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48화 (448/1,277)

##  448화

타티아나는 서슬 퍼런 눈빛으로 한승우를 올려다보았다. 잠깐뿐인데도 머리가 하얗게 될 것 같다.

그녀는 짜증 한 번 내는 일이 잘 없는 온화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건 화를 낼 줄 몰라서가 아니라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참을성 있게 지켜볼 줄 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난데없이 이렇게 이해도 안 가고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를 하면, 타티아나라도 견디지 못한다.

“…….”

그래도 타티아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약간의 짜증만 엇비치는 데에서 그쳤다. 그녀는 지금도 침착함으로 혼란스러움을 진정시키려 하고 있었다.

한승우는 그녀의 기분을 생각해서 지금이라도 하려던 말들을 그만두고 농담으로 넘길까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무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정말 영원히 빚이 남을 것 같았다.

“허락이 필요해. 네가 연습하던 곡이니까.”

한승우가 다시 말하자 타티아나의 얼굴이 조금 더 냉랭해졌다. 이 상황을 굉장히 거북하게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니.”

“말 뜻 그대로야.”

“……네 생각과 다르게 원하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가 러시아어에 아직 서툴길, 그렇지 않다면 지금 상황을 잘못 파악하고 있길 바라는 말.

타티아나는 뭐든 상관없으니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유감이지만 지금은 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 나중에 다시 차분히 정리해서 말해 줄래.”

그녀는 한승우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단순히 기분 나쁜 정도라면 이후 사과하고 화해할 수도 있겠지만, 정도를 넘어서면 타티아나가 끝까지 참아 줄 이유도 없다.

설마 그럴 일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잘못 선을 넘어서면 절교당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그렇지만 그만둘 순 없었다. 한승우는 타티아나가 연주했던 스크리아빈의 곡에 그간의 모든 감정과 결의가 녹아 있음을 느꼈다. 그건 마치 넓고 어두운 혼란의 바다처럼 느껴졌다. 타티아나는 그 바다에 발목을 담그고 있었다.

못 본 채 무시해 주는 게 도리일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쯤은 제대로 이야기해 보고,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면 도와주는 것 또한 도리였다.

“생각은 충분히 정리되어 있어. 난 네가 유감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타티아나.”

“알고 말하는 거구나.”

갑자기 타티아나가 목을 옆으로 기울이며 휙 가까이 다가왔다. 목소리는 한층 작아졌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또렷하게 귓가에 틀어박혔다.

귀기 서린 눈빛을 한 그녀가 섬뜩하게 말했다.

“내가 그 곡을 버렸다는 걸.”

한승우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의 얼굴을 보며 숨을 멈추었다.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이야기할 줄은 미처 몰랐다.

짜증을 넘어선 원망에 가까운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한 한승우는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었다. 타티아나가 보이는 어두운 감정들은 그가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

단 몇 초. 그사이 한승우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굉장히 긴장하고 있다는 건 타티아나에게도 전해졌는지, 그녀는 노려보던 눈빛을 거두곤 다시 살짝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책상을 내려다보는 얼굴은 여전히 빙산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저 빙산 아래의 얼음이 얼마나 클지, 한승우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타티아나는 자신의 얼음을 숨기는 것에 능숙했다.

그녀는 곧 표정도 바로 하고는 옆을 슥 둘러보았다. 주변은 다른 친구들로 떠들썩했다. 다행히 지금 이쪽엔 아무도 시선을 주고 있지 않았지만 언제 관심이 올지 모를 일이다.

타티아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녀는 무언가 고민하더니 스마트폰을 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척 딴청을 피우려는 건가? 한승우는 그녀가 무얼 하는지 지켜보다가, 난데없이 자신의 전화벨이 울려서 화들짝 놀랐다.

“누구 전화야?”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 전화벨에 떠들썩하던 주위가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한승우는 당황스러움을 최대한 감추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화면엔 타티아나의 전화번호가 떠 있었다.

순간적으로 한승우는 타티아나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어떠한 말도 없었지만, 그냥 알았다.

그는 태연하게 일어서며 말했다.

“잠시만, 전화가 와서 실례할게.”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승우는 그대로 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닫힌 문 너머로 다시 시끌시끌한 목소리들이 하나둘 새어 나왔다.

“…….”

멍하니 문 앞에 서 있던 한승우는 잠시 앞을 서성이다가 복도에 있는 벤치에 대충 앉았다.

일단 타티아나가 방에서 나가라고 하는 것 같아서 나오긴 했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불편한 소리 하지 말고 나가라고 쫓겨난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설마 영영 나가란 건 아닐 테고, 나가서 머리 좀 식히고 들어오라는 뜻인가.

“후…….”

한숨이 나왔다.

오늘 타티아나의 위클리 연주회 무대를 보고, 때가 더 길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야기를 꺼내 봤는데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방금 한승우가 나왔던 문이 열리며 타티아나가 나왔다.

“…….”

그녀는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한승우를 발견하더니, 갑자기 맥이 풀렸는지 힘없는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좋은 분위기를 깨지 않고 자연스럽게 방에서 나오기 위해 생각해 낸 방법이었겠지만, 그래도 타티아나는 사과했다. 한승우는 타티아나가 그래도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보려고 따라 나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잠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타티아나가 먼저 운을 떼었다.

“생각해 보면 이전에도 그랬지. 한승우.”

힘없는 목소리. 한승우는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툭 흘리듯 말했다.

“작년 일 기억나니?”

딱히 대답을 바라는 물음은 아니었다. 한승우는 작년의 타티아나와 겪었던 모든 일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대답하지 않고 그녀가 이어 말하길 기다렸다.

타티아나는 그때를 떠올리는 듯 흐릿한 초점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돔 끄니기에서 내가 음반을 들려주고 헤드폰을 사 주었을 때. 그때도 넌 내게 쇼팽 소나타 1번을 연습하지 않느냐고 물었었어.”

타티아나의 멍하던 눈빛에 서서히 무언가가 차올랐다. 약간 옅어졌던 감정들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전부 알고 있었니? 내가 그 저주에 걸린 곡을 이겨 내지 못하리란 걸?”

저주라는 단어를 힘겹게 발음하는 타티아나를 보며 한승우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마치 곡에 걸려 있는 저주가 그녀를 괴롭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은 정반대로 그 곡을 저주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한승우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괜한 질문을 했네. 전부 알고 있었겠지.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서 굳이 그 곡을 연주하겠다고 허락을 구하는 이유가 뭘까.”

하지만 타티아나는 시니컬하게 혼잣말을 읊조렸다. 생각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한승우에게 칼을 겨눈다.

저주라고 말할 정도로 힘겨웠던 곡을 그녀는 결국 연주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한승우가 갑자기 모두의 앞에서 그 곡을 연주해 보겠다고 한다면 그녀의 입장에선 당연히 좋은 이유를 떠올리기 어렵다.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타티아나는 표시를 잘 안 낼 뿐이지 이런 머리 회전이 굉장히 빠른 편이다. 심지어 지금은 그게 눈빛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의 생각이 안 좋은 쪽으로 뻗치는 게 시시각각 느껴질 정도였다.

한승우는 오해를 살 생각은 없었다.

“작년 일을 정확하게 기억한다면…… 그때 내가 헤드폰을 받고 했던 말도 기억해?”

“네가 했던 말……?”

갑자기 떠올리자니 생각이 나지 않는지 타티아나가 멀거니 되물었다. 한승우는 가까스로 미약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중에 갚겠다고 했었어.”

“……그랬니.”

“무언가 받을 생각이 전혀 없구나.”

언제나 그렇지만 타티아나는 친구들에게 주려는 것만 많고 도통 받으려고 하질 않았다. 그냥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태도였다.

그게 나쁜 것도 아니고, 이해를 못 할 것도 아니지만 가끔은 벽이 느껴지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이제야 약간 미안함을 느끼는지 농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돈으로 줄래?”

“그건 정말 내가 출세한 다음에 줄게.”

그런 건 나중에 언제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한승우가 그녀에게 느끼는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방법이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필요 없어.”

“필요가 있는지 없는진…….”

“싫어.”

타티아나는 말을 다 듣지 않고 툭 끊어 놓고는, 스스로 당황했는지 눈을 깜빡였다. 자기도 모르게 말이 툭 튀어나온 모양이다.

그녀는 후회하는 모습으로 눈을 감더니, 잠시 후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널 믿어. 네가 날 업신여기거나 기분 나쁘게 하려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 하지만 네 의도가 어떻든 난 좋게 대하지 못할 거야.”

“…….”

“이건 경고하는 거야. 정말로.”

괜한 겁을 주는 허세가 아니라, 부디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진심 어린 경고였다. 때문에 타티아나의 말투는 날카롭지 않고 뭉툭했다.

그건 말을 한 그녀도 느꼈는지, 빠르게 날을 세우듯 덧붙였다.

“그리고 약간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그 곡에 졌다는 걸 너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번에야말로 시퍼런 칼날이 번뜩였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알고 있어. 그런데 이야기하지 않는 거야.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난 꼴사나운 패배자가 될 테니까. 난 그 정도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야.”

하지만 타티아나는 안전하게 그 칼의 손잡이를 쥐고 있지 않았다. 자해라도 하는 듯한 말. 타티아나는 신랄하게 말하며 조소했다.

한승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런데 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해. 내가 널 이해하더라도 다른 아이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타티아나의 말이 옳았다.

방학이 시작하기 전부터 그녀가 쇼팽의 소나타 1번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매달림의 끝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어렴풋하게나마 모두 안다. 모를 리 없었다.

그 사실을 구태여 언급하지 않는 것은 모두의 배려였다.

그런데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 그 소나타를 연주해 버린다면, 타티아나에 앞서 다른 친구들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렇겠지.

타티아나가 작게 한숨을 쉬듯 말했다.

“차라리 나중에 이야기하는 건 어떠니.”

물론 한승우는 그 정도 생각도 없이 말을 꺼낸 게 아니었다.

“나도 바보가 아니야. 내가 눈치 없이 굴고 있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지금 네게 돌려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저 주고 싶을 뿐이야.”

“…….”

“내가 예전부터 이런 식으로 네 신경을 건드려 왔다면 미안해. 오늘을 마지막으로 앞으론 이런 일 없을 거야. 할 수 있지도 않고.”

타티아나는 나중에 말하면 들어 주겠다는 것처럼 지금은 이야기를 미루려 하고 있지만, 한승우는 시간이 더 흐른다면 무슨 연주를 하든 모조리 소용없어질 것이란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오늘 타티아나에게 무슨 소릴 들을지 모른다. 그건 두려웠다. 하지만 친구로서, 그리고 동료 연주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도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순 없었다.

“…….”

타티아나는 가만히 침묵했다. 그녀는 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뭐가 마지막인 거냐고 신경질적으로 묻지 않았다. 한승우의 말 자체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가볍게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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