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46화 (446/1,277)

##  446화

연주회를 마치고 인사도 모두 나누었다. 난 이 다음 일정을 떠올렸다. 그리 복잡할 건 없었다. 미리 예약한 파티룸으로 가서 저녁까지 놀다가 헤어지는 게 전부였으므로.

저택의 연회장이 있음에도 외부의 파티룸을 빌린 데엔 별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가 오스트리아로 출장을 가서 모스크바에 없는데, 집에 남은 내가 친구들을 연회장에 초대한다는 게 약간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버지도 오빠도 왜 그런 걸 신경 쓰냐고 하시겠지만, 난 그냥 이번엔 파티룸을 빌리는 쪽으로 계획을 잡기로 했다.

“…….”

일단 이동하기 전에 잠깐 모두들 어디 들어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영하권의 날씨에 앞으로 편하게 움직이려면 나도 드레스에서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텐데, 그동안 다른 친구들을 이 찬 복도에서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일단 난 여덟 명의 친구들과 함께 스터디룸으로 향했다. 아나스타샤가 바로 물어왔다.

“갈아입을 옷은?”

“차에 있어요.”

“같이 가자.”

빅토르에게 가져다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나가서 탈의실에 가야 할 일이니 직접 잠깐 내려갔다 오기로 했다.

그런데 차에 가니 빅토르가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예약했던 파티룸이 오늘 정전으로 쓸 수 없다고 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다른 곳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날벼락 같은 이야기였다.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게 새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아나스타샤가 쐐기를 박았다.

“어…… 주말이라 미리 예약 안 하면 아마 어려울 텐데요. 빅토르가 뭐든 해내는 사람이라는 건 잘 알지만요.”

“……방법은 많습니다.”

빅토르라면 정말 어떤 방법이라도 써서 파티룸을 구할 사람이었다. 계획대로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긴 하지만, 난 그가 무리하길 바라진 않았다.

약간 걱정스러운 시선을 하자 빅토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예고르와 드미트리에게 이야기를 해서 연회장을…….”

“아뇨, 오늘은 밖에서 하기로 했었던 거니…….”

그건 예고르와 드미트리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내가 일부러 오늘은 외부에서 파티룸을 빌리겠다고 이야기해 놓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저택의 연회장으로 돌아가면 두 사람은 예상하지 못하게 바빠져야 했다.

예상치 못한 사건을 겪는 건 나나 빅토르 정도로 충분했다.

빅토르가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고, 나는 그 옆에서 살짝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가 내 옆으로 슥 다가오더니 속삭였다.

“타티아나. 그냥 오늘은 스터디룸에서 놀지 않을래? 저번에 에르네스트 생일 파티 했을 때처럼 말야.”

“스터디룸에서요?”

“응.”

난 작년을 생각했다. 우리가 자주 쓰는 스터디룸은 사실 다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장소이긴 했다.

실제로 생일파티 같은 건 다른 학생들도 많이 하곤 했다. 물론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면 학교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늘 잘 정리해 두어야 하지만.

잠깐 생각해 보니 괜찮은 해결책이었다. 다만, 나는 마음처럼 일정이 잘 흘러가지 않아서 약간 슬퍼졌다.

“그래도…….”

“계획이 있었구나?”

“예. 우울하네요.”

“우울할 것 없어. 오늘 네 계획은 위클리에서 잘하는 게 전부잖아? 잘 해냈고.”

“…….”

그녀가 날 격려했다. 잘 해냈다는 한마디가 우울함을 걷어 냈다.

요 일주일간은 스크리아빈의 비극적 시곡을 익히는 데에만 전념했다.

그 제목과 곡이 드러내는 감정의 균형을 연구하고, 원래 오페라의 아리아로 작곡될 곡이었으니 내 노랫소리를 피아노 음색으로 옮기는 데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덕분에 연주 중에 멍하니 정신을 놓고 연주를 멈추는 일도 없었고, 불필요한 감정이 흘러나오는 일도 없었다.

재작년 위클리 연주회에서 슈만을 기계적으로 연주했을 때와는 분명히 달랐다. 구세프 선생님도 이번엔 정신 차리라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저 중간에 약간 미안한 눈빛을 하신 것 같긴 하지만, 난 그 감정에 기대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잘 해낸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그렇다면 다른 것엔 크게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과자랑 음료수 약간 사와서 작게 파티를 하자. 다른 애들도 좋아할 거야.”

“그럴까요……?”

“물론이지.”

아나스타샤는 강하게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결정을 내렸다.

“빅토르. 오늘은 그렇게 할게요. 저녁에 레스토랑 예약만 부탁드려도 되나요?”

“알겠습니다. 오늘은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빅토르 잘못이 아닌걸요.”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냥 그런 것이다.

난 이제 그런 부분에 대해 크게 집착하거나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올라가자.”

난 아나스타샤를 따라 교내 탈의실로 향했다. 드레스는 혼자 벗기가 조금 힘들어서 아나스타샤의 살짝 도와주었다. 약간만 도와줘도 훨씬 수월했다.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교복으로 갈아입으니, 연주를 끝내고도 한참이나 온몸에 휘감겨 있던 긴장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스터디룸으로 돌아오니 이미 분위기는 파티나 다름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나톨리와 류보비는 언제나 그렇듯 또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사샤는 에르네스트와 스마트폰으로 무언가 보고 있었고, 리처드와 발렌티나, 한승우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내가 아나스타샤와 함께 들어서니 에르네스트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하나 고민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기다리게 했는데…… 죄송해요. 오늘 예약한 파티룸에 문제가 생겨서 가지 못하게 되었네요.”

친구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류보비는 무슨 파티룸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에르네스트는 눈썹을 까딱였다.

그런데 대뜸 리처드가 툭 던졌다.

“그냥 여기서 하면 안 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해서 난 웃어 버릴 뻔했다. 아나스타샤도 미소를 지으며 속닥거렸다.

“이것 봐, 비슷한 생각인 것 같지?”

저녁 식사 전까지 몇 시간 정도 여기서 시간을 때우자는 데엔 아무도 이견이 없었다. 사실 이렇게 다 같이 있으면 오늘 밤새도록이라도 여기에서 놀 수 있기도 했고.

난 테이블 앞에 앉았다. 공부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니 책도 없고, 텅 빈 테이블은 황량했다. 뭐라도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드게임이라도 빌려 와야 할까? 이러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리처드를 불렀다.

“리처드.”

“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나가서 과자랑 음료수 좀 사 올래.”

“이왕 이렇게 된 게 뭔데?”

“어차피 누군가 나가야 하잖아.”

리처드는 그를 놀려먹는 데에 재미를 붙인 아나스타샤를 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스트레스 받는다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은 여전히 꺾이지 않았다. 리처드가 명확하게 이야기했다.

“그냥은 못 가지. 공정하게 동전 던지기 해.”

“아, 정말…… 잠깐만, 동전으로 어떻게 정해? 여기 애들이 몇 명인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사샤나 아나톨리, 류보비를 빼고 한다고 하더라도 인원이 많으니 내기를 하고자 한다면 제비뽑기나 다른 걸 하는 게 좋아 보였다.

그러나 리처드는 다른 친구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너랑 나 둘 중 한 명이 사는 거야.”

“……너 저번 일 아직도 앙금이 남았니?”

“할 거야 말 거야?”

아나스타샤 역시 이런 대결은 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뭘 자꾸 묻느냐는 듯 곧바로 동전을 꺼내고는 지체 없이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리곤 떠오른 동전을 순식간에 오른손으로 허공에서 낚아채더니, 그대로 책상에 탕 내리쳤다.

똑같은 동전던지기인데, 내가 했던 어설픈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보였다.

아나스타샤가 슬쩍 고개를 비틀며 물었다.

“앞? 뒤?”

“앞.”

리처드가 말했고, 아나스타샤가 손바닥을 들었다. 그리고 승리의 여신은 이번에도 리처드를 버렸다.

“뒤네. 갔다 와. 감자칩 같은 것만 사 오면 다시 반품시키러 보낼 테니까 알아서 하고.”

“……내 인생이 이렇지 뭐. 빌어먹을. 가장 중요한 건 하나도 맞출 수가 없어.”

정말 끔찍하다는 듯 리처드가 투덜거리더니 멀쩡히 혼자 잘 있는 한승우를 질질 끌고 스터디룸 밖으로 나갔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 나간 저 애는 무슨 잘못인지 모르겠다.

난 웃으며 다시 옆을 돌아보았다. 류보비는 할 일이 없는지 멀뚱멀뚱 앞만 보고 앉아 있었다. 난 책임감을 느끼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아까 연주회를 마치고 받았던 선물 중 하나를 꺼내서 그녀의 앞에 까 주었다.

“류보비, 여기요.”

“어, 먹어도 괜찮아요?”

“괜찮다고 생각해요.”

류보비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았지만, 난 아예 다른 선물들도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어차피 난 이걸 먹을 수도 없다.

“아까 그 애들이 준 거야?”

“예. 이런 걸 받을 수 있을 줄은 미처 몰랐네요…….”

아나스타샤는 그중 하나를 집어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 애들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 있는 것 같은데.”

“……아하하.”

선물들은 거의 다 초콜릿이었다.

난 카페인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체질이라서 초콜릿은 먹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누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난 앞에 놓인 초콜릿을 하나 집어 들었다. 보기엔 정말 예쁘다. 그리고 난 단 음식도 좋아하는 편이라서 이걸 먹으면 분명히 맛있다는 것 또한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몸에서 받아 주지 않으니까. 난 그냥 다시 초콜릿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아나스타샤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초콜릿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은 하나 정도 먹어도 괜찮지 않아?”

“…….”

하나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괜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안 먹어도 상관없는 거라면 구태여 입에 넣고 싶지 않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말이 없는 날 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열심히 했었잖아. 일주일 만에 새로 받은 스크리아빈의 곡을 완성하려면 얼마나 연습해야 했겠어.”

약간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내가 최선을 다한 건 음악 외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저는 이 초콜릿을 보상 같은 것으로 바라고 있지 않아요.”

“나도 알아. 그런데 평소엔 쳐다보지도 않았으면서 오늘은 조금 다른 것 같아서. 선물 받은 거라 그러니?”

“……그런가 봐요.”

조금 다르다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아나스타샤가 뭘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난 그냥 흘러가는 대로 대답했다. 아나스타샤는 그 이상 초콜릿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난 그냥 오늘 한 연주와 앞으로 우리들의 2학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 이야기를 하려는 찰나, 방금 전 나갔던 리처드가 한승우와 함께 도로 들어왔다.

“뭐야, 왜 빈손?”

“일단 들어 봐.”

아나스타샤는 헛소리라면 들어 줄 생각 없다는 듯 날카로운 눈빛을 했지만 리처드는 꿋꿋하게 서서 할 말을 했다.

“한승우가 다니는 연습실 있잖아? 거기에 실내악 연습실이 있는데, 아홉 명 정도는 충분히 놀 테이블도 있고 다과를 주문할 수도 있는 곳이야. 물론 피아노도 있고.”

난 설명을 듣자마자 어떤 느낌의 연습실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저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었을 때 빌렸던 19세기 프랑스 살롱풍의 연습실인 것이다. 실내악 연주를 하기도 하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음악원 사람들이 종종 빌리는 곳인데 주말에도 한적한 편이라고 해서 전화해 봤는데 빈 방이 있었어.”

이미 전화까지 해 본 모양이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도 흥미가 생겼는지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고, 리처드는 옆을 가리켰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한승우가 빌리기로 했어.”

“그건 너무…….”

“괜찮아. 장기 계약자는 싸게 대여할 수 있어.”

내가 약간 당황해서 말리려고 하자 한승우가 이미 결정 난 이야기라는 듯 딱 잘라 말했다. 어떠한 강한 고집마저 느껴져서 난 더 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다과와 피아노가 있는 연습실이라면 뭘 해도 즐겁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실내악 연습실을 빌리기로 했다.

모든 결정이 난 뒤, 아나스타샤가 한 가지 결정을 덧붙였다.

“그럼 거기에서 첫 주문은 리처드가 사.”

“……과자랑 음료수 내기였으니까 그걸로 하면 안 될까.”

“절대 안 되지. 아니면 다른 거 더 걸고 동전 한 번 더 던질까?”

“…….”

리처드는 정말 끔찍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결국 그의 지갑은 더욱 가벼워질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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