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0화
잠시 손을 씻으러 갔던 아나스타샤는 파인애플을 손질하는 방법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돌아왔다.
“드미트리 셰프에게 물어봤어. 생각보다 간단하던데.”
아나스타샤는 어깨를 으쓱하며 내 옆에 앉더니, 약간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에르네스트를 삐딱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명령했다.
“자, 칼 잡아.”
“난 방법 모르는데?”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그대로 하면 되잖아.”
“……야, 너 지금 손 씻고 와선 네가 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지.”
“당연하잖아. 기왕이면 손 더럽힌 네가 마저 해. 왜, 뭐 문제 있니?”
뭔가 듣기에 굉장히 살벌한 이야기였지만 대상이 파인애플이라 다행이었다.
에르네스트가 인상을 쓰며 칼을 쥐었다.
“뭐 어떻게 하라고?”
“머리를 잘라.”
“머리? 이게 전체가 머리처럼 보이는데 또 머리가 어디야?”
“머리카락 붙어 있는 꼭대기 있잖아.”
결국 아나스타샤 보스의 명령에 따라 에르네스트는 칼로 파인애플을 살해했다. 난 그 끔찍한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각난 파인애플은 오늘 지금까지 먹은 과일들 중 가장 달콤했다.
“이거 안 먹었으면 후회할 뻔했어.”
아나스타샤가 즐거워하며 말했고, 에르네스트는 손이 끈적해진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병문안 선물로 사 온 걸 왜 우리가 다 먹고 있는 건데?”
“몰라, 네가 자꾸 깎아 주니까 안 먹을 수가 없잖아.”
“야…….”
에르네스트는 막 험한 소리를 하려다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손으로 옆머리를 짚더니, 손이 끈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급히 뗐다.
“아, 나…….”
“머리에 묻었니?”
아나스타샤가 또 장난을 치려 하자 에르네스트는 이제 됐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래서 언제 갈 건데. 우리 잠깐만 있기로 했잖아.”
난 반사적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겨우 1시간 정도 흘러 있었다.
이제 돌아가려는 걸까? 사실 더 잡아 놓을 수도 없었다. 애초에 저 애들이 와 준 것도 내가 걸리지도 않은 감기에 걸렸다고 학교를 멋대로 쉬어 버린 탓이었으니까. 지금이라도 빨리 가라고 하는 게 옳았다.
“…….”
하지만 이 애들이 오기 전까지 멍하니 책을 보고 우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조금만 더 있어 달라고 하고 싶었다.
불과 1시간뿐이었지만 난 이 애들과 있으면서 지금 주어진 현실에 기뻐하고,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며 행복할 수 있었다.
많은 걸 바라지 않을 테니까, 내일이면 평상시처럼 돌아갈 테니까…… 오늘만 안 될까.
“글쎄, 몇 시지.”
아나스타샤도 시계를 봤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난 물끄러미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싱긋 웃었다. 난 그녀와 마음속 어느 한구석이 닿았음을 느꼈다.
“나 그냥 조금 더 있으려고.”
아나스타샤가 쿠키를 하나 더 집어 들며 느긋하게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민폐 끼치지 말라는 듯 말했다.
“뭐? 안 돼. 타티아나도 쉬어야 할 것 아냐.”
“그냥 이야기나 조금 더 할 거야. 지금 바로 자러 갈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우리 가고 혼자 있으려면 타티아나도 얼마나 심심하겠어? 안 그래?”
내가 침대에 드러누워 콜록거리고만 있다면 에르네스트의 말대로 편히 잘 수 있게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올바른 방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난 그 정도 환자는 아니었다.
고민하는 에르네스트에게 내가 제안했다.
“예. 괜찮으시다면 조금만 더 있다 가세요.”
길게 바라지도 않는다. 딱 지금처럼만 1시간만 더 있어 줘도 난 오늘 하루 종일 괜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조차도 사실 친구들에겐 해선 안 될 어리광이지만, 난 이대로 이 애들을 보내기엔 너무 아쉬웠다.
에르네스트는 잠시 생각하더니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그래서 아나스타샤, 넌 있으려고?”
“응.”
아나스타샤가 즉답했다. 난 에르네스트가 같이 잠깐 있어 주겠다고 말하려고 그녀에게 물어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미련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됐어. 난 갈게. 나까지 있으면 산만해.”
“전혀 안 그래요.”
“괜찮아. 둘이서 이야기해.”
아무래도 이렇게 세 명이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에르네스트가 자주 도마 위에 오르긴 하지만 그 자체를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않는 것 같다.
다만,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빠져 주는 게 나와 아나스타샤가 편하게 이야기하는 데에 좋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난 결국 그가 돌아갈 차량을 예고르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예고르는 자신이 직접 운전해서 에르네스트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차에 오르기 직전, 에르네스트가 우리를 보며 손을 까딱였다.
“갈게, 내일 봐.”
안 그래도 내일은 정상적으로 학교에 갈 생각이었지만, 내일 보자는 말을 듣고 나니 조금 더 의욕이 났다. 난 문가에 서서 에르네스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차가 저 멀리 떠나고, 나와 아나스타샤는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다.
테이블 위에는 우리가 먹은 차와 다과, 과일 등이 남아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그걸 보더니 손으로 가리켰다.
“살짝 정리 좀 해야겠네.”
당연히 나도 나서서 치우려고 했는데, 아나스타샤는 아프면 가만히 있으라면서 날 꼼짝도 못하게 소파에 눌러놓고는 솜씨 좋게 다기들을 척척 챙겨선 주방 쪽으로 가지고 갔다.
지나가다가 그걸 본 나제즈다가 와서 잠깐 도와주는 것으로 테이블은 순식간에 깔끔해졌다.
난 아무것도 안 하고 넋을 놓고 있다가 아나스타샤가 옆에 와서 앉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리모컨을 휙휙 돌리곤 탁 잡더니 물었다.
“텔레비전 틀어도 돼?”
“아…… 그래요.”
응접실의 텔레비전 화면이 빛나고, 아나스타샤는 리모컨으로 채널을 몇 번 넘겼다.
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아나스타샤가 채널을 넘겨 주는 대로 시선을 맞추었다. 재미있는 건지 재미없는 건진 잘 모르겠다. 그냥 뭘 봐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평일 오후엔 그리 볼 만한 게 없다면서 대충 클래식 방송이 나오는 채널에 맞춰 놓고는 리모컨을 소파 옆에 내려놓았다.
“…….”
한동안 그녀도 나도 말이 없었다. 텔레비전에선 쉼 없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어쩐지 고요했다. 난 이 고요함이 너무나 편안했다.
지금까지 별로 느끼지 못했던 피로가 스멀스멀 몰려왔다. 난 소파에 파묻힌 채 자면 건강에 좋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살짝 가물거릴 때였다. 나와 비슷한 포즈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 귀찮진 않았니?”
“……?”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난 아나스타샤가 병문안을 오겠다고 메시지를 보낸 아침부터 오로지 그녀가 오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고, 모든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다.
그녀와 에르네스트가 오고 나서부터 비로소 숨을 쉬고 움직일 수 있게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에르네스트가 와서 곡을 보여 준 덕분에 기분 좋은 일도 있었다. 그는 내가 고안한 기호를 구세프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내면서까지 자신의 악보에 사용하겠다고 했고, 게다가 마음대로 써도 될 것을 굳이 로열티를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 곡을 연주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을 내게 헌정하는 것으로 들어준 건 정말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개인적인 타산에 앞서, 난 그가 훌륭한 음악가의 길을 따라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가장 큰 기쁨을 느꼈다.
며칠 전 아나스타샤가 리처드와 대결을 하면서 알캉을 멋지게 연주해 냈을 때 느꼈던 기분과 비슷했다.
특히 리처드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난 이 애들이 조금도 잘못되는 일 없이 잘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참을 느꼈다.
내가 있는 것이 그렇게까지 잘못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믿음.
그건 내가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게 도와주는 많은 도움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난 갑자기 뒤섞이는 생각들과 감정들을 잠시 지켜보다가, 옆으로 슥 밀어 놓고는 아나스타샤에게 거꾸로 물었다.
“아나스타샤야말로 오늘 괜찮나요.”
그녀는 콩쿠르 준비도 해야 하는데, 이렇게 시간을 빼앗겨도 되는 걸까. 이 와중에도 난 그런 것들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데리고 오길 잘했지?”
“예?”
“에르네스트 말이야.”
그녀가 데리고 온 거였나?
가만히 돌아보니 아나스타샤는 깊게 생각할 것 없다는 듯 키득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젠 갔으니까 내 알 바 아니고…… 음, 잠깐만 있으려고 했는데 그냥 오늘 자고 갈까?”
“갑자기 그러셔도 되나요?”
“안 될 건 또 뭐야? 집에 전화 한 통화만 하면 되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요?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그녀는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선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 아까 파인애플 손질법을 듣는데 드미트리 셰프가 오늘 나더러 저녁 식사 하고 가는 거냐면서 내가 좋아하는 특별 메뉴를 준비하겠다고 하더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난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 하하하하. 그랬나요? 정말요?”
“응.”
아나스타샤는 종종 와서 자고 가기도 했으니까, 드미트리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난 연신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네요. 그렇죠?”
아나스타샤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누가 봐도 내가 발목을 잡고 있지만, 대신 아나스타샤를 위한 특별 메뉴가 준비되어 있다면…… 그녀도 조금은 괜찮다고 생각해 주지 않을까.
콩쿠르 연습은 저녁에 내 연습실을 빌려 주기로 하자. 난 지금 그냥 피아노를 빌려주는 것 외에 다른 도움을 줄 수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아나스타샤.”
“또 그런다.”
“고마워요…….”
난 중얼거렸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수마가 덮쳐 왔다. 저 멀리 있는 텔레비전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빛 뭉치로 보이기 시작했다.
귀에 들리는 소리들도 점점 하나로 뭉쳐서 분간이 안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면서도, 난 곁에 있는 온기만큼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
다음 날, 아나스타샤와 함께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반 친구들이 반겨 주었다.
“타티아나, 왔니?”
“감기였다며.”
“몸은 좀 어때?”
난 걱정을 표하는 친구들에게 이젠 괜찮다고 분명히 말해 주었다. 정말이었다.
자리에 앉자 발렌티나가 옆에 다가와서 말했다.
“어젠 못 가 봐서 미안해, 타티아나. 대신 아나스타샤 보냈는데 괜찮았니?”
아나스타샤가 바로 매섭게 으르렁거렸다.
“누가 누굴 보내?”
“뭐 어때서? 네가 대표였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잖아?”
듣고 보니 또 그랬다.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는 것 같았지만 발렌티나와 길게 싸울 생각은 없는지 못마땅한 듯 노려보기만 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마지막으론 리처드가 있었다.
“타티아나.”
저번 미술관에 갔다 온 이후로는 또 처음이다. 난 약간 묘한 심정으로 리처드를 올려다보다가, 이상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리처드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안부를 물어 왔다.
“괜찮아?”
“예.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나 역시 별로 특별하지 않게 그를 대했다. 늘 평소 우리가 이야기하는 방식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밝게 대답하자 리처드는 조금 말이 없어지더니 문득 엉뚱한 소리를 했다.
“혹시 시간이 부족하진 않았어?”
“……무슨 말씀이신가요?”
“…….”
이해가 되지 않아서 되물었는데 리처드는 바로 대답해 주는 대신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물론이고 다른 아이들도 주변에서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적당히 시끄러운 분위기였다.
리처드는 이 분위기에 섞이지 않고 복도 쪽으로 슥 손짓했다.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는 조용한 곳을 원하는 듯 말했다.
난 리처드가 평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진 않다는 기분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