웃기만 했다. 그녀는 로열티는커녕 고맙다고 할 성격이었다.
그래도 에르네스트는 뭐라도 그녀에게 해 주어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녀와의 관계는 아직도 딱 잘라 표현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관계였다. 하지만 조금 딱딱하게 이름 붙여서 동료 음악가이자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다면, 에르네스트는 응당 그에 걸맞은 예우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이 관계가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졌다.
“…….”
에르네스트는 다시 악보를 챙겨 넣고는 구세프에게 보여 주기 전에 타티아나에게 먼저 보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 기호 사용권에 대한 로열티로 뭐라도 좋으니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할 생각이었다.
에르네스트가 음악가로서 타티아나에게서 얻어 가는 것이 많은 것처럼, 반대로 그녀가 그에게서 얻어 갈 것도 많을 것이라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눈보라는 이제 거슬리지 않았다.
기분 좋게 교실에 도착한 에르네스트는 문을 열자마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찾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대신 오랜 친구가 고개를 돌리더니 손을 휙 흔들었다.
2주 만에 보는 아나스타샤였다. 에르네스트는 그 옆에 앉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 아나스타샤.”
“응. 안녕.”
아나스타샤는 건조하게 인사를 받아 주고는 하품을 하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늘 이런 애이긴 하지만 그래도 개학날인데 너무 무관심한 태도라서 에르네스트는 살짝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잘 지냈어?”
“나야 뭐…… 잘 지냈어.”
“콩쿠르 준비하고 있었지?”
“방학 내내 그것만 했지.”
아나스타샤는 책상 위에다가 피아노를 치는 시늉을 하더니 삐딱하게 턱을 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콩쿠르 준비로 힘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조금 날카로워 보이는 그녀를 보면서도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기만 했다.
벌써 몇 년 동안이나 아나스타샤는 콩쿠르 등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콩쿠르 준비를 하며 피곤해하는 걸 보니 조금 안도감이 들 지경이었다.
잘했으면 좋겠다고 격려해 줄까 하다가, 에르네스트는 그냥 평소처럼 대하기로 했다.
“몇 년 만인진 모르겠지만, 잘 해. 청소년 콩쿠르로는 마지막이지 않나 싶으니까. 내년부턴 진짜 만만찮은 연주자들과 경쟁해야 한다고.”
열일곱 살이 되면 청소년 콩쿠르에는 나가지 못한다. 그냥 성인 콩쿠르에서도 잘하면 그만이지만, 약간이나마 유리할 때 커리어에 도움이 될 점수를 따 놓는 게 똑똑한 행동이었다.
올해는 아나스타샤가 연주자 커리어를 관리하는 데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해가 될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와 이야기하면서 올해 있는 청소년 콩쿠르들의 수준이나 그간 그녀가 멈춰 놓았던 커리어 관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그녀에겐 알려 줄 정보도 해 줄 조언도 많았다.
그런데 아나스타샤의 반응은 예상과 약간 달랐다.
“상대가 강할수록 의미가 있는 거잖니?”
“……?”
그 어떤 무대에서 어떤 연주자를 상대로 하든 절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고개를 드는 태도.
순간 에르네스트는 지금 대화 상대가 아나스타샤가 아니라 타티아나인 줄 알았다.
놀란 눈으로 보니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르네스트는 정말 의외라는 듯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데.”
“무슨 뜻이야?”
시비를 건다고 생각했는지 아나스타샤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매섭게 물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에겐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
단지, 타티아나와 함께 다니더니 정말 많이 닮아 가는구나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물론 에르네스트도 타티아나에게 그만큼 많이 영향을 받았으니 할 말은 없었다.
“별 의미 없어. 그나저나 타티아나는 어디 가고?”
마침 생각나서 물어보니 아나스타샤는 잠시 말이 없더니, 다시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 애 오늘 아파서 못 온대.”
“……뭐?”
에르네스트는 놀라서 반문했다.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물론 타티아나가 학교를 쉬면서 에르네스트에게까지 보고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냥 아나스타샤에게만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약간은 아쉽다. 에르네스트는 괜히 아무것도 없는 메시지 목록을 확인해 보고는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어디가?”
“그냥 감기인가 봐.”
“안 됐네.”
그래도 어디 크게 다치거나 아픈 게 아니라 감기 정도라서 다행이다. 원래 체력이 약하니 심하게 앓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에르네스트가 걱정 반, 안도 반으로 메시지나 보내 볼까 고민하는 사이,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오늘 이따가 병문안이나 가려고.”
“그래.”
아나스타샤가 가서 봐 준다면 안심할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대꾸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삐뚜름하게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뭘 바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자 아나스타샤가 심각한 고민 끝에 말한다는 듯 넌지시 제안했다.
“……너도 같이 갈래? 에르네스트.”
근래 들어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에게 이런 제안을 많이 하곤 했다. 여자애들끼리 편하게 만나려면 자신이 빠져 주는 게 좋을 텐데, 왜 자꾸 끼워 넣으려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번엔 병문안이니까 이해가 됐다. 그리고 물론 가 보고 싶었다. 아나스타샤에게만 맡기지 않고 직접 가서 괜찮냐고 묻고,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돕고 싶었다.
아무리 약한 감기라도 직접 얼굴을 봐야만 할 것 같았다.
“…….”
그렇지만 그건 에르네스트의 생각이었다. 잠깐 입장을 바꿔 고민해 본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난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뭐……?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와? 냉혈한.”
아나스타샤가 비난했다. 에르네스트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설명했다.
“아니 너랑은 상관없고, 그냥…… 감기라면 편히 쉬는 게 중요한데 그 애는 아픈 거 보이는 거 굉장히 싫어하잖아. 안 그래?”
“……그래서?”
“그냥 너 혼자 가. 적어도 네 앞에선 편하게 풀어지는 거 같으니까.”
타티아나가 아프니 가서 보고 싶다는 건 진심이었지만, 그가 아는 타티아나는 어떤 이유에서든 긴장을 풀어 놓거나 누군가의 걱정을 사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리 강하지 않은데도 늘 단정한 모습만 보여 주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에르네스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친구로선 가 보는 게 옳을지 모른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라이벌이라 생각한다면 그 노력을 무시하지 않는 게 옳은 일 아닐까.
“…….”
에르네스트도 약간 생각이 복잡해져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다시 고민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병문안 가지고 이렇게까지 고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약간 어이가 없어져서 물었다.
“왜 그렇게 보는데.”
“짜증나서.”
아나스타샤가 인상을 쓰며 답했다. 에르네스트는 이게 짜증이 날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문득 그가 앞서 한 말을 약간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나스타샤.”
“뭐야?”
“방금 내 말이 오해를 사면 정말 냉혈한처럼 보이는 건가? 네가 보기엔 그래?”
개학 첫날부터 학교에 못 왔는데 같이 가 보잔 말을 듣고도 거절하는 건 정말 냉혈한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명백한 오해였지만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아나스타샤는 쌍심지를 세우며 쏘아붙였다.
“오해는 무슨 오해야? 병문안 가자고 했는데 거절했잖아?”
“다 이유가 있다니까. 넌 그 애 성격을 잘 알면서도 그래?”
“응. 잘 아는데, 네가 간다고 해서 싫…….”
아나스타샤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에르네스트는 더 생각할 것 없이 이번엔 친구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단 오해받는 건 피해야겠네. 나도 갈게.”
“…….”
갑자기 왜 했던 말을 번복하냐며 한 소리 할 것처럼 눈을 흘기던 아나스타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아나스타샤는 그 후로도 발렌티나와 리처드 등에게서 타티아나는 어디 갔냐는 질문을 받아야만 했다.
그녀는 에르네스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타티아나가 지금 아프다는 걸 알려 주고는 함께 병문안을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긴 레슨이 잡혀 있었고 리처드는 잠시 생각한 뒤 거절했다.
“감기가 조금 오래 가는 것 같은데, 더 아플 수도 있다면 더더욱 여럿이 가서 귀찮게 하는 건 좋지 않아. 혼자 쉬게 두는 게 나을 것 같긴 한데……. 너희 둘만 대표로 다녀와. 난 빠질게.”
리처드는 타티아나를 걱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손을 내저었다.
에르네스트는 리처드의 말이 약간 묘하다는 걸 느꼈다. 감기를 오래 앓고 있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 수도 있겠지만 이후 이어지는 말들은 모종의 책임감을 느끼는 듯한 뉘앙스를 띠고 있었다.
혼자 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건 조언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는 이미 타티아나에게 오후에 가겠다고 메시지까지 보내 놓은 상태라서 이제 와서 가지 않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학교 앞으로 나왔다.
“잠깐만 갔다 오자.”
“그래. 오래 있어도 폐니까.”
“뭐 사 가지고 가야 해?”
“과일이나 사.”
두 사람은 근처 가게에 들러 과일 바구니를 사선 택시를 잡고 베르체노프 저택으로 향했다. 택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담과 정문 앞에 도착했다.
택시 운전사가 어떻게 할 거냐며 돌아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지폐를 내밀며 말했다.
“여기서 내릴게요.”
누구인지 밝히고 정문을 통과해서 저택 앞까지 택시로 가도 되겠지만, 그냥 잠깐 걷는 게 갑자기 찾아온 사람들의 예의일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나스타샤도 별말 않고 에르네스트를 따라 내렸다. 두 사람은 정문에 설치된 보안시스템에 이름을 밝혔고, 철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섰다.
“…….”
잠시 말없이 걷던 두 사람 중 먼저 침묵을 깬 건 에르네스트였다.
“자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뭐?”
아나스타샤는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에르네스트를 보며 말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니?”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자고 있었더라도 지금 우리가 와서 누군가 깨웠을걸?”
“그러면 더 미안한데.”
말해 놓고도 정말 실없는 소리처럼 들렸다. 에르네스트는 왜 자꾸 쓸데없는 소리가 나오는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스마트폰을 다시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메시지 몇 번 보내 봤는데 아까부터 계속 바로바로 답장 와. 안 자고 있는 것 같아.”
“그럼 다행이고.”
“안 자고 뭘 하는지 모르겠어.”
걱정이 가득한 한숨이 하얗게 형태를 갖추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10분이 조금 넘게 걷자 저택 본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아나스타샤는 막 계단을 오르려다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쭉 빼고 앞을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 역시 아나스타샤가 하는 것과 똑같은 곳을 보았고, 타티아나가 창문 뒤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안 자는 건 물론이고 누워 있지도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곧장 저택 문을 열어젖혔다.
실내복 차림의 타티아나가 빙그레 웃더니 인사했다.
“어서 와요, 두 분.”
어지간한 일로는 절대 학교를 빠지는 일이 없는 타티아나가 개학 첫날부터 쉬기에 감기로 누워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모습은 생각보다 좋아 보였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의 웃는 얼굴을 보고도 쉽게 마음이 놓이지 않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