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4화
중앙음악학교의 모든 학생들은 매학기 한 번씩은 위클리 연주회에 나가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8학년에 편입을 와서는 지금까지 3번의 학기를 보내며 처음 한 번만 위클리 연주회 무대에 올랐다. 나머진 전부 외부 연주회에 나가는 것으로 대신한 것이다.
때문에 많은 학생들은 이번 학기에도 타티아나가 외부 연주회 활동을 할 테니 위클리 연주회에 모습을 보일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타티아나의 이름은 연주자 리스트에 들어가 있었다.
타티아나를 아는 학생들은 그녀가 편입을 오자마자 나간 위클리 연주회에서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3번을 연주해서 교내에 슈만 붐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기대감은 작년 한 해 동안 타티아나가 해낸 연주회들과 합쳐져 부풀려졌고, 타티아나가 위클리 연주회 연주자 리스트에 올랐단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이번에도 슈만인가요?”
“아니면 다른 작곡가?”
에르네스트는 목이 말라 정수기에서 물을 한 잔 마시고는 복도를 어슬렁거리다가, 타티아나가 다른 학생들에게 붙잡혀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자신도 저런 식으로 몇 번이나 질문을 받은 적이 있음을 떠올렸다.
무슨 곡을 연주할진 들어 보면 알 텐데 굳이 먼저 알고 싶어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가끔은 정말 정신 사나울 때도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딴청을 피우며 그쪽을 지켜보았다.
타티아나도 재작년 그녀의 슈만에 감동한 학생들에 의해 시달린 경험이 있으니 잘 대처하겠지만 어쩐지 약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관심을 그리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어요. 비밀이라서요.”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타티아나는 잘 대처했다. 기분 나쁘지 않게 웃으며 답하는 모습이 능청스럽게 보일 정도였다.
에르네스트는 쓸데없는 걱정을 한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져서, 타티아나에게 말을 걸려다가 그냥 돌아서서 반으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먼저 에르네스트를 발견한 타티아나가 다가왔다.
“에르네스트. 뭐 하고 계시나요?”
“물 마셨어.”
“……?”
있는 그대로 대답했더니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갑자기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한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괜히 저쪽 정수기에 갔다 오는 길이라고 쓸데없이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이야기를 틀었다.
“아무튼 지나가다가 봤는데…… 관심 있는 애들이 많네. 이번 위클리 준비는 어때?”
“잘 되어 가고 있어요. 물어봐 주셔서 고마워요.”
“기대하고 있을게.”
“예. 에르네스트.”
에르네스트는 그 이상 무언가 묻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미 타티아나쯤 되는 연주자라면 위클리 연주회는 이런 가벼운 격려와 응원 정도로 충분했다. 괜히 호들갑스럽게 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약간 불충분하다는 듯 비스듬하게 에르네스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말소리를 살짝 낮추면서 슬쩍 다가온 타티아나가 물었다.
“제가 어떤 곡을 선곡했는지 물어보지 않으시네요?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저번에 언제?”
“반에서요. 아나스타샤랑 이야기했을 때요.”
“그 애는 알아?”
“알지요.”
언젠지는 기억났다. 바로 어제 반에서 다른 애들과 있을 때 아나스타샤가 위클리 이야기를 꺼내긴 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때도 지금처럼 응원만 했었다.
아나스타샤는 알고 있다고 하니까 물어봐도 괜찮을 것 같지만, 에르네스트는 짐짓 쿨하게 말했다.
“궁금하긴 한데, 괜히 물어볼 것 없잖아. 너야 연주할 줄 아는 곡들도 많으니까 잘하겠지.”
요 근래 서로 스케줄이 많아 같이 연습실에서 연습을 한 적이 없어서 무슨 곡을 연습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위클리 무대에 무슨 곡을 올릴지도 잘 모른다.
그래도 잘할 거라고 믿는다.
“…….”
타티아나는 잠시 말이 없다.
에르네스트는 결국 분위기에 이기지 못하고 떨떠름하게 물었다.
“물어봐 줘?”
“음…….”
이제 와서 그건 그것대로 이상하다는 듯 타티아나는 잠시 침음을 흘리더니, 곧 싱긋 웃으며 말했다.
“들으러 와 주실 거라면 상관없는 일이긴 한데요…… 생각해 보니까 지금 작곡가를 말씀드리면 더 기대해 주실 것 같네요.”
그게 무슨 말이야?
에르네스트가 의아해하기도 잠시. 타티아나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작게 잦아든 목소리로 에르네스트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스크리아빈을 연주할 생각이에요.”
“……뭐?”
생각도 못 했던 작곡가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에르네스트는 스크리아빈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기 전에, 당장 타티아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각났다.
“스크리아빈 잘 안 치는 편이었잖아?”
“맞아요. 스크리아빈은 사실 리스트와 함께 에르네스트의 전문 영역이었죠. 우리 사이에 자신 있는 분야가 겹치는 건 라흐마니노프 정도였고요.”
그 말대로 에르네스트는 스크리아빈을 꽤 깊게 연구하면서 자신의 레퍼토리에 넣고 있었다. 러시아 피아니즘에 천작하는 에르네스트로선 낭만과 현대음악의 가교라 할 수 있는 스크리아빈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창피한 일이지만, 재작년 타티아나에게 실력을 제대로 보여 주려는 생각으로 위클리 연주회에서 꺼냈던 곡도 스크리아빈의 소나타였다.
그동안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를 상대할 때 라흐마니노프로 많이 상대해 왔다. 스크리아빈의 곡을 놓고 대결을 하거나 함께 연구를 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타티아나가 강하게 말했다.
“하지만 저도 연습해 봐야죠. 스크리아빈도, 그리고 알캉도.”
“…….”
알캉은 갑자기 왜 또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타티아나가 알캉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타티아나의 레퍼토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다. 그걸 더더욱 넓혀 나간다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상상도 안 간다.
타티아나는 어느 한 작곡가나 시대에 집중하지 않고 클래식 음악 자체를 두루 다룰 생각이었다. 그녀에겐 그럴 의지도, 능력도 분명히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타티아나의 태도는 약간 묘한 부분도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느낀 타티아나는 긍정적인 모험가처럼 이러저런 곡들을 탐험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타티아나가 거의 집착에 가까운 수준으로 쇼팽의 소나타를 연구하는 모습을 본 에르네스트는 그 생각에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다.
“…….”
그 모든 생각을 종합해 본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를 제대로 완성해 내지 못했다는 충격적인 결론에 도착했다.
대체 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정도는 일주일이면 충분히 연주하고도 남을 정도의 실력자다. 에르네스트는 그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그 후로 물어본 적도 없었다. 당연히 만족할 만큼 완성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실패했다. 때문에 쇼팽을 내려두고 고개를 돌렸다.
“타티아나.”
“예?”
에르네스트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사실인지 타티아나에게 물어보려다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자존심도 상당히 강한 편이다. 늘 강인하게 있으려 하고 내색하지 않는다. 그 모습이 허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긍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아는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굳이 보이지 않는 부분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원래 위클리 연주회에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올려야 하지 않았느냐고 타티아나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결국 그 역시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곡은 뭘로 하기로 한 건데?”
“그건 비밀이에요.”
“왜 말을 해 주다가 말아?”
“그래야 더 기대해 주시잖아요.”
에르네스트는 반론할 수 없었다. 이미 스크리아빈이라는 이름을 듣고 나서부터 온갖 곡들이 두서없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많은 곡들 중 타티아나가 어떤 곡을 연주할지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에르네스트를 고민에 빠지게 한 타티아나는 장난기 어린 묘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토요일. 위클리 연주회를 보기 위해 학교로 간 에르네스트는 콘서트홀이 위치한 2층 구석에 앉아서 시간을 기다렸다.
이미 학생들은 굉장히 많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콘서트홀 238석은 채우고도 남을 것 같았다. 여기저기에서 기대감에 찬 열기를 품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슈만 붐을 일으켰던 타티아나가 이번엔 스크리아빈 붐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사실 저번에 타티아나가 슈만 붐을 일으켰을 때도 그 슈만을 그리 좋게만 듣진 않았다.
그는 타티아나의 프로코피에프에 숨도 똑바로 못 쉬고 압도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구세프의 지도를 받고 난 타티아나의 슈만은 이전까지 보여 주던, 날 선 칼날 같던 음색이 옅어지다 못해 거의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
심지어 그때 에르네스트는 지도 선생님인 구세프와 언쟁을 벌이기도 했었다.
물론 다른 학생들이 타티아나의 듣기 편한 음악에 열광했고, 거기에 타티아나의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거의 사람이 노래를 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로 연주를 잘하게 된 것을 보면 결국 구세프가 옳은 지도를 한 것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멍하니 저번 위클리 생각을 하며 지나다니는 학생들의 면면을 살폈다.
“에르네스트.”
“왔냐.”
근처를 두리번거리다가 먼저 에르네스트를 발견한 건 한승우였다. 에르네스트는 무심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작년 가을 한승우가 겪었던 사건 이후로 두 사람은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지금은 같은 반 친구로서 인사하고 농담을 건넬 정도는 되었다.
한승우는 잠깐 에르네스트를 보더니 먼저 화두를 슬쩍 던졌다.
“에르네스트. 1악장일까? 3악장일까? 어떻게 생각해?”
“무슨 소린데?”
“타티아나가 연주할 피아노 소나타를 말하는 거야.”
위클리엔 많은 학생이 무대에 서기 때문에 소나타를 치게 되면 보통 강렬한 한 악장만 연주하는 편이었다. 타티아나 역시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했을 땐 3악장만 쳤었다.
스크리아빈의 소나타인가 보다. 에르네스트는 대충 납득하며 물었다.
“소나타 친대?”
“쇼팽 피아노 소나타 1번……. 너도 악보를 봤을 테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한승우는 정말 엉뚱한 소리를 했다. 갑자기 쇼팽이 왜 나와?
소나타인지 에튀드인지 뭔지 그건 모르지만, 적어도 타티아나가 스크리아빈을 연주할 것이란 건 확실했다. 그녀가 직접 말했으니 작곡가가 달라질 일은 없었다.
이 녀석도 아무것도 안 물어봐서 모르네.
그냥 가볍게 대꾸하려던 에르네스트는 순간 한승우가 왜 쇼팽을 언급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저번 학기말부터 연습해 왔으니 당연히 지금 꺼낼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그건 틀렸다.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타티아나는 쇼팽 안 친다고 했어.”
“왜?”
“그건 타티아나 자유지.”
“그럼 오늘은?”
“스크리아빈.”
이야기를 들은 한승우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결국 그렇게 된 건가.”
“뭐가 그렇게 돼?”
“아무것도 아니야.”
한승우는 대답할 수 없다는 듯 얼버무렸다. 에르네스트는 혹시 한승우가 타티아나의 쇼팽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있나 싶어 묻고 싶었지만, 뭘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굳이 그걸 물어본다고 해서 타티아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연주회를 알리는 알림이 울렸다.
에르네스트가 옆에 있는 한승우를 불렀다.
“야, 한승우. 시간 됐어.”
“……알았어.”
에르네스트는 복도를 걸어 콘서트홀까지 향하면서 굳이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를 찾지 않았다. 그 애들이 이 연주회에 안 올 리도 없고, 분명 어딘가에 있을 터니 괜찮았다.
한승우 역시 리처드를 찾거나 하진 않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홀 안으로 들어섰다.
“안내 방송 드리겠습니다.”
잠시 연주회에 대한 안내가 있었다. 그간 수십 번도 넘게 들은 것이라 졸리기까지 했다.
에르네스트는 멍하니 안내 방송을 흘려 넘기고, 처음으로 무대에 오른 학생의 연주도 집중해서 듣다가 30초를 못 버텼다. 저 녀석은 연습을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다.
이후로도 몇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서 자신의 실력을 보이곤 다시 사라졌다. 에르네스트는 그 모두를 바라보며 이번에도 비슷비슷하다는 감상을 느꼈다.
그렇게 긴 기다림 끝에, 이윽고 그가 기다리는 피아니스트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