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8화
아나스타샤가 막 한 발자국 들어서자마자, 타티아나가 다가와선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 추운 겨울날 코트 차림으로 정원을 걸어 온 아나스타샤를 안으면서도 타티아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깜짝 놀라며 밀어냈다.
“차갑잖아!”
“괜찮아요. 하나도 안 차가워요.”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가 밀어내려고 해도 팔을 풀지 않고 움직이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저러다가 감기가 더 심해지는 건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그런 걱정을 한 건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인지 그녀는 결국 차가운 손을 들어 타티아나의 옆 목에 가져다 대었다. 타티아나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떨어졌다.
아나스타샤가 이러지 말라는 듯 말했다.
“감기 걸린 애가 이러면 어떡해.”
그래도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타티아나가 뒤늦게 옅은 웃음을 보이며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너무 반가워서요……. 코트 걸고 오시겠어요? 차 내어 드릴게요.”
두 사람은 타티아나의 안내에 따라 옷걸이에 코트를 걸어 놓고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이미 다기가 세팅되어 있었다. 정문에서 연락을 하자마자 10분 만에 준비했다기엔 상당히 잘 차려져 있었다.
옆에 책도 한 권 놓여있는 걸 보니 어쩌면 타티아나가 한참 전부터 이곳에 나와 책을 읽으며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
확실하지도 않은 생각을 해 봐야 소용없었다. 에르네스트는 가지고 온 것부터 주기로 했다.
“자, 병문안 선물이야.”
“와…… 고마워요. 에르네스트.”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자 타티아나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과일을 처음 본 건 아닐 테고, 이런 바구니를 신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 맞은편의 소파에 앉았다. 아나스타샤는 바로 타티아나 옆에 앉아서 그녀가 차를 따르는 걸 도와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괜찮아 보이는데, 어때? 타티아나.”
“음, 괜찮은 편이에요.”
“그럼 우리만 대표로 올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애들도 데리고 올 걸 그랬네. 리처드 녀석은 네가 많이 아픈 줄 알았는지 그냥 혼자 쉬게 두는 게 나을 거라면서 안 온다 그랬는데.”
차라리 여럿이 와서 왁자지껄한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아서 한 말인데, 타티아나는 차를 따르던 손을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고 물끄러미 에르네스트를 올려다보았다.
“리처드가요?”
“응.”
“그런가요…….”
타티아나는 중얼거리며 다시 찻잔에 집중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를 반응이었다.
뭔가 말을 잘못 전한 게 있나 다시 생각해 봐도 딱히 잘못한 건 없었다. 타티아나도 딱히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녀는 에르네스트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 이렇게 와 주신 것만으도 미안하게 생각해요. 내일이면 학교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미안하긴 무슨.”
“대신 잘 대접해 드려야겠어요. 후후.”
다 나아가는 감기로 병문안을 받은 것에 대해선 미안하지만 그러면서도 굉장히 기뻐한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기쁨 너머로 약간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이상한 점이 남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타티아나는 스스로 말하길 괜찮다고 할 정도라면 분명 학교에 나왔을 애다. 왜 쉰 걸까.
그냥 기분이 나빠서 쉬었다면 할 말이 없지만, 타티아나의 평소 성격을 아는 에르네스트는 그런 이유로 쉬는 타티아나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
가만 바라보니 타티아나가 싱긋 웃으며 왜 그러냐는 듯 눈빛으로 물어왔다. 에르네스트는 지금도 타티아나가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병문안을 오기 전에도 생각했었지만 저 노력하는 모습을 무시하지 않는 게 자신이 할 일이 아닌가 싶다가도, 가끔은 성큼 다가서서 묻고 싶을 때도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향 좋네.”
하지만 지금 타티아나의 옆엔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그녀라면 에르네스트보다 훨씬 더 타티아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줄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그냥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기로 하고 홍차를 한 모금 마셔 보았다. 그가 딱 좋아하는 맛이었다.
아나스타샤도 차를 마셔 보고는 감탄하며 칭찬했다.
“차 정말 좋다.”
“다행이에요.”
“과일도…… 귤 있네. 까 줄까?”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나스타샤는 과일 바구니에서 귤을 몇 개 꺼내어선 까서 타티아나에게 주고, 자기 입에도 넣었다.
당연히 에르네스트에게 오는 건 없었다. 혹여나 아나스타샤가 에르네스트에게도 귤을 까서 준다면 그건 세상 멸망의 신호였다. 에르네스트는 세상이 멸망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이좋게 귤을 나눠 먹는 두 사람을 보다가,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가 다른 과일엔 손을 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칼 있어?”
“……갑자기 왜요?”
“왜 그런 살인마 보는 눈으로 보는데? 과일 깎으려고 그래. 과일 깎으려고.”
에르네스트가 항변하자 타티아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무릎을 짚었다.
“잠시만요. 가져다 드릴게요.”
“아니, 주방 쪽 가면 되지? 나 손도 좀 씻고 오게.”
“아…… 맞아요.”
“갔다 올게.”
칼 하나 빌려 오는 것 정도는 직접 가는 게 나았다.
에르네스트는 이 저택의 구조를 대강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장 주방 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셰프 드미트리가 있었고, 에르네스트는 그에게 부탁해서 작은 과도를 하나 빌리고 손도 씻었다.
드미트리는 혹시 모르니 다치지 않게 고무장갑을 주겠다고도 했지만 에르네스트의 사전에 장갑을 끼고 과일을 깎는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조심해서 깎을 테니 괜찮다고 사양했다.
그렇게 다시 응접실로 돌아갔을 때, 이상한 광경이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었다.
“뭐야 이게?”
“실력을 볼 수 있게 단계별로 딱 골라 놨지.”
에르네스트가 앉았던 자리 앞엔 과일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사과, 복숭아…… 파인애플?
아나스타샤가 준비한 자리였다. 과일을 깎을 거라면 얼마나 잘 깎나 한번 보여 달라는 것 같았다.
보여 주지 못 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그러려고 했고.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나 파인애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그럼 왜 샀어?”
“그냥 맛있어 보여서.”
“바보니?”
아나스타샤가 째려보았다. 에르네스트는 테이블 위의 파인애플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과일 바구니에 채워 넣을 땐 멋지게 보였는데 이렇게 보니까 손도 못 대겠다.
하지만 가만히 있자니 억울해서 한마디 했다.
“너도 아무 말 안 했잖아?”
“난 네가 자신 있게 집길래 손질할 줄 아는 줄 알았지.”
고르면서도 직접 깎아야 할 줄은 몰랐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항변하려다가, 옆에서 눈만 깜빡이고 있는 타티아나를 발견하고는 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어…… 아픈데 미안. 시끄럽게 했네.”
“아하하, 아니에요.”
그녀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웃어 보이고는 직접 테이블 위로 허리를 숙이곤 접시 위에 사과를 하나 올려선 에르네스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자, 여기요. 사과는 괜찮죠?”
“…….”
뭐지? 갑자기 이러니까 하기 싫어지는데.
그냥 좋은 마음으로 과일을 깎아 주려고 했었던 건데 왜 반항심이 드는지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자신도 모를 기분에 사과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기대감이 잔뜩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타티아나를 보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무슨 사과 깎는 것 하나도 저렇게 흥미진진해하면 파인애플을 자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질 정도였다.
타티아나는 마침 예전 생각이 난다는 듯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감자도 잘 깎았었죠.”
“이젠 졸업이야.”
“예?”
“사샤 시킬 거거든.”
“……??”
베샤스트니흐가의 감자 담당은 현재 에르네스트지만 그건 언제든 넘어갈 수도 있는 업무였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경악하며 눈을 크게 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도 정나미 떨어진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물론 에르네스트는 열 살도 안 된 꼬맹이에게 칼로 감자를 깎으라고 시킬 정도로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었다.
“농담이야 농담. 살인마에 이어 싸이코 보듯 보지 마 제발.”
“너무 놀라서 소름 돋았어요…….”
“감기 날아갔겠네.”
타티아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진짜로 손으로 양팔을 쓸어보기까지 했다. 에르네스트는 킥킥거리며 사과를 쥐었다.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베샤스트니흐가의 감자 담당이자 동시에 사과 담당도 바로 에르네스트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나 쳐다보고 있어서 조금 긴장되었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도 하나도 긴장되지 않는데 왜 사과를 깎는 건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실수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칼을 움직였다.
잠시 후, 접시 위에 먹기 좋게 잘린 사과들이 올라갔다.
타티아나는 포크로 그중 하나를 집어 베어 물고는 해맑게 웃었다.
“맛있어요.”
맛있게 먹어 주니 다행이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고는 다음으로 복숭아를 잡았다.
타티아나는 요리도 곧잘 하는 편이니 과일을 못 깎진 않겠지만, 그 후로도 한 번도 칼을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도 묵묵히 접시에 과일들을 올리는 데에만 집중했다.
아나스타샤는 포크를 빙글빙글 돌리며 타티아나에게 이야기했다.
“오늘 수업은 없었으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그냥 개학 첫날 있었던 일들에 대한 소식이었다. 딱히 전달해 줄 것도 없었지만 타티아나는 오늘 하루 빠진 것에 대해 보충이라도 하듯 귀를 기울여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아나스타샤는 포크로 복숭아를 쿡 찍으며 말했다.
“요컨대 뭐, 별일은 없었어. 애들이 너 왜 안 오냐며 걱정했었던 게 가장 큰 일이네.”
타티아나가 중얼거렸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걱정을 안 할 수가 있겠니? 게다가 난 방학 때 이미 너 아프다는 거 알고 있었는데.”
“아, 그때요.”
“쭉 안 나았던 거야?”
“그건…… 괜찮아졌는데, 또 약간 안 좋아져서요.”
두 사람은 에르네스트가 모르는 것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방학 때 이미 계속 아팠었다고?
리처드가 말한 게 진짜였다. 그런 줄 알았으면 중간에 연락이라도 한번 해 볼걸. 타티아나도 레슨에 집중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건 생각도 못 하…… 잠깐만, 그럼 레슨은 어떻게 받은 건데?
에르네스트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중간에 끼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꾹 참고 과일을 깎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래도 이젠 그만 아파야죠. 하루 정도만 더 확실히 쉴 생각이었어요.”
“그렇구나…….”
타티아나는 또 묘한 어투로 말했다. 그만 아프겠다고 하면 정말 그만 아플 수 있는 사람처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기계처럼 칼만 움직였다. 그런데 타티아나가 그다음으로 에르네스트를 불렀다.
“학교에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에르네스트.”
“어?”
손을 멈추고 올려다보니 타티아나가 환한 미소와 함께 축하를 전해 왔다.
“수석이시죠? 축하드려요.”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지금 피아노과에서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는 거의 독보적인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타티아나는 자신이 수석을 빼앗기자마자 그 상대를 짐작했을 것이다. 지난여름, 에르네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타티아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바로 전화를 할까 했는데…… 조금 늦었네요.”
“아, 아니야. 괜찮아.”
성적표를 받아 보고 기분이 좋았던 건 사실이지만, 전화를 받고 싶거나 했던 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가 손을 내젓자 타티아나는 소파에 몸을 묻으며 어깨를 웅크렸다.
“약간 부끄럽네요. 저번에 수석 자리 쉽게 내어 드리지 않겠다고 말씀드려 놓고는 이렇게 바로…….”
뭐가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편입 온 지 1년 만에 수석을 차지했었던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데.
“네가 컨디션 난조였겠지.”
“그것도 실력이잖아요.”
“솔직히 운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실력이에요.”
타티아나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사실 에르네스트도 실력으로 경쟁한 자리를 두고 운이라고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나, 어쩐지 타티아나가 자신의 실력을 완전히 시험에 쏟아 내지 못했으리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자기 실력이지만, 도저히 딱 잘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가 운이니 실력이니 하는 사이로 아나스타샤가 툭 말을 던졌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수석이랑 차석이 싸우고 있네. 너희 너무하는 거 아니니?”
“아…….”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아나스타샤는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 의도는 없었다는 듯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농담이야. 그리고 내 성적도 엄청 올랐거든? 아직 너희들한테 보여 줄 순 없지만.”
“왜 못 보여 주시나요?”
“창피하잖아.”
아나스타샤는 담담하게 하면 안 될 것 같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더니, 돌연 사냥꾼이나 할 법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에르네스트를 휙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는 에르네스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졸업하기 전에 쟤는 한 번 이겨 봐야 하는데.”
“……그러든가.”
“어라? 나 무시하지 마? 그러다가 큰코다쳐 진짜로.”
“내가 언제 무시했다고 그래?”
이런 주제는 곤란하기만 하다. 에르네스트가 살짝 피하려 하자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조금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보였다.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아무튼…… 나도 손 좀 씻고 올게.”
소파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나가는 아나스타샤의 뒷모습을 보며 에르네스트는 그의 라이벌이 하나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