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43화 (443/1,277)

##  443화

레슨 시간은 위클리 연주회에 올릴 곡을 찾는 데에 쓰였다.

위클리 연주회엔 여러 학생들이 무대에 서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다. 소나타를 연주하더라도 한 악장. 그렇기에 보통은 훨씬 더 짧은 곡들을 고른다.

냉정하게 보자면 그렇게까지 부담스럽거나 한 무대는 아니었다. 난 이보다 훨씬 큰 무대에 서 본 경험이 많았고,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도 많았다. 솔직히 지금 당장 위클리 무대에 오르라고 해도 곧바로 무대를 음악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난 큰 연주회를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그리고 곡도 레퍼토리에 없는 곡을 새로 연습하기로 정했다.

지금까지 연습해 온 곡들을 보다 완성도 높게 가다듬어서 무대에 올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겠지만, 난 그렇게 기존에 할 수 있었던 곡들을 더욱 잘하게 되는 것보단 모르는 곡까지 손을 뻗고 싶었다.

에르네스트가 작곡을 시작한 것처럼,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알캉을 연주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때문에 일부러 지금까지 익숙하지 않았던 곡들을 추려서 선생님에게 의견을 여쭈었다.

악보들을 찾아서 초견으로 연습을 해 보고, 선생님의 의견을 받아 또 다른 곡들로 넘어가는 일을 열 번쯤 이어 가자,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2시간 정도 흐른 뒤. 난 선생님과 상의를 마치고 위클리에 올릴 곡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그래, 이렇게 스크리아빈으로 하자꾸나. 오늘 고른 곡으로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스크리아빈. 난 그의 곡들도 몇 곡 연주해 본 바 있었지만 그리 많이 연구해 본 적은 없었다. 내 저변을 넓히는 데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물론 무대의 완성도도 흠 없이 할 생각이다.

“작은 문제도 없게 할게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미하일 선생님도 쓴웃음으로 답했다. 직접 말씀하시진 않지만 혹여나 무리하진 말라는 것 같다.

저런 눈빛을 안 받으려면 정말 컨디션 관리를 잘 해야 할 것 같다.

난 레슨실에서 나와선 반에 들렀다가 스터디룸으로 향했다. 학기 초부터 스터디룸에 앉아 공부하는 친구들은 별로 없었지만, 그냥 함께 이야기만 조금 나누어도 좋을 것 같았다.

“이 문제는 여기서 이걸 이렇게 이쪽으로 넘겨 보면 돼.”

“어…… 아! 됐다!”

아무도 없으면 정말 슬플 뻔했는데, 다행히 스터디룸엔 두 명이나 이미 와 있었다. 아나스타샤와 류보비였다. 두 사람은 가까이 붙어 앉아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인기척을 느끼곤 내 쪽을 돌아보았다.

“타티아나, 왔니?”

“예. 레슨이 이제 막 끝났네요.”

난 코트를 벗으며 아나스타샤의 옆에 앉았다.

아나스타샤와 류보비는 교과서 한 권을 앞에 두고는 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아나스타샤가 특별 과외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류보비의 공부를 봐 주고 계셨나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조금. 류보비가 오늘 수업 시간에 배우면서도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게 있다고 해서…….”

“언니! 전혀 이해 안 갔던 건 아니에요! 이젠 완벽하게 이해했고요!”

그런데 류보비는 전혀라는 단어를 극구 부인하며 왁 소리를 냈다. 약간 억울해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류보비를 보며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래? 완벽히 이해했다고?”

“무……물론이죠.”

“그럼 이것도 풀어 볼 수 있겠네. 자.”

그리고 펜을 들더니 교과서 옆의 빈 칸에 순식간에 문제를 하나 더 만들어 냈다.

존재하지 않았던 문제가 갑자기 생겨난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류보비가 당황해했다.

아나스타샤는 문제 옆을 펜으로 쿡쿡 찔렀다.

“풀어 볼래?”

“…….”

“제한 시간은 30초.”

“너무 짧잖아요!”

“아직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고 인정한다면 시간을 더 줄게.”

“윽…….”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머리에 뻑뻑하게 차 있던 무언가가 녹아내리며 사라져갔다. 온몸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껴졌다.

난 나른한 기분에 저항하지 않고 책상 위로 살짝 웅크리며 아나스타샤에게 속삭였다.

“너무 괴롭히진 마세요.”

아나스타샤가 정말 류보비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그저 귀여워서 이런다는 걸 잘 알지만, 장난스레 그렇게 말했더니 그녀는 샐쭉 미소를 지으며 다시 옆을 향해 물었다.

“류보비. 내가 괴롭히고 있니 지금?”

“아……니요…….”

“이것 봐.”

지금은 정말 괴롭히는 것 같은데…….

내가 어색하게 웃자 아나스타샤는 펜을 휙 돌리더니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레슨 받았으면, 위클리에 올릴 곡 정했니? 어떻게 했어?”

그녀는 꼼꼼한 미하일 선생님이 내 위클리 연주회를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난 팔에 파묻고 있던 머리를 약간 들며 말했다.

“스크리아빈으로 하기로 했어요.”

“스크리아빈도 괜찮지. 그런데 평소 레퍼토리랑은 약간 다른 것 같네? 원래 넌 레퍼토리가 넓긴 했어도 스크리아빈은 잘 안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간 지내면서 아나스타샤는 내 레퍼토리와 성향 등을 상당히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난 스크리아빈을 종종 연주하긴 하지만, 확실히 연주회에 올릴 곡으로 선곡하진 않는 편이었다. 웃으며 가볍게 긍정했다.

“맞아요. 공부 범위를 조금 넓혀 보려고요.”

“듣기만 해도 소름끼쳐.”

“아하하, 원래는 알캉을 하려다가, 시간도 부족하고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 같아서 바꾼 거예요.”

“그러니.”

더 많이 공부하고 싶다는 말에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이던 아나스타샤는 알캉의 이야기를 듣고는 조용히 납득한 것처럼 보였다.

난 그녀의 진지한 옆얼굴을 잠시 감상하다가, 때마침 잘되었다 싶어서 살짝 불렀다.

“음…… 그래서 말인데요, 아나스타샤.”

“응?”

“저 곧장 돔 끄니기에 가서 악보를 사려고 하는데, 같이 가지 않으시겠어요?”

난 악보를 사서 당장 오늘 저녁부터 연습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지체할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런데 네 연습실 책장에 스크리아빈 악보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무지카 판 말고 헨레 판으로 연구하고 싶어서요.”

“아, 그래. 넌 깔끔한 걸 좋아하는 편이었지.”

예고르가 만들어 준 별관의 연습실엔 클래식 작곡가들의 피아노곡 악보가 거의 다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출판사들의 악보가 모두 있는 건 아니었다.

원하는 출판사의 악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도 많았고, 그럴 때 난 직접 서점에 가서 악보를 사 오기도 했다.

그렇게 아나스타샤와 함께 서점에 갈 약속을 잡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류보비가 교과서를 아나스타샤의 앞으로 밀었다.

“아나스타샤 언니! 다 했어요!”

30초는 지난 것 같지만 그렇게 많이 초과한 것 같지도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류보비의 답안을 체크하고는 살짝 놀랐다는 듯 말했다.

“……분명히 이해한 것 같네.”

“그렇죠? 그렇죠?”

“잘했어.”

“칭찬으로 끝이에요?”

아까 당한 걸 갚아 주겠다는 듯 류보비가 말했다. 그리고 류보비는 아나스타샤와 내 쪽으로 번갈아 눈빛을 보내왔다.

칭찬으로 끝내지 말고 상을 달라는 것 같은데, 무슨 상을 원하는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나보다 눈치가 열 배는 빠른 아나스타샤가 그걸 못 알아챌 리 없었다.

그녀는 내 쪽으로 무언의 허락을 구해 왔고, 난 아주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나스타샤는 소리 내어 웃더니 류보비에게 말했다.

“류보비. 우리 신아르바트에 있는 서점에 갈 건데…… 이렇게 교과서에다가 문제를 냈으니까 내가 공책이라도 사 줄게. 어떠니? 같이 갈래?”

“같이 갈래요!”

기다렸다는 듯 말하며 류보비가 교과서를 탁 덮었다. 바로 가방을 싸는 모습에 나와 아나스타샤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 세 명은 신아르바트에 있는 대형 서점. 돔 끄니기로 향했다.

여기에 올 일이 많이 없었는지 신나 하는 류보비를 데리고 아나스타샤는 정말로 공책을 한 권 사 주었다.

“정말 사 줄 줄은 몰랐어요…….”

“난 거짓말은 잘 하지 않는데?”

“잘 쓸게요.”

“응. 나도 앞으로 그 공책에서 문제 많이 내 줄게.”

“네??”

류보비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눈을 홉떴다가, 불과 몇 초 전 아나스타샤가 한 말을 떠올렸는지 창백한 얼굴로 질려 갔다.

선물 받은 걸 돌려줄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모습을 한참이나 즐기다가 나중에야 농담이니 걱정 말라고 말해 주었다.

그렇게 공책도 사고, 아나스타샤가 사고 싶었다던 음반도 산 뒤 우리는 악보가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갔다.

“…….”

난 이미 어떤 악보를 살지 생각해 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냥 헨레 판 악보들이 있는 곳에서 원하는 악보를 집고 곧장 돌아서니 류보비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빨리 골랐나 생각이 들다가도, 길게 시간 들여 고를 이유도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성악 악보가 있는 곳도 한번 볼까요?”

“저요? 아뇨, 전 괜찮아요.”

류보비는 손사래를 치더니 그 손을 슥 내리다가 손가락을 들어 내가 들고 있는 악보를 가리켰다.

“이번에 언니가 연구할 악보예요?”

아무래도 내 악보에 흥미가 있는 것 같다.

류보비는 성악과이므로 피아노곡에 흥미를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저번에 내가 숙제를 할 때 옆에 있었던 이후로 그냥 연구하는 것 자체에 관심이 생긴 것 같았다.

“그렇죠.”

“저번처럼요?”

아니나 다를까, 류보비는 저번처럼 다이어그램을 그리고 새 기호를 표시할 것이냐고 묻고 있었다.

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을 거예요.”

류보비가 왜 이번엔 저번처럼 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이유들을 찾고 있는데, 류보비는 예상 밖의 말을 했다.

“어쩐지…… 그럴 것 같았어요.”

“그럴 것 같았다니요?”

내 질문에 류보비는 스스로도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무언가 느낌을 받긴 했는데 그걸 말로 표현하려니 어려운 모양이다.

그녀는 한참이나 골똘히 생각하고는, 이윽고 내게 말했다.

“그냥…… 그렇게 연구하는 건 힘들잖아요? 어렵고. 그러니까 이번엔 평범하게 연구하려는 거죠?”

이번엔 내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하고 싶은 말들은 있는데, 할 수 있는 말들은 없었다.

“예. 그래요.”

결국 난 류보비보다도 똑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돔 끄니기에서 나온 우리들은 신아르바트에 있는 디저트 전문점에 가선 디저트와 케이크들을 마음껏 즐겼다.

특히 과자를 좋아하는 류보비는 거의 천국에 온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내게 살짝 말해 주길, 원래 이런 곳에 자주 오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엄하게 금지하고 있었다고 했다.

가정에서 그렇게 금지하고 있는 것이라면 전화로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류보비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전화하지 말아 달라 부탁하는 바람에 이번엔 류보비의 어머니에게 죄송하지만 딱 한 번만 류보비의 어리광을 들어주기로 했다.

케이크를 조금 먹는다고 해서 큰 문제가 있진 않겠지…….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먼저 아나스타샤를 집에 데려다주고 류보비를 데려다주자, 류보비가 날 끌어안으며 행복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역시 그녀를 살짝 안아 주었다.

“저야말로요.”

오늘 류보비는 케이크에 행복해했지만, 난 그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정말 아무것도 먹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좋았을 것 같다.

류보비는 싱글벙글 웃으며 날 놓아주고는 집으로 뛰어올라갔다. 난 류보비가 다치지 않고 제대로 올라가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그제야 다시 뒷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

갑자기 너무 조용해졌다.

운전하고 있는 빅토르가 있으니 그에게 말을 걸어도 되겠지만, 난 고요 속에서 뇌리에 파고드는 어떠한 선율에 주목했다.

천천히 가방에서 오늘 산 악보를 꺼냈다. 빳빳한 페이지를 몇 장 넘겨 내가 연주해야 할 곡을 찾아냈다.

“…….”

수많은 전문가들의 손에 의해 작곡가의 의도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악보였다.

눈으로 곡을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거기에 내 목소리만 음색으로 입혔다.

어려울 것도 헷갈릴 것도 없었다. 내 목소리는 하나뿐이었고 그게 손으로 옮기는 기술과 합쳐지면 어떤 소리가 될지는 직접 연주하지 않아도 떠올릴 수 있었다.

난 그게 무척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악보를 읽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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