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49화 (449/1,277)

##  449화

한승우는 내가 정말 아끼는 친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종종 내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의 국적은 문제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떠나서, 난 이 애가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홀로 먼 외국에 와서 고생한다는 이유 하나로 친근감을 가지고 열성적으로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인성도 괜찮고 실력도 뛰어난 좋은 친구였다.

문제는 그 뛰어난 실력 때문에 그가 의도치 않게 날 괴롭힌다는 점이다.

천부적인 음감을 타고난 한승우는 내 음악이 분리되어있다는 걸 처음 듣자마자 알아차렸고, 이후로도 몇 번이나 내 미련을 상기시켰다.

일부러 날 미치게 하기 위해 이러나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난 그가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신경질을 낼 수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 일방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한승우를 멀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이미 내 인간관계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보통은 참을 만했으니 괜찮았다. 전부 내 개인적인 문제였으니 시간이 흘러 무덤덤해질 때가 되면 모두 사라질 문제였다.

하지만 불발탄을 더 깊이 묻기 전에, 그가 갑자기 뇌관을 터뜨렸다. 이번엔 조금 강했다. 신경줄이 모조리 불타 버리는 줄 알았다.

“…….”

간신히 이성을 붙잡을 수 있었던 건 한승우의 표정에서 흥미 본위의 의도를 털끝만큼도 발견하지 못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내게 빚을 갚고 싶다는 말, 오늘을 마지막으로 신경을 건드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 내 머리를 차갑게 식혀 주었다.

한편으로는 고맙다. 이 애는 예리하게 내 연주에 내재된 무언가를 읽어 내고 지금 이러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귀찮다.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괜찮아질 텐데 왜 이런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결국 난 힘없이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대로 돌아가 버릴 순 없겠지. 네 연주를 막을 방법도 여럿 생각이 나지만…… 그럴 생각은 없어. 내가 뭐라고 네 연주를 막을까…….”

저 애들을 두고 도망칠 순 없다. 그리고 한승우를 궁지로 몰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 쇼팽 소나타 1번을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는 셀 수 없이 많다. 족히 수십만 명은 될 테지. 한승우도 그중 한 명일 뿐이라면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다. 내게 허락을 구할 이유도 없고 내가 막을 이유도 없다.

하지만 때와 상황에 따라 똑같은 곡이라도 수많은 의미를 얻게 된다. 난 내가 그의 연주를 듣고 무슨 생각을 하게 될지, 그게 제일 두려웠다.

혹시 질투와 분노 같은 것을 느낀다면, 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대신 내가 네 피아노를 피해 방에 들어가지 않으면, 너무한다고 생각하니?”

“……타티아나.”

넌지시 물었더니 한승우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난 솔직한 내 심정을 꺼내 놓았다.

“난 방금 전까지 너무 행복했어. 다른 아이들의 성장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게. 그러니 그냥 이 기분을 안고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지 않을래.”

“타티아나, 너는 약간 그런 시선으로 우릴 보곤 했지.”

“그런 시선?”

“선생님 같은 시선.”

약간 당혹스럽긴 했지만, 내가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건 이미 아나스타샤로부터 몇 번이나 잔소리를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한승우라고 날 그렇게 평가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을 오해하진 말아 달라는 듯 빠르게 말했다.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야. 그건 네가 착하…… 음, 아니지. 무슨 단어가 좋을까…… 그래, 인격자라는 뜻이니까.”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너무 부담스러운 단어는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무튼, 타티아나.”

점점 이야기를 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쯤, 한승우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왜 내 성장은 안 보려고 해?”

내가 포기한 곡을 연주해서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의도를 하나만 하라고 말하려다가, 이 또한 그의 진심임을 느낀 나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한승우는 날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줄 수 있는 것이 있으니 빚을 갚고 싶을 뿐이고, 또 그럴 능력이 되는 연주자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난 적어도 똑바로 마주해 줘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좋을 대로 해.”

“연주해도 될까?”

“마음대로. 난 아무 평도 안 하고 가만히 듣기만 할 생각이지만…….”

난 말 끝에 아까 했었던 경고를 재차 덧붙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장담 못 해.”

그 곡은 내게 거대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난 그것을 무시하려 하고 있지만, 음악의 강력함은 내가 행사할 때뿐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내게 행사할 때도 절대적이다. 견딘다고 견딜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내가 무슨 생각과 감정을 떠올리게 될지 알 수 없다.

벌써부터 안 좋은 생각이 자꾸만 나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한승우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들어갈게.”

홀로 남겨진 나는 눈을 감고 생각을 추슬렀다.

그냥 쓸데없는 짓만 하지 않으면 된다. 누군가는 한승우가 연주하는 쇼팽 소나타 1번을 듣고 내게 연구는 어떻게 되었느냐 물어볼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준비가 조금 덜 되어서 위클리 무대에 못 올렸을 뿐이라고 가볍게 대답하면 된다.

괜히 한승우에게 했던 것처럼 그 곡은 버렸다는 말을 꺼내서 모두를 곤란하게 하지만 않으면 될 테지.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다 잊게 된다. 내가 잊을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처럼. 그리될 것이다.

“…….”

마저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섰다.

“왔니?”

방의 분위기는 여전히 활기찼다.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자기 옆자리를 툭툭 쳤다. 옆에 가서 앉자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피아노를 손짓했다.

“그사이에 발렌티나가 한 곡 연주했다?”

“정말요? 어떤 곡인가요?”

“쇼팽 베르쇠즈berceuse. 춤곡풍으로. 정말 신기하게 치더라.”

베르쇠즈는 자장가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그 제목에 걸맞게 잔잔하고 나른한 4분 정도 되는 곡이지만, 주 멜로디는 마치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그리는 듯한 음형 또한 지니고 있어서, 쾌활하게 연주한다면 자장가가 아니라 춤곡처럼 들리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게 쉬운 연주는 아니다.

난 고개를 빼고 발렌티나에게 말했다.

“아쉽네요, 듣고 싶은데……. 발렌티나. 한 번 더 연주해 주시면 안 되나요?”

“혼자 독점하기 없기로 했었잖아?”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친구들이 한 방에 모여서 돌아가며 연주를 하는 건 마치 노래방에 갔을 때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무대를 독점하는 게 비매너적인 행동이란 말도 이해가 간다.

처음 에르네스트로 시작해서 발렌티나까지, 지금 이곳에서 연주하지 않은 건 나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한승우 세 명이었다.

아나스타샤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슬쩍 운을 뗐다.

“그럼 다음은…….”

“내가 할게.”

하지만 누구라고 고를 것 없이 다음 순서에 나갈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한승우가 바로 바턴을 받아 채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가 관심을 보였다.

“무슨 곡 할 건데?”

그 질문에 한승우는 즉답하며 피아노로 향했다.

“쇼팽 소나타 1번.”

“……?”

갑자기 말소리가 잦아들며 방 안에 당혹스러운 분위기가 들어섰다. 순간 몇 개나 되는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난 친구들이 이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게 아니라면 내 눈치를 살필 이유가 없었다.

구세프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으면서 악보 숙제를 했을 때, 친구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약간 들었다. 차라리 아무도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면 이런 어색한 상황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때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후회해 봐야 소용없었다.

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뻔뻔하게 고개를 들었다.

“타티아나, 네가 연주해 보라고 한 거니?”

아나스타샤가 작게 물었다. 저 곡을 내가 어떻게 여길지 염려하는 목소리다. 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아요.”

“그런데 왜 저 곡을 네가 아니라 저 애가…….”

난 그녀가 괜한 일로 신경 쓰는 것이 싫어서 건조하게 대답했다.

“쇼팽이 남긴 유산이 제 건 아니잖아요? 세상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겠죠.”

정확히 말하자면 누구나 누릴 수 있진 않다. 누구나 감상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나처럼.

아나스타샤는 내 말을 듣더니 약간 움츠러들듯 말했다.

“네가 괜찮다면 상관없지만…….”

평소 그녀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굉장히 위축된 태도였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판단을 쉽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옆을 보니 에르네스트가 내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까.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게 괜찮냐고 묻지도, 다른 곡이 낫지 않겠냐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켜볼 뿐이다.

그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나 다른 친구들이 이 자리에 쇼팽 소나타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 상황을 무마시키려 한다면 한승우와 알력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난 아무 말도 않고 피아노 쪽으로 향하는 한승우를 지켜보았다. 이제 몇 분만 더 견딘다면 정리할 수 있다.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내 눈치를 보듯 행동할 이유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승우는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그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듯 피아노 저편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어떠한 전조나 연주를 시작하겠다는 말도 없이,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이 방 안에 존재했던 것처럼 한 선율이 가득해졌다.

“…….”

그 선율이 공기 대신 내 숨을 틀어막는다.

프레데릭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1번. 다단조.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든다. 얼핏 들리는 그 언어는 폴란드어나 프랑스어처럼 들리지만 정확하게 알 순 없었다.

그런데 그 알 수 없는 언어 가운데에서 난 굉장히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였다.

“……?”

한승우의 연주는 다른 그 어떤 레퍼런스와도 달랐다. 흔하지 않은 해석이었다.

난 그가 어디에서 이 곡의 해석을 얻어 왔는지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로 내가 가지고 있었던 그 해석, 그대로였다.

“……무슨.”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된다.

경악한 채로 난 모든 신경을 그의 연주에 빼앗겼다. 리듬감과 사운드, 심지어 음색까지 거의 모든 것이 통일감 있게 하나의 음악을 이루었다. 그건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음악과 거의 똑같이 느껴졌다.

저 애에게 내가 가진 음악을 보여 준 것이라곤 얼마 전 악보에 내 해석을 적어 넣으면서 잠깐 보여 준 것과, 재작년에 연습실에서 몇 초도 안 되는 이 해석의 편린을 살짝 보여 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겨우 그것만으로 곡을 이렇게 복원해 냈다고?

구세프 선생님조차 이 정도로 흡사하진 않았는데?

“…….”

갑자기 이 곡을 연주하겠다고 하길래 난 그냥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내가 이 곡을 연주하지 못하고 놓아 버렸기 때문에, 자신이 해석한 연주를 내게 직접 보여 주는 것으로 도움을 주려고 하는 줄 알았다. 그 자체도 상황에 따라서 시비의 소지가 없지는 않았지만, 친구로서 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한승우의 연주는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가 재현해 내는 연주는 내가 손에 쥐고 싶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

직접 들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조를 마치고 주 멜로디를 고음으로 옮겨 갔다. 마치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병에 통통 치는 것 같은 이미지. 섬세한 프레이징 처리와 루바토.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한승우가 하고 있는 일은 퍼즐 한 조각만 가지고 보지도 않은 그림 전체를 그리는 일과 비슷했다.

레퍼런스가 될 곡을 제대로 들어도 똑같이 따라 하는 건 요원한 일이다. 심지어 저 루바토는 백 분의 일 초만 리듬이 어긋나도 전혀 다르게 들리기 때문에 다른 연주자의 것을 따라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구세프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다른 사람의 지문을 똑같이 내 손 끝에 복제할 순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승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연주하고 싶었던 해석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어색함이나 부조화는 들리지 않았다. 너무나 분명해서 되레 내가 애매하게 떠올리고 있던 부분들이 지금 연주되는 곡과 겹쳐지며 선명해질 정도였다.

대체 무엇이 그에게 이 연주를 가능하게 한 걸까. 내 악보? 연습량? 국적?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 온다.

난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과 저 연주를 마지막까지 듣고 싶다는 마음을 동시에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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