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9화
난 감기 같은 것에 걸리지 않았다. 그건 그저 핑계일 뿐이었다.
미련을 포기하고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음악에 집중하면서 난 정말 빠르게 건강을 되찾아 갔다. 불과 며칠 만에 컨디션은 거의 다 회복되었고, 지금은 가장 큰 걱정이었던 시력도 정상으로 되돌아온 상태였다. 모든 게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그렇게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뒤돌아보지 않으면서도 나는 이따금 발을 멈추고 멍하니 있곤 했다.
그건 피아노를 연주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난 바흐의 인벤션을 연주하다가도 갑자기 나도 모르게 연주를 멈추곤 했다.
어둠을 걷는 기분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분명 발밑은 평탄하고 걷기 편했으니 제대로 된 길이라는 게 분명했지만, 멍하니 걷다 보면 점점 생각이 없어졌다.
생각이 멈추면 손이 멈췄고 곧 뭘 하고 있었는지조차 캄캄해졌다.
이래선 안 된다고 수백 번을 되뇌었다.
이제 할 만큼 해 봤고 결과도 확실히 받아 보았다. 그나마 구세프 선생님께서 비슷하게 연주해 주시기도 하셨으니 이제 그 정도로 만족하고 합리적으로 굴어야 할 때다.
냉정하게 보면, 난 지금 피아노를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어쩌면 난 피아노 자체를 허락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음을 천만다행이라 여기며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 피아노를 제대로 다룰 수 있어야 내 친구들과 음악을 나눌 수도 있고, 앞으로도 연주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 여기서 주춤거릴 이유도 여유도 없다.
“…….”
하지만 너무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온 탓인지 후유증이 조금 남아 있었다. 난 조금이라도 더 멀쩡해진 상태로 학교에 가고 싶었고, 그래서 하루만 더 쉬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 쉰다고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가 병문안을 와 줄 줄은 몰랐다.
아나스타샤가 나가고, 난 잠깐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죄책감을 느꼈다.
“……에르네스트도 다음에 아프면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병문안 가도록 할게요.”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들더니 뭐 그런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에르네스트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부담스러워하지 마. 당연한 거잖아.”
“그래도…….”
“그리고 난 너한테 로열티 줘야 할 것도 있거든. 그러니까 괜찮아.”
“……그 차는 무슨 맛인가요?”
순간 생각지 못한 엉뚱한 단어가 나와서일까, 난 그 뜻을 미처 떠올리지 못하고 멀거니 그에게 되물었다.
에르네스트는 무표정하게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러게 무슨 맛일까.”
난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질 정도로 당황했다.
“아, 아니에요. 알아요. 로열티. 특허 사용료요. 진짜 알아요.”
뒤늦게 아무리 제대로 뜻을 말해 봐야 이미 내뱉은 말이 사라지진 않았다. 대체 왜 저런 바보 같은 소릴 한 걸까? 할 수 있다면 10초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거리자 에르네스트는 손가락을 튕기며 감탄했다.
“진짜 올해 들은 말 중에 가장 웃겼어, 타티아나. 로열티가 무슨 차냐니.”
“올해라고 해 봐야 한 달밖에 안 지났잖아요.”
“응. 그런데 앞으로 열한 달 지나도 이게 제일 재미있을 것 같아.”
건수 잡았다는 듯 구는 그가 얄미웠지만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어이가 없었으니까.
“잊어 주세요.”
“잊어지겠어?”
에르네스트는 이럴 때 자비가 없다.
난 아무리 없던 일로 하려 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곤 전투 준비에 나섰다. 나도 이럴 땐 마냥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아 정말…… 그래서 갑자기 로열티라니 무슨 말씀이신가요? 저도 냉정하게 해야겠어요. 변호사부터 부를까요?”
“잠깐만…… 미안해. 내가 실수한 것 같아.”
마구 몰아세웠더니 에르네스트가 곧바로 사과했다.
살짝 미안해졌지만, 로열티 이야기를 왜 했는지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난 얼른 내 궁금증을 해결해 달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더니, 손수건으로 손을 대충 닦고는 가방에서 무언가 꺼냈다.
“이것 말이야.”
그가 내민 건 한 묶음의 악보였다. 인쇄된 오선지에 직접 손으로 사보한 것을 보니 이게 무슨 악보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작곡한 첫 번째 곡이 나온 것이다.
“다 완성하신 건가요?”
“그래. 한번 볼래?”
“……제가 봐도 될까요.”
“당연하지.”
허락을 구하기가 무섭게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난 첫 페이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깔끔하게 사보한 악보는 한눈에 읽기 편했다. 내 머리는 빠르게 익숙한 음표들과 기호들을 분석해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오는 한 기호가 있었다. 난 혹시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 다시 악보를 살펴보고, 이 흐름을 보았을 때 정확한 위치에 정확한 의도로 삽입된 기호라는 것을 확신했다.
“…….”
그건 내가 쇼팽 소나타 1번을 다시 되살리면서 사용했던 기호 중 하나였다. 에르네스트가 로열티 이야기를 꺼냈던 것도 이 기호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열티 같은 건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난 그를 불렀다.
“……에르네스트?”
“응.”
“이 기호…… 사용하시면 안 되지 않나요?”
혹시나 에르네스트가 오해할까 싶어 난 빠르게 덧붙였다.
“아, 제 거라든가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구세프 선생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허락받았어.”
“예?”
난 깜짝 놀랐다.
그 깐깐하신 구세프 선생님이 작곡가 지망생의 악보에 이런 기호가 들어가는 걸 허락하실 리가 없는데……? 심지어 한 번은 이런 짓 하지 말라고 리젝하시지 않았던가? 그걸 뒤늦게 허락하셨다니?
에르네스트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어림도 없겠지. 그런데 내가 작정하고 설득하니까 구세프 선생님도 인정하시더라고. 마음대로 해 보래.”
“…….”
“그래서 썼고…… 그런데 너한테 허락은 못 받았잖아? 사실 처음부터 내 마음대로 써먹긴 했네.”
“그랬었죠…….”
이 악보의 초안이 나왔을 때부터 그는 내게서 배워 간 기호들을 쓰고 있었다. 사실 배워 갔다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난 그를 가르친 적이 없고, 그는 보자마자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사용했을 뿐이니까.
이런 기호 같은 것에 사용권이 있을 리 없으니 당연히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래도 마음의 빚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
그냥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되겠지. 하지만 그건 약간 재미없다.
상황을 파악한 난 약간 짓궂게 물었다.
“그래서, 이 기호에 대한 로열티를 제게 주시겠다는 건가요?”
“뭐…… 그러려고. 필요 없으면 말고.”
“왜 필요가 없나요?”
“갑자기 무서운데…….”
에르네스트는 목이 타는지 찻잔을 기울였다. 괜히 그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쩐지 내게 맞춰 주려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난 싱긋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이 응접실은 계약 이야기를 하기에도 좋은 곳이죠. 자, 그래서 얼마나 주실 수 있으신가요?”
사업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와 오빠가 하는 것이지만 기분을 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해 봤는데, 에르네스트는 뭔가 잠깐 생각하는 것 같더니 툭 내뱉었다.
“몰라.”
“예?”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내가 어이없다는 듯 흘겨보자 에르네스트는 양손을 펼쳤다.
“원래 이런 건 부르는 사람 마음대로잖아?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봐. 뭐든지 좋으니까.”
“뭐든지요?”
“그래. 내가 들어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해 줄게.”
그러더니 갑자기 백지수표를 내던졌다.
난 당황스러웠다. 그냥 장난에서 그치려 했는데 갑자기 이러니 뭘 달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뭐든지라고 이렇게 쉽게 말씀하시는 건 별로 좋지 않아요.”
“그거 재작년에 내가 너한테 했던 말 같은데.”
그때를 떠올리니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내 머리는 에르네스트가 던진 백지수표에 뭘 써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겨우 기호 하나와 교환한 것이니 너무 과한 걸 바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당연히 들었지만, 그래도 음악가로서 바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손에 쥐는 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에르네스트에게 내가 무언가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난 조심스레 말했다.
“조금 무리한 요구 해도 될까요?”
“뭔데? 들어 볼게.”
난 손에 아직 쥐고 있는 악보를 다시 가지런히 정리해서, 옆으로 들어 올렸다.
“이 곡, 저에게 주실 수 있나요.”
“……뭐?”
에르네스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제야 난 내가 무슨 소릴 했는지 깨달았다. 말을 조금 잘못했다. 빠르게 고쳐 말했다.
“아, 작곡가의 이름을 바꿔 달라는 건 아니에요. 그건 말도 안 되죠. 제 말은 저기…… 제가 연주해 볼 수 있게…….”
“헌정해 달라고?”
“그것도 괜찮겠네요.”
어떤 방법이든 좋았다.
난 이 곡의 첫 페이지를 보자마자 연주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피아노 연주를 하다가 말고 종종 멍하니 정신을 놓아 버리는 것도 내가 연주하고 싶은 곡을 집중해서 연주한다면 그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내겐 어떠한 목표가 필요했다. 막연한 허상을 좇는 건 이제 싫었다.
“…….”
에르네스트는 유심히 날 들여다본다. 난 문득 너무 막무가내로 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원하는 걸 말해 보라고 했다고 해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헌정해 달라고 하는 건 이상한 사람이나 할 짓처럼 보였다.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난 다시 악보를 그에게 내밀었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미안해요.”
“무슨 소리야. 기분이 왜 나빠?”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그걸 받지 않고 웃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타티아나. 네게 헌정할게.”
그 말을 듣자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이런 식으로 곡을 헌정받는 게 과연 정상적인 일인지는 아직도 의문이 남아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잠깐만 정신을 놓으면 자꾸만 어두운 쪽으로 향하던 신경도 지금만큼은 쓸데없이 흔들거리지 않았다. 혼탁했던 것들이 선명해져 온다.
피아노를 다시 제대로 칠 수 있도록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더 늘어났다. 하나라도 더 많은 빛이 필요한 내게 있어서, 이 곡은 정말 소중했다.
“정말이신가요?”
“그래. 가져가.”
에르네스트는 아예 내 것으로 하라는 듯 악보를 받아 들지 않았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응접실 한쪽에 있는 피아노로 향했다. 당장 이 곡을 들고 피아노로 향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보아하니 에르네스트도 그것을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렇게까지 이기적으로 굴면 안 된다는 걸 느끼곤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
“안 돼요. 먼저 구세프 선생님에게 보여 드리고 작곡가를 지망해도 된다는 허락은 받아 내셔야죠.”
“……넌 정말 빈틈이 없네.”
지금 살짝 쳐 봐도 되겠지만, 일단은 이 곡이 작곡된 원래 목적에 충실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시험으로 제출하기로 했으니까, 그때까진 내가 방해해선 안 된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이 곡을 풀어 헤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그에게 다시 악보를 내밀자 그도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받았다.
“선생님에게 보여 드리고 나서, 그다음에 주면 되는 거지?”
“예……. 정말 주겠다 하실 줄은…….”
“정당한 거래잖아? 로열티 지불.”
에르네스트는 쿨하게 말했다. 난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고마워요.”
그냥 고맙다는 말로 정말 괜찮은 걸까.
약간의 부채감을 느끼는 와중, 에르네스트는 잠시 말없이 자신의 악보를 휙휙 넘겨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악보를 탁 정리하고는 내게 말했다.
“그런데 나도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부탁이요?”
“응.”
방금까지 이야기하던 거래를 넘어서는, 친구로서의 부탁이었다. 난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네스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악보를 톡 쳤다.
“이 곡 연주해 보고, 제목을 지어 줘. 아직 무제거든.”
세상에, 곡을 헌정해 달라고 억지를 쓰는 것보다 더 무리한 부탁이 있을 줄은 몰랐다. 제목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서 이런 부탁을 한단 말이야?
말도 안 된다는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부탁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내가 이 곡을 연주하려면 이 곡의 제목도 함께 생각해야만 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