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1화
교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잠시 말없이 복도를 거닐었다.
리처드는 곧바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로서도 무언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나 역시 그렇고.
잠시 지나서야 그가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춥네. 어디 들어가서 이야기할까? 감기에서 이제 막 나았으면 조심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내 몸 상태는 멀쩡했기 때문에 복도에서 이야기를 해도 상관없겠지만,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럴까요.”
우린 멀리 갈 것 없이 근처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곧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라 누구도 사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리처드는 연습실을 서성이더니 벽에 기대어 섰다. 난 살짝 떨어진 곳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
리처드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예상되는 바가 있었다.
그는 내 상황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내 피아노에 대해선 안다. 때문에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습하면서 힘들어하는 내게 조언을 해 주고 힘을 북돋아 주기도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도 안 된 지금. 난 모든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가 물어본,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느냐는 말은 결정을 내리기에 너무 이르지 않았느냐는 말과 같았다.
난 그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그에게 일단 전해 주어야 할 일이 떠올라서 화두를 던졌다.
“리처드. 있잖아요, 저번에 해 주셨던 이야기.”
“무슨 이야기?”
내가 먼저 말문을 열 줄은 몰랐는지 리처드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난 손가락을 들어 눈앞에 긴 호선을 그렸다.
“북극해 항로 사업이요.”
“아, 그거.”
리처드가 살짝 관심을 보였다. 그가 말해 주었던 것이니 궁금할 만도 하겠지.
“며칠 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마침 아버지와 오빠가 그 이야기로 대화를 나누셨는데…… 긍정적으로 보고는 있지만 아직 검토 단계라고 하셨어요.”
“그렇구나.”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투였다. 리처드는 그저 그가 했었던 이야기를 내가 흘려 넘기지 않고 제대로 기억해 주고 있었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리처드가 언급해 준 덕분에 전혀 모르고 있던 분야에 대해 미리 조금 알아볼 수 있었고, 이번엔 그냥 듣고만 있지 않았다.
“전 본래 그런 대화에 끼어들지 않지만, 검토 중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생각나는 대로 살짝 의견을 내 보기도 했죠.”
“어떤 의견?”
“관광에 대해 말씀드렸더니 흥미로워하셨던 것 같아요.”
리처드는 마치 아버지가 보였던 표정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작년 가을 오케스트라 캠프를 갔다 왔을 때 여객선에 탔었거든요. 그 배가 북극해 무르만스크에서 온 배였어요.”
“……그래?”
“무르만스크에서 다른 지역으로도 많이 갈 수 있게 된다면 여행객들도 많아지지 않을까 해서요.”
춥기만 한 북극을 관광한다는 건 웃기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리처드는 잠시 내 이야기를 곱씹더니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건 비웃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송업만 떠올린 난 상상도 못 할 미래네.”
생각치도 못 한 일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즐겁다는 듯 이야기하는 리처드를 보며 나도 웃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로 칭찬도 받았어요. 리처드 덕분이에요.”
“내가 뭘.”
리처드는 괜한 소리 하지 말라는 듯 한 손을 휙휙 흔들었다.
그는 상당한 부담을 안고 내게 이러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었지만, 그건 잘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다시 슬럼프를 마주한 날 위해서였다.
그는 그저 초자연적인 이야기들에 관심이 있는 조금 특이한 친구로 보이길 바라고 있다. 난 그 선을 넘어서지 않기로 했다.
잠깐 웃음이 오가는 것으로 아까보다 훨씬 편하게 이야기 할 만한 분위기가 되었다. 이제 그가 꺼내려고 하는 본론으로 들어가야 했다.
난 부드럽게 대화를 한 발자국 진전시켰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빠르게 괜찮아질 수 있었던 것 역시 리처드 덕분이죠.”
“…….”
혹시 시간이 부족하진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리처드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난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그를 마주 보았다.
“타티아나.”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가 날 불렀다.
“왜 피아노를 치고 있어?”
내게 그 말은 왜 살고 있느냐, 혹은 왜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느냐는 질문과 똑같이 들렸다.
예전 같았으면 스스로의 음악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이제 난 그렇게 당당하게 답할 수 없게 되었다.
“……할 수 있으니까요.”
잠시 고민 끝에 나온 대답은 단순했다.
어느 곳으로 향하기 위해 힘과 방향이 필요하다면, 힘이 빠져 버린 방향뿐인 대답. 나 스스로도 내 대답이 불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리처드는 내가 꽤 오래전부터 방향만을 좇고 있었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래, 넌 예전에도 이야기한 적 있었지. 연주자의 업이란 신이 내린 것이니 의심하지 말고 그리 살아야 한다고.”
한승우의 아버지와 논쟁을 벌였을 때 내가 했었던 말이었다. 거의 신앙적 도그마에 의존하는 말.
어쩌면 난 꽤 오래 전부터 힘이 빠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저런 생각들을 하며 돌이켜보고 있는데, 리처드가 손등으로 벽을 툭 치며 말했다.
“하지만 사실 우린 그렇게 경건한 마음만 지니고 피아노 앞에 앉는 게 아니잖아?”
그는 연습실 밖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클래식 음악이라는 거대한 흐름의 선두에 서고 싶어 하는 에르네스트도 있고, 최근의 아나스타샤처럼 누군가를 이기고 싶어 하기도 하고.”
“…….”
“혹은 그저 원하는 곡을 연주하고 싶어서 앉기도 하고.”
리처드의 엄지손가락은 내 쪽을 향하다가 슥 내려갔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던 곡은 어떻게 됐어? 타티아나.”
“…….”
날 불러냈을 때부터 예상했던 질문이긴 하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 태연하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괜한 과민 반응을 보여선 안 된다.
난 미리 생각해 두었던 대답을 꺼내들었다. 막 입을 열기 직전, 가슴 한구석이 따끔했지만 움츠러들지 않고 견딜 만 했다.
“그만두려고 해요.”
이쯤이면 평범한 대답이었다.
다들 연습하다 보면 잘 안 되는 곡이 있기 마련이고, 무한정 시간을 쏟아부을 순 없는 노릇이니 가끔은 그만두어야 하는 곡도 있었다.
내가 붙잡고 있던 곡도 그런 것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리처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번은 쳐 봤어?”
그게 내 소원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신경질이 나는 것을 느꼈다. 점점 생각을 길게 하기 힘들어졌다. 이런 대화도 하기 싫었다. 난 딱 자르듯 말했다.
“구세프 선생님께서 대신 비슷하게 연주해 주셨으니 괜찮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 너도 알지?”
당연히 알고 있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었다.
난 리처드를 노려보았다. 억누르고 있던 스트레스가 목소리를 타고 새어 나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너무 멀리 가진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약간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해 보란 말이었어.”
오해하지 말라는 듯 이야기하는 리처드를 보니 다시 이성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내가 절망적으로 망가져 가고 있었던 것을 알아본 리처드가 그간 숨겨 두었던 이야기까지 하면서 날 걱정했다는 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 마치 책임을 전가하듯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절대 해선 안 될 짓이다.
내가 죄책감으로 시선을 피하자 리처드는 조금 더 차분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사실 난 재작년까지만 해도 네가 그냥 슬럼프에 빠졌겠거니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이젠 알지.”
“…….”
“소리를 바꾸곤 필사적으로 연습해서 최고의 무대에 섰던 것도 네겐 준비 과정이었을지 모르겠어.”
그는 내 사정에 대해 정확하게 알진 못하지만, 거의 선생님들과 비슷할 정도로 날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고 리처드를 바라보니 그는 안타깝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런 준비를 거치고 이번 곡도 열심히 준비했었잖아? 네가 해석을 그린 악보를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었는데. 그걸 겨우 몇 주 연습해 보고 그만두기엔 아깝지 않아?”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파고든다.
난 친구가 이런 말을 해 준다는 것이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슬프고 짜증나기도 해서 엉망진창으로 범벅이 된, 알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혼탁한 무언가에 발을 담그는 것도 잠시. 난 힘을 주어 다리를 확 빼냈다. 신뢰할 수 없는 내 기분 같은 것들은 접어 두고, 똑바로 생각하기로 했다.
사흘 전, 만약 내가 기절하지 않고 끝까지 쇼팽 피아노 소나타에 매달렸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난 거기에 대해 상당한 확신이 있었다.
겨우 몇 주라 아깝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느껴 버렸다.
난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이젠 충분해요.”
리처드도 지금 학교에서 실력을 숨기고 다니기로 선택했다고 했었지. 그도 이렇게 포기했는데 나라고 억지를 쓸 이유가 그렇게 확실하게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확실하게 존재하는 이유들은 그보다 훨씬 더 실체적이고, 환하게 빛난다.
“이젠 현실을 지키는 게 훨씬 더 소중해요.”
내가 여기에 있어 다행이라고 말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한 난 어디로도 사라지지 못할 테지.
확실한 것들에 대해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 좋았다.
리처드는 내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다른 애들 말하는 거야?”
“…….”
“네가 책임감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가 하는 이야기들을 모두 이해하고도, 그는 그렇게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책임감이라고 표현하니 내가 무겁게 무언가 짊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무게감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건 내 어깨에 올라가 있지 않고 발치에서 무게 추가 되어 주고 있었다.
내가 느끼는 이런 기분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리처드는 그런 내 생각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냥 학교 며칠만 더 쉬는 건 어때?”
어제 내 의지로 학교를 하루 쉰 건 사실이지만, 병문안을 와 준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를 보곤 더 쉴 생각 따윈 전혀 들지 않았다.
평범하게 학교에 나와서 친구들과 지내고 싶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하고 싶은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시선으로 리처드를 올려다보니, 그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보니 난 네게 이런 조언밖에 못 하네……. 하지만 타티아나. 책임감으로 학교에 다닐 필요는 없어. 결국 중요한 건 네가 뭘 원하느냐니까.”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리처드와 이야기하는 내내 꿈틀거리고 있던 새카만 감정이 다시 머리를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난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 집중하며 정확하게 내 말을 전했다.
“제가 원하는 건 여기에 있어요.”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이 아니에요.”
리처드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느냐고 쏘아붙일 뻔했다가, 간신히 참았다. 적어도 숨기고 있던 것들을 내게 말해 준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다.
지금으로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튀어나오려고 하는 신경질적인 것들을 가까스로 찍어 누른 게.
아까부터 대화하는 게 힘들다. 이쯤에서 마무리 짓고 싶었다.
“전…… 이 결정을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내렸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
이 말로 선생님들도 납득시켰다. 리처드라고 납득시키지 못할 건 없었다.
그는 무언가 말을 더 하려다가,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다시 삼켰다.
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하지 못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리처드도 모종의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은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옅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갈까요. 수업이 시작하겠어요.”
리처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이번엔 내 뒤를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