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2화
새 학기가 시작되고 며칠이 흘렀다. 그사이 나는 문제없이 생활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한창 엉망이었을 땐 2월의 찬바람을 조금 쐰다고 기침을 하고 따뜻한 물에 손을 녹여야 했었지만, 이젠 컨디션이 좋으니 못 할 것이 없었다.
이렇게나 쉬웠나 싶을 정도로 가볍게 피아노를 다룰 수 있었다. 나는 연주하는 곡들을 따라 여행자가 되기도 하고 노래하는 가수가 되기도 했으며 때론 검투사가 되기도 했다. 피아노 건반은 내가 먹을 빵이자 마이크이자 창칼이 되어 주었다.
종종 피아노 건반을 휘두르다가 멈칫하는 일도 있었지만, 그런 것에도 점점 무감각해졌다.
여러 배역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이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졌다.
“타티아나.”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이제 그들은 그렇게까지 날 필요로 하진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역할이 여기에서 끝났다고 생각하긴 싫었다. 난 조금 더 강인해져야…….
“타티아나!”
“까, 깜짝이야…….”
갑자기 아나스타샤가 옆에서 왁 소리를 치는 바람에 기절하는 줄 알았다.
놀란 눈으로 돌아보니 그녀가 킥킥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러고 있어? 졸려?”
잠깐 생각에 빠져 있었더니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다. 난 별일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아뇨, 잠깐 멍해졌네요.”
“또 열 있는 거 아니니?”
“전혀 없어요.”
늘 걱정이 많은 아나스타샤는 곧바로 염려를 표했지만,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멍하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떠올린 사람들 중엔 당연히 아나스타샤도 있었다. 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살짝 이야기해 주었다.
“저번 주에 아나스타샤가 알캉의 에튀드를 연주했잖아요? 갑자기 생각나서요.”
“정말 갑자기네.”
“그렇죠?”
좋은 의미로 충격적이었던 그 연주는 지금도 귓가에서 들려오고,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였다.
아나스타샤가 피아노 연주자로서 날카롭게 갈고닦은 그 칼날은 지금도 기분 좋게 내 어딘가에 꽂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즐겁게 느끼고만 있으면 언젠가 난 그녀의 옆에 친구로 설 수 없게 된다. 난 그 부분을 분명하게 자각했다.
게다가 아나스타샤는 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발전해 나가는 연주자다.
“나 지금은 그때보다 조금 더 잘할 수 있어.”
아나스타샤는 기대해도 좋다는 듯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연주를 들어 보고 싶다. 훌륭하다고 칭찬해 주고 싶다.
그렇지만 그와 비슷할 정도로, 그녀에게 내 연주를 들려주고 싶다는 충동 또한 일었다.
“전 알캉을 한 번도 연주해 본 적이 없지만…… 아나스타샤의 연주를 보면 저도 조금 연습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이야?”
“물론이죠.”
아나스타샤는 종종 내 레퍼토리를 따라서 연습하곤 했다. 하지만 그 반대로 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저도 해 보고 싶어요.”
그녀는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곧 환한 미소와 함께 화답했다.
“타티아나 너라면 며칠만 연습해도 훨씬 잘하게 될 거야.”
“그렇게 부담 주지 마세요. 저 알캉은 정말 처음이니까요. 몇 번 들어 본 게 전부예요.”
“그거면 충분하지. 넌 한두 번만 들어 봐도 깔끔하게 해석을 갈무리해 내잖아. 테크닉은 말할 것도 없이 나보다 낫고.”
“아나스타샤가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가 낫지.”
서로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연주로 보여야 할 일을 이렇게 입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아무리 부끄럽고 무의미하더라도,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아나스타샤를 보면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 더 이야기를 하려는 찰나, 아나스타샤가 눈치를 채고는 화제를 휙 돌려 버렸다. 살짝 아쉬웠지만 이쯤 해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타티아나. 다음 주에 위클리 연주회 잡혀 있더라? 알고 있니?”
그간 개인적인 일에만 모든 집중력이 쏠려 있어서 그런 건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아…… 그런가요?”
“잠깐만, 공지 뜬 거 보여 줄게.”
내 일인데도 바보처럼 대답하자 아나스타샤가 스마트폰으로 홈페이지에 접속하더니 공지 사항으로 올라온 위클리 연주회 일정표를 띄워서 보여 주었다.
정말이었다. 다음 주 주말. 내 이름이 연주자 명단에 올라와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손끝으로 화면을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더니 내게 말했다.
“학교 홀에 서는 건 오랜만이네?”
“그렇네요. 작년엔 콩쿠르와 연주회 등으로 갈음한 게 많아서…….”
위클리 연주회는 중앙음악학교 학생으로서 해야 하는 수업이자 무대 경험을 쌓는 연습이니 의무적으로 참가하게 되어 있지만 학기 중에 연주회 등이 잡혀 있으면 그걸로 대신할 수 있다. 때문에 난 작년엔 위클리 연주회에 나갈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학기엔 스케줄이 텅텅 비어 있어서 위클리 연주회는 나가 주어야 할 것 같다.
나쁘지 않았다. 일단 무대를 준비하면 조금 더 빠르게 원래의 생활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잘되었네요.”
“타티아나…… 네가 무대에 서는 걸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난 언제 너처럼 의연하게 있을 수 있을까?”
“아하하.”
아나스타샤는 부럽다는 듯 말했고, 난 메마른 웃음으로 흘러 넘겼다.
***
난 미하일 선생님과 차를 마시며 약간 어색함을 느꼈다.
선생님이 어색한 건 아니었다. 그냥 지난번에 쓰러져서 병실에서 뵌 뒤로 내 마음속에 여전히 죄책감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렇게 레슨실에서 마주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자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동안은 이렇게 미하일 선생님과 레슨 전에 차를 한 잔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하나의 의식이자 행복이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차라리 빨리 레슨을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선생님은 나처럼 급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타티아나. 피아노 연습은 하고 있니.”
그간 교내에서 몇 번이나 인사를 드렸으니 내가 이제 멀쩡하다는 건 잘 아실 텐데, 그래도 레슨 전에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으신 것 같았다.
난 주저 없이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엉망이었던 몸을 회복시키면서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는 다름 아닌 피아노가 있는 연습실이었다.
에르네스트나 아나스타샤, 그리고 다른 친구들에게 최대한 뒤처지지 않도록 실력을 만들어 놓아야 했다. 지난 3주간 자해에 가까운 짓을 하면서 무의미한 시간을 많이도 보냈으니 그만큼 열심히 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노력한 만큼 결과는 잘 따라와 주었다.
조금은 약이 오를 정도로 쉽게.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구나.”
미하일 선생님은 작게 중얼거리시더니, 옆에 있는 피아노를 가리키셨다.
“그렇다면 레슨 전에…… 저번 학기에 연주했었던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해 봤으면 좋겠구나.”
“차이코프스키라면 사계 중 8월 말씀이신가요?”
“그래.”
나도 선생님에게 이제 걱정하실 것 없음을 확실하게 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사계라면 지금 바로 연주하더라도 충분한 퍼포먼스를 보여 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멜로디와 리듬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고, 거기에 섬세하게 음색을 입힌다. 색이 칠해진 음악은 보다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다.
난 그렇게 떠오른 음악을 손에 쥐고, 피아노 앞에 앉아선 그 위로 흩뿌렸다.
“…….”
저번 시험에 했던 연주와는 달라져 있었다. 컨디션이 완전히 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거추장스러웠던 것들을 치워 내고, 눈앞을 가리며 달라붙는 것들을 걷어 냈다. 연주에 방해될 것이 없으니 거칠 게 없었다.
이 곡은 프레이징 사이의 박자가 상당히 애매해서 연주자들마다 간극이 굉장히 큰 편인데, 난 루바토를 느끼지도 못하게 빠르게 넘겨 버리는 해석을 택했다. 음악은 조금 더 빨라졌다.
경쾌한 알레그로 비바체는 다음 주제인 돌체 칸타빌레dolce cantabile로 향했다.
음색을 보다 또렷하게 드러내기에 좋은 구간이었다. 난 지시에 따라 노래를 하듯 주제를 불러 나갔다.
차의 향기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
실기 시험 땐 끌어내지 못했던 이미지와 해석을 이번엔 다시 보여 드렸다.
사실 이건 두 번째 시험이나 다름없기도 했다. 지난번 쓰러진 일로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연주자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드리기 위한 시험.
“…….”
3분 남짓 되는 짧은 곡은 금방 끝났다. 난 마지막 도약 피날레를 마무리 짓고 손을 내렸다.
실기 시험 때 이런 연주를 보여 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시험 날 미하일 선생님과 함께 심사를 봐 주셨던 라브렌티 선생님이 내 연주를 듣고는 살짝 기대에 못 미쳤다는 듯 말씀하셨던 게 문득 기억났다.
이번에 미하일 선생님은 무어라 말씀하실까. 옆을 돌아보자 손가락으로 턱을 쓸던 선생님이 짧게 평했다.
“음색도 테크닉도 돌아왔구나. 아니, 돌아갔다고 하는 게 옳을까.”
난 곧장 대답했다.
“돌아온 게 맞다고 생각해요.”
“빠르구나.”
빨리 돌아왔다는 말씀.
길게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너무 빠르다는 투였다. 그건 리처드가 했었던 말과 비슷했다.
모두들 왜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럼 하루라도 빨리 다시 피아노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말고 며칠이고 계속해서 고통스러워했어야 했나?
실패자로 남아 쓰러져서 울고만 있었어야 해?
난 그렇게 깔끔하지 못한 상태로 남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최소한 연주자로서 보이는 모습만큼은.
“빠르지 않아요. 늦을 수 있는 만큼 늦었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도 네 강한 면모겠지만…….”
미하일 선생님은 피아노 쪽을 바라보시며 말꼬리를 흐리시더니, 그대로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타티아나.”
“예, 선생님.”
“네게 어떤 레슨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예?”
당황스러워하는 날 본 미하일 선생님은 그렇게 놀라게 할 의도는 없었다는 듯 조금 더 가벼운 투로 설명하셨다.
“갑자기 무책임한 소리를 해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렇게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레슨을 해선 우리 둘 다 좋지 못할 것 같아 말이다.”
레슨에 한계가 온 것은 아니었다.
내 나이와 실력에 맞는 곡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았고, 미하일 선생님은 그중 적당한 곡을 집어서 내게 건네주실 수 있었다.
선생님은 그냥 내가 실패한 음악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가르쳐야 할 음악에만 집중하시는 편이 쉬웠을 터다.
“난 네게 도움이 되는 레슨을 하고 싶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편한 쪽을 택하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금 레퍼토리를 몇 개쯤 늘리는 건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난 말없이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대체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그런데 미하일 선생님은 그저 질문에 대답만 해 주시는 분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질문을 던지기도 하신다.
“어떤 레슨을 원하는지 듣고 싶구나. 타티아나.”
“……어떤 레슨이요?”
“그래. 지금 네가 원하는 것 말이다.”
지금 내가 원할 수 있는 건 없다.
선생님은 뭐든 이루어 주실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사실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제 그 정도는 분별할 수 있어야 할 때였다.
머리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이대로…… 잘하고 싶어요.”
“이대로 말이지.”
“예. 당장 다음 주엔 위클리 연주회도 잡혀 있고요.”
“위클리? 아.”
미하일 선생님은 책상에 있던 서류를 하나 집어 다시 확인하시고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약간의 고민. 하지만 선생님도 이젠 아실 터다.
저번 학기 실기 시험에서의 내 연주와 방금 보여 드린 연주. 차이코프스키의 사계로 동일한 곡이지만, 두 곡 중에 어떤 곡이 더 좋은 곡이냐 묻는다면 백 명에게 묻더라도 지금 연주한 쪽을 택하겠지.
나나 선생님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이유는 없었다. 특히나 음악에 대한 식견이 분명한 연주자라면.
하지만 그래도 미하일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내게 물어보셨다.
“쇼팽 소나타를 연주할 생각은 없겠지.”
“그 곡은 제가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아니에요.”
그간 한 번도 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는데. 정말 처음이었다.
하지만 살짝 치민 감정은 선생님에 대한 죄책감에 눌려 금세 사라졌다. 난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미하일 선생님이 어찌 나보다 더 아쉬워하시는 것 같아서, 괜찮다는 뜻으로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생님은 결국 내 의사를 존중해 주셨다.
“알겠다. 타티아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자꾸나.”
“예. 선생님.”
여전히 선생님은 지금 내게 레슨을 하는 것이 내게 도움이 되는지 미심쩍어하시는 것 같았다. 난 그 불안이 괜한 걱정임을 분명하게 보여 드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