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7화
아나톨리의 부탁으로 잠깐 그의 레슨실에 들러 바이올린을 찾고, 우리는 곧장 한승우가 빌린 실내악 연습실로 향했다.
그 위치는 그리 멀지도 않았고 내가 잘 아는 장소였다. 왜냐하면 작년 9학년 1학기가 시작되자마자 한승우에게 트러블이 생겼을 때, 내가 그에게 죽을 각오로 연습하라고 계약해 주었던 연습실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이 잘 해결된 뒤엔 제대로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계약을 이어 나갈 필요가 없었지만, 그 후로도 한승우는 알아서 연습실을 빌려서 아침에도 늦은 밤에도 연습을 잘 하고 있었다.
덕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비슷한 장소를 구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그런데 이곳의 연습실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조건이 좋았다.
“와…….”
들어서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살롱풍 연습실은 수백 년 전 프랑스 양식을 그대로 옮겨 놓은 곳이라서 사실 고풍스럽고 아름답긴 해도, 크기가 작고 시대 연주에 적합한 장소였다.
그런데 이번에 빌린 이 연습실은 모던한 인테리어로 산뜻하게 꾸며져서, 밝기만 어두웠으면 커다란 노래방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공간을 반으로 잘라 절반을 무대로 절반은 사교회를 위한 자리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랜드 피아노가 들어서 있는 무대 공간은 현악 콰르텟 정도가 아니라 작은 챔버 오케스트라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발렌티나가 곧바로 류보비와 함께 소파에 풀썩 파묻혔다.
“정말 좋은데? 소파가 이렇게 있을 줄은 몰랐어.”
“그러게요! 엄청 폭신해요!”
신이 난 두 사람은 재잘거리며 소파 위에서 거의 뛰듯이 했다.
“와, 어떻게 지금까지 우리 학교 주변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다는 걸 몰랐지?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건가?”
발렌티나는 이 장소가 매우 마음에 들면서도, 한편으론 모스크바에 모르는 장소가 없을 정도로 정보에 밝은 자신이 처음 보는 곳이라는 사실을 약간 인정하기 싫은 듯했다.
아나스타샤가 톡 쏘아붙였다.
“연습실에 안 오니까 모르지.”
“나, 난 집이랑 학교에서 연습하니까 그런 거잖아. 저 애는 기숙사니까 연습실을 빌리는 거고.”
발렌티나는 한승우 쪽을 가리키며 항변했다. 한승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이런 곳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네.”
“그렇네. 고마워, 승우.”
“별말씀을.”
난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을 보여 근처 소파에 앉았다. 아까 스터디룸에 모여 있을 때도 좋았지만, 지금이 확실히 조금 더 즐거웠다.
아나스타샤는 곧장 메뉴판을 뒤적였다.
“일단 뭐부터 시켜 볼까? 여기 핑거푸드들부터 어때? 3단으로 일단 두 개 정도 시키고…….”
“그냥 마음대로 해…… 내 눈치 보지 말고.”
리처드를 잔뜩 괴롭히고 싶다는 듯 쿡쿡 찌르며 묻자 리처드가 포기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냥 내가 비용을 내도 되겠지만, 이건 두 사람간의 신성한 내기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난 잠자코 있다가 그 다음에 시킬 디저트나 음료를 사기로 했다.
아나스타샤가 종업원을 불러 주문하고 이야기를 나누길 잠시. 금방 주문했던 것들이 나왔다. 아나스타샤의 희망대로 3단 트레이에 실린 핑거푸드와 디저트들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한 입 맛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미니 타르트 정말 맛있네.”
“그러게……. 여기 기악 연습실 맞아? 사장님이 파티셰인 건 아니겠지?”
의심된다는 투로 발렌티나가 중얼거렸다. 나도 카나페를 하나 집었는데, 그런 말이 나올 만했다.
차와 음료수도 곧이어 나왔고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다과를 즐겼다. 점심 식사 후로부터도 시간이 한참 지난 애매한 시각이다 보니 모두들 출출했던 모양이다.
한참을 그렇게 잡담을 나누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었다.
“그나저나 음악하는 애들이 모여서 노는데 음악 소리가 없네. 사장님이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
“무슨 상관이야?”
“아무튼, 아. 그래. 에르네스트. 가서 연주해 줘.”
“무슨 상관이냐고…….”
난데없는 아나스타샤의 강요에 에르네스트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더니 먹던 꼬치를 입에 몽땅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들어주려는 모양이다. 이러나저러나 크게 틀어지지 않고 아나스타샤와 여태껏 잘 지내 온 건 두 사람이 서로 장난이 심하긴 해도 잘 받아 주기 때문이겠지.
난 내가 없었을 때의 어릴 적 두 사람을 상상하다가, 또 이후로도 계속 내가 이곳에 있지 않았을 때의 두 사람을 순간적으로 떠올렸다.
리처드는 신경 쓰지 말라 했지만 순간적으로 긴장감이 확 차올랐다가, 다시 푸근하게 가라앉았다.
내 따뜻한 현실은 여기에 있다.
“신청곡.”
피아노 앞에 앉은 에르네스트는 건반 덮개를 열고 건반을 한 번 눌러 보지도 않고 대충 보더니 툭 말했다.
신청곡들이 쇄도했다.
“리스트 헝가리 광시곡 2번 어때?”
“치프라 편곡 윌리엄 텔 서곡.”
“그럼 난 아믈랭의 서커스 갤롭.”
“너희들 미쳤지?”
발렌티나, 리처드, 아나스타샤 순으로 점점 신청곡의 난이도가 말도 안 되게 상승했다. 아무리 에르네스트라도 저 정도 난곡을 연습 한 번 없이 즉석에서 신청곡으로 받아 연주하긴 힘들다.
그는 살짝 화가 났는지 인상을 쓰며 세 사람을 노려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타티아나. 현실적인 신청곡 부탁해.”
나까지 말도 안 되는 곡을 이야기하면 재미있겠지만, 사실 난 정말 그에게 연주해 달라 하고 싶은 곡이 있었다.
“스크리아빈이요.”
“……좋아.”
에르네스트는 두 말 하지 않았다. 곧바로 그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곡은 내가 불과 1시간쯤 전에 연주했던 바로 그 곡, 비극적 시곡이었다.
제목과 상이하게 경쾌한 리듬으로 화성이 가득 차오른다. 그의 연주는 내 연주와는 또 다른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다. 미묘한 템포, 그리고 루바토와 레가토의 차이가 음악 전체의 이미지에 차이를 만든다.
내 음악이 연보라색이라면 그의 음악은 진한 보라색 정도로 그 차이가 크진 않았지만, 난 그가 어떻게 이 곡을 이해하고 표현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악상 표현에 동의하기도 하고 부정하면서 난 조금씩 영향을 받기도 했다.
단 한 번의 연주는 3분 정도로 길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했다.
“브라보!”
연주가 끝나자마자 모두 환호했다. 나 역시 열성적으로 손뼉을 부딪쳤다.
에르네스트는 너희들 왜 이러냐는 듯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선 작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다시 고개를 든 그가 이제 알아서 하라는 듯 말했다.
“자, 내 차례는 끝났어. 다음 나와.”
“다음도 넌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저기 바이올린 가지고 온 애도 있는데.”
에르네스트는 혼자서 무대를 독점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듯 손가락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향하는 곳엔 아나톨리가 있었다.
아나톨리는 총에 겨누어지기라도 한 듯 흠칫했다.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나톨리. 해 볼래?”
“어…… 저는…….”
아나톨리도 연습실에 간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이올린부터 챙긴 것을 보면 분명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에르네스트에게 지목당하자 적잖이 당황해했다. 그간 함께 있으면서 친해지긴 했지만 그런 것과 관계없이, 실력을 드러낸 에르네스트의 다음으로 지목당하고도 긴장하지 않을 순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리처드가 아나톨리의 바이올린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잠깐만, 아나톨리. 바이올린 상당히 좋은 거 쓰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아나톨리의 목이 마치 스프링처럼 내 쪽으로 향했다. 리처드 역시 그 반응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내가 아나톨리에게 바이올린을 주었다는 사실은 굳이 숨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구태여 이야기 할 일도 아니다.
리처드는 상황을 어렴풋이 이해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내가 아나톨리에게 좋은 바이올린을 주었다는 사실 자체 보다는 왜 주었냐는 이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의욕이 생긴다는 듯 그가 말했다.
“내가 반주해 줄게. 한 번 해 보자. 어떤 연주를 하는지 궁금하네.”
“그렇다면…… 고맙습니다.”
“부담스럽게 그러지 말고. 어쨌든, 뭐가 좋아.”
“음…….”
잠시 고민하던 아나톨리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에드워드 엘가의 사랑의 인사salut d'amour는 어떨까요.”
“난 영국인 작곡가가 아니라도 다 연주할 줄 아는데.”
“아, 그런 뜻은 아니고요.”
리처드가 영국인이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영국인 작곡가 쪽을 떠올린 모양이다.
하지만 굳이 국적을 따지지 않더라도 사랑의 인사는 좋은 곡이었고, 특히 지금 분위기에 아주 잘 맞을 것 같았다.
리처드는 피식 웃더니 일어나 피아노로 향했다. 아나톨리도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자세를 잡았다. 아나톨리는 피아노 음에 맞추어 바이올린을 다시 정교하게 조율했고, 리처드는 기다리는 사이 스마트폰으로 악보를 찾아내어 읽었다. 그에겐 잠깐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준비가 끝나고, 리처드가 말했다.
“바로 해도 돼?”
“예.”
“인템포로 간다.”
리처드의 반주가 시작되고, 곧 아나톨리의 연주가 연습실을 울렸다.
에드워드 엘가의 사랑의 인사. op.12
엘가가 아내인 캐롤라인 앨리스에게 헌정한 곡으로, 감미롭고 아름다운 바이올린과 엇박의 리듬감으로 반주하는 피아노의 조화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랑받는 곡이다.
“…….”
모두 그 자리에 정지해 버린 것처럼 앞의 리처드와 아나톨리에게 집중했다. 두 사람은 처음 맞춰 보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멋진 합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난 아나톨리를 조금 더 신경 써서 보았다. 그에게 준 바이올린을 잘 다루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걱정은 10초도 가지 않았다. 아나톨리는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바이올린을 잘 다루고 있었다.
크기가 잘 맞는지 하이포지션도 문제없이 잡고, 소리도 풍성하게 잘 뭉쳐 내고 있다.
바이올린이 좋은 덕도 있었지만 연주자의 실력이 받쳐 주지 않으면 소리 자체가 안 나는 바이올린의 특성상, 이 연주는 아나톨리가 제대로 악기를 다루고 있다는 완벽한 증거였다.
살짝 눈을 감은 채 애틋한 선율을 연주하는 아나톨리는 연습실의 모두를 사로잡았다.
“브라보!”
3분가량의 연주가 끝나고, 아까보다도 큰 찬사가 일었다. 발렌티나가 감동했다는 듯 말했다.
“너무 좋았어, 두 사람!”
아나톨리는 이런 칭찬을 받는 게 어색한지 꾸벅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 녀석 엄청 잘 하네. 깜짝 놀랐어 진짜.”
리처드는 정말 놀랐는지 아나톨리의 머리를 두어 번 슥슥 쓰다듬기까지 했다. 아나톨리는 깜짝 놀랐지만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내 옆으로 온 리처드는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타티아나, 넌 알고 있었지?”
난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물론이죠.”
“……하하.”
리처드는 그 속내를 모를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두 곡의 음악이 흘러가자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누가 나가서 연주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사샤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류보비 누나. 우리도 연습했던 거 있잖아.”
“뭐? 지금? 싫어.”
“왜? 여기서 안 부르면 어디서 부르게.”
내 흥미를 끄는 내용이었다.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 물어보았다.
“두 분 연습하신 곡이 있나요?”
“그게…….”
“저번에 연습실에서 마주쳤는데 반주 도와 달라고 해서요.”
주저하는 류보비와 달리 사샤는 즉답했다. 언젠가 만나서 연습을 도와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난 사샤와 류보비 두 사람이 함께 협연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눈을 빛내며 부탁했다.
“들려주시겠어요? 듣고 싶어요.”
류보비도 장소가 부담스러웠던 건 아닌지 내가 부탁하자 사샤와 함께 일어섰다.
두 사람이 선택한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가곡집인 16개의 아이들의 노래 op.54 중 3번째 곡. 잔디가 푸르러지는 봄이었다.
“…….”
귀여운 반주와 함께 류보비의 청아한 목소리가 노래를 불렀다. 높고 자신 있게 불러야 하는 이 곡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류보비는 일단 무대에 서더니 떠는 일 없이 훌륭하게 노래를 소화해 냈다.
처음 성악과로 레슨을 받으러 갔을 때, 음정을 똑바로 잡지 못하고 어려워하던 류보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이 벌써 1년도 훨씬 전. 이제 류보비에게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조용히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난 혹시나 누가 볼까 싶어 피곤한 척하며 눈을 비볐다.
이렇게 연습실에 와서 다 함께 음악을 공유하게 되길 바라왔다. 이 모든 시간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난 늘 다른 사람들은 할 필요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일이 많았고,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 선택을 해 오려 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버려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얻게 될 때도 있으니, 괜찮았다. 난 가만히 노래를 감상하면서 가슴 속 깊은 안도를 느꼈다.
“브라비!”
“어쩜 이렇게 귀엽니?”
사샤와 류보비는 나란히 서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발렌티나는 사진을 찍어야겠다며 스마트폰을 찾아 가방을 뒤적였고, 그사이 두 사람은 재빠르게 다시 소파로 돌아갔다. 우리 사이엔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
그다음은 누가 나설까? 아직 연주하지 않은 건 나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그리고 한승우였다.
슬쩍 보니 발렌티나가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한승우가 내게 말했다.
“타티아나.”
“?”
이 좋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그가 천천히 말했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연주해도 될까.”
“…….”
순간, 숨이 콱 막혔다.
난 멍하니 한승우를 바라보다가 입을 벌렸다. 아무 목소리도 안 나왔다.
이 막힌 부분을 뚫어내려면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날카롭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내 허락을 구하는 거야?”
그가 알아듣기 편하라고. 그리고 어쩐지 그에겐 이게 편해서 하는 반말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누구라도 내게 저런 허락을 구했다면 이렇게 답했을 것 같다.
한승우는 내 태도에 살짝 주눅 든 것 같았지만, 바로 그만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