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5화
중앙음악학교 위클리 연주회의 분위기는 그렇게 엄숙하게 절제된 분위기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많은 인원이 순서대로 오르는 연주회이다 보니 한 사람당 준비해 온 곡은 짧고 진행 속도도 굉장히 빠른 편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모인 청중들의 관심사 역시 제각각이었다.
위클리 보고서를 쓰기 위해 온 피아노과 학생들, 친한 친구의 무대를 보고 응원하기 위해 모인 학생들. 혹은 아무 생각 없이 심심하니까 온 타과 학생들.
수많은 이유와 관심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뒤섞여서 홀 안을 굴러다닌다. 때문에 이 연주회의 분위기는 사실 콩쿠르에 더 가까운 열기를 띠고 있었다.
“다음 연주자.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하지만 타티아나의 이름이 홀 안에 툭 떨어지자 무분별했던 관심사들이 일순간 와해되었다가, 다시 순식간에 모여 무대 쪽으로 향했다. 이전까지 조금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빠르게 정돈되었다.
사람의 시선에는 힘이 있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이곳의 200명도 넘는 학생들이 모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무대에 집중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홀 안의 집중력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무렵, 푸른 드레스의 타티아나가 무대 위로 발을 내디뎠다.
각자의 이유로 이곳에 온 학생들은 지금 이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박수 세례를 보냈다.
“…….”
이미 학교에 타티아나의 팬덤이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상당히 적나라하다. 아무래도 작년 말에 있었던 송년 연주회가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에르네스트 역시 그 연주회의 주연 중 한 명이었지만, 지금은 쏟아지는 박수소리에 자신의 것도 조금 더하기만 했다.
타티아나는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피아노 옆에 서서는 박수에 화답해 고개를 숙였다. 박수소리는 조금 더 커졌다가, 타티아나가 피아노 의자에 앉자 뚝 멈췄다.
모든 사람들의 집중력과 행동을 모조리 빼앗아 간 타티아나는 이번엔 마음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손가락을 들었다.
“…….”
왼손이 크게 건반을 짚고, 퉁 튕겨지듯 날아오르더니 연속되는 화음을 빠르게 흘려보냈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로부터 스크리아빈의 곡을 연주할 것이란 말밖에 듣지 못했지만, 첫 마디를 듣자마자 곧장 이 곡의 제목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알렉산더 니콜라예비치 스크리아빈의 비극적 시곡poeme tragique. op.34
1903년 작곡된 이 곡은 스크리아빈이 독창적인 작곡 기법을 막 펼치기 시작할 무렵의 곡으로, 에르네스트도 상당히 깊게 연구했던 곡 중 하나였다.
“…….”
시작부터 오묘하다.
이 곡은 표제는 우울한데 비해 첫 악장 지시가 페스티바멘테 파스토즈festivamente fastoso로 쾌활하고 찬란하게 연주하길 지시하고 있었다.
이 모순, 그리고 대비.
타티아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지니고, 첫 주제를 풀어 나갔다.
분명히 내림나장조의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만찬이지만, 입에 넣으면 단맛만 느껴지진 않는다. 절묘한 매운맛과 심지어 사단조의 쓴맛까지 느껴졌다.
그것들은 서로 따로 놀면서 불쾌하게 거슬리지 않고, 선뜻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맞물려서 하나가 되었다. 이 음악은 듣기에 좋은 정도를 지나 마술과도 같은 놀라움을 가져왔다.
“…….”
이 모든 것은 그냥 존재하지 않았다.
비극과 찬란함. 상반된 개념을 하나로 만들어 내놓는 것은 모든 예술가들의 숙제이지만 결코 쉽지 않다. 타티아나는 음표 하나까지도 철저하게 지배하며 하나로 연주했다.
라흐마니노프와 라이벌 관계였으며, 현대 클래식 음악의 근본이 되어 주면서 훗날 카푸스틴에게까지 전해진 스크리아빈의 특별한 피아니즘. 그것을 확실히 펼쳐 내려면 피아노가 가진 거의 모든 성능을 극한까지 끌어내야 했다.
현재까지도 상당히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스크리아빈을 까다로워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초연한 태도로 연주에 임하고 있었다.
페달을 아낌없이 사용해서 음악을 깊게 우려내면서도 경악할 정도로 섬세하게 악센트를 주어 원하는 표현들을 수면 위로 살려 낸다. 다양한 색채감이 그 위에 맺혔다.
실시간으로 음악을 분석하는 에르네스트가 느끼기에도 말도 안 된다고 느껴질 정도의 기교.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몇 번이고 감탄한 바 있었지만, 보면 볼수록 대단했다.
심지어 그녀는 생소한 스크리아빈을 연주하고 있었다. 저 연주가 일주일 정도 연습한 것이라고 말하면 이 안의 200명 중 몇 명이나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아니지…….’
친구에 대한 감탄과 약간의 뿌듯함 등을 느끼던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스크리아빈은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조금 더 귀를 기울였다.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비극적 시곡은 화려하면서도 덧없는 묘한 대비를 긴 프레이징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본래 오페라의 아리아로 기획되었던 곡다운 느낌이었다.
1903년 작곡된 이 곡은 스크리아빈이 프랑스와 독일에서 인상주의를 접하면서 작곡된 곡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끝나고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 전쟁 없이 평화로웠던 시대. 이른바 벨 에포크belle epoque라고 불리는 시대였다.
비행선이 날아다니던 프랑스 파리. 앞으로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는 낙천적인 희망,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 곳곳에 존재하던 비극.
스크리아빈이 무엇을 보고 이 곡을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에르네스트는 분명 이 곡에 담겨 있는 선율이 당시의 시대의 한 조각임을 느낄 수 있었다.
“…….”
거기에 타티아나가 해석한 스크리아빈의 편린 역시 존재했다.
스크리아빈은 당시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신지학theosophy에 경도되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도 등장하는 이 신지학이란 인간이 여러 한계를 극복하면 신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갖춘 학파였다.
여기에 매력을 느낀 스크리아빈은 음악이야말로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해 가질 수 있는 힘이라 주장했다. 때문에 그가 신지학에 빠져든 이후의 음악엔 신비함과 모호함을 주제로 한 아름다움이 많이 드러난다.
물론 이 곡을 작곡했을 1903년 스크리아빈은 이제 막 신지학을 접하고 빠져들었을 때라 아직까지 신비주의적인 면모가 음악적 특징으로 크게 두드러지진 않고 있지만, 발만 담그고 물장구를 치더라도 옷은 서서히 젖는다.
타티아나는 그 부분도 정확하게 캐치해서 연주에 드러내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연주를 감상하면서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이러한 배경 지식을 충분히 연구하고 이해하고 있음을 확실히 느꼈다.
‘이라토 피에로irato fiero.’
정확한 시점에 두 번째 주제가 전개되었다. 사납고 흉포하게 연주하라는 지시에 따라 왼손이 건반을 물어뜯었다.
옥타브를 넘나들며 만들어 내는 울부짖음은 마치 라흐마니노프의 음형과도 닮아 있었다. 이전까지 이면에 묻혀 있었던 불길함이 장막을 걷고 그 앞으로 조금 드러났다.
땅을 긁는 어두운 무언가가 들린다. 조명이 어두워진 것도 아닌데, 피아노의 그림자가 점점 넓어져 청중석에 닿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타티아나의 연주는 가끔 이렇게 정말 섬뜩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차원이 달랐다.
에르네스트는 지금까지 그가 느꼈던 것들, 특히 벨 에포크나 신지학에 대한 생각들이 단순히 스크리아빈의 음악을 듣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배경 지식으로서의 생각이 아니라 타티아나에게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신이 되는 건 힘들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랐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왜 이 연주를 들으며 그런 기묘한 생각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 타티아나의 등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곧고 견고한 자세였다. 거대한 피아노에 비해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연약해 보이지만 조금도 굽히지 않는다. 그 자체만으로도 타티아나가 얼마나 강고한 연주자인지 드러났다.
하지만 좌측 객석에 앉은 에르네스트에겐 그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볼 순 없는 것이다.
대신 우측 편에 있는 청중들에겐 반대로 피아노에 가려 이 자세가 제대로 보이지 않겠지. 사람의 앞뒤를 동시에 볼 방법은 없으니.
결국 에르네스트는 수십 가지 모습도 동시에 들을 수 있는 음악에나 집중하기 위해 귀를 기울였지만, 아쉽게도 3분 남짓의 곡은 빠르게 끝나 버렸다.
“브라바!”
박수갈채와 환호성. 이 연주를 함께 들은 다른 학생들은 모두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저 스크리아빈을 조금 더 들어 보고 싶다는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별수 없이 따라 박수를 쳤다. 연주 자체는 정말 훌륭했으므로.
연주를 마친 타티아나가 환호 속에서 일어나 작게 묵례하고는 무대 뒤로 나갔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박수를 치던 에르네스트는 옆을 돌아보았다.
한승우는 무표정하게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연주회에서 꼭 연주자에게 찬사를 보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연주가 엉망이라면 반응하지 않거나 야유를 보내도 상관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되는 스크리아빈을 듣고도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건 약간 이상했다. 특히나 그게 한승우라면.
넌 왜 가만히 있느냐고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할까. 하지만 그것도 웃길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귀가 좋은 한승우도 지금 비슷한 아쉬움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에르네스트는 굳이 그걸 물어봐서 확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할 말도 별로 없고, 연주회도 끝나지 않았다.
“……음.”
그 뒤로 학생 두 명의 연주로 연주회가 마무리되고 나서야 에르네스트는 홀 밖으로 나왔다.
옆에 따라온 한승우와 잠시 기다리자 홀 어딘가에 있었던 다른 친구들도 곧 모여들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 리처드, 그리고 아나톨리, 류보비, 사샤까지 상당한 대인원이었다. 이 여섯 명은 한곳에 모여서 앉았던 모양이다.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와 한승우를 번갈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까 안 보이길래 안 왔나 했더니, 승우 한이랑 같이 어디 있었어?”
“좌편에.”
“그렇구나. 난 우측이었거든. 그래서 못 봤나 봐.”
아나스타샤의 말에 에르네스트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나스타샤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연주 들었다면…… 어땠니? 에르네스트.”
“뭘 어때.”
“타티아나의 스크리아빈.”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가 스크리아빈도 상당히 깊게 연구했음을 안다. 그래서 물어보는 건가? 수준이 어느 정도냐고?
에르네스트는 연주회 내내 들었던 이미지들과 색채들, 그리고 스쳐 지나간 주제들을 떠올려 냈다. 하지만 신지학이니 뭐니 하는 소리들을 하며 평을 해 봐야 제대로 된 평이 아니다.
에르네스트는 일단 개인적인 생각들은 잠깐 접어 두고,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테크닉 등에서 평을 뽑아냈다.
“말이라고 물어? 훌륭했지.”
아나스타샤는 잠깐 동안 에르네스트를 봤다. 하지만 곧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행이야.”
그렇게 복도에서 잠시 환담을 나누길 몇 분, 구세프와 미하일도 홀에서 나왔다.
구세프는 에르네스트를 발견하자마자 말했다.
“저 애의 스크리아빈은 너와 닮진 않았군.”
“……?”
에르네스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구세프는 실언했다는 듯 손을 휙 저어 버리곤 돌아섰다.
곧 연주자 대기실에서 타티아나가 나왔다.
제대로 된 콘서트홀과 달리 이 학교 콘서트홀은 나오자마자 찬 복도와 마주해야 한다. 여전히 드레스 차림인 그녀는 추위를 막기 위해 코트를 어깨에 걸쳐 입고 있었다.
“타티아나!”
“슈만에 이어 이번엔 스크리아빈인 거예요?”
다른 연주자들도 그랬지만, 타티아나는 정말 순식간에 인파에 휩싸였다. 피아노과 선후배들은 그녀의 스크리아빈에 감명받았다는 듯 찬사를 보내고, 그중 몇 명은 선물을 건네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기쁘게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그 모두를 대했다. 감사 인사를 전하는 데에도 꽤나 시간이 필요했다.
타티아나가 아나스타샤 옆으로 올 수 있었던 건 5분 정도 흘러서였다.
“와 주셔서 고마워요.”
감사 인사와 함께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를 껴안고는 이어 발렌티나와도 포옹했다. 오늘 그녀의 아버지도 오빠도 일 때문에 오지 못했다. 지금 저 애들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구세프와 미하일도 타티아나에게 짧게 칭찬을 전했다. 타티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에르네스트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있기도 했고, 복도가 워낙에 북적거려서 그 말소리를 잘 듣지 못했다.
잠시 후, 두 명의 선생은 이만 가 보겠다며 떠났다.
“우선…… 저희도 따뜻한 곳으로 갈까요?”
타티아나는 모두를 둘러보며 넌지시 제안했다. 그녀는 감사 인사를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