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0화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남자는 탁자를 탁 치고는 일어나서 발걸음을 옮긴다. 약간의 취기.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는 균형이 틀어져 있다. 하지만 곧바로 넘어지진 않는다.
일렁이는 시야로 수많은 것들이 지나쳐 간다. 의자와 액자, 그리고 벽난로.
남자는 다시 술병을 들었다. 뜨거운 액체가 목을 불태운다. 남자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다시 휘청거리는 발을 든다.
“…….”
난 그 모든 이미지를 음악을 통해 귀로 보았다.
이 연주는 한승우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평소 담백하면서도 아카데믹한 연주를 잘 하는 편이었다. 탄탄한 기본기에 충실한 타입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번엔 이렇게나 색채감 두터운 표현에 중점을 둔 연주를 선보이고 있었다.
난 한승우가 이런 연주를 할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닌 해석을 왜곡 없이 그대로 세상에 옮겨 내기 위해 음악 스타일까지 바꾼 것이다. 기술자이지만 동시에 예술가인 연주자로서 그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게다가 무의미하게 따라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정확하게 이 해석이 지니는 그림을 파악하면서 그려 나가고 있었다. 화폭에 선을 긋듯 선율을 흘려보내고, 섬세한 붓 터치를 더하는 것처럼 건반을 다루며 디테일을 묘사한다. 그 모든 것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한 번 놀란 가슴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난 계속해서 들려오는 한승우의 연주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했다.
기억 속의 음악이 현실에서 그대로 연주되고 있다는 사실이 날 하여금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난 한참 동안이나 넋을 놓고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생각했다.
대체 언제부터 이 곡을 준비한 거지? 내가 악보를 보여 주고 나서부터?
아니라 생각한다. 이 애는 그보다 한참 전부터 이 곡을 신경 쓰고, 언젠가 빚을 갚겠다고 하기도 했었으니까.
한승우는 내가 언젠가 이 곡을 실패할 것이란 걸 염두에 두고, 그때 보여 주기 위해 준비해 온 것이다.
이 정도로 위화감 없이 똑같이 따라 하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들여서 연구했을지 모르겠다. 아니, 시간과 노력을 떠나서 난 이런 연주가 가능하다는 것 자체에 놀라움을 느꼈다.
그리고, 놀라움 다음으로 날 지배한 감정은 질투였다.
왜 네가?
“……읏.”
계속 경계하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끔찍하고 음울한 무언가가 뒷목을 타고 올라왔다.
귓가에 파고드는 익숙한 음악은 순식간에 내 정신을 장악하고 불을 꺼서 묻어 두었던 초를 구태여 꺼내 내 앞에 흔들었다.
타다 만 초는 이상하게 형태가 녹아내려 있었고, 흙이 묻어 더럽기까지 했다. 그걸 마주한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커다란 못 같은 것이 가슴 한복판에 박힌 기분이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왜 네가 그 음악을 연주하고 있어?
내 입으로 말했듯 쇼팽의 유산은 모두의 것이니 어떻게 연주하든 상관은 없어.
하지만 왜 나조차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던 해석을 넌 이렇게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거야? 어떻게 하고 있는 건데. 네가 초인적인 음감을 지닌 천재라서?
음색에 예민하고 모방에 능할 수 있다고는 생각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들어 본 적도 없는 곡을 똑같이 따라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이해도 안 되고, 납득도 안 돼.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냐?
“…….”
하지만 이해도 납득도 상관없이 난 모든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곡은 깔끔하게 1악장을 끝마치고 2악장으로 접어들었고, 4분의 3박자의 여유로운 춤곡인 미뉴에트가 연주되었다. 한층 더 깊은 음악성이 드러나는 리듬이 선보여진다. 그것은 내가 아는 리듬과 같았다.
한승우가 이 해석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연주하고 있다는 것이 보다 확실해졌다.
내 손에 들어오지 않은 이 음악은, 한승우의 손에서 제대로 된 모양을 갖추고 펼쳐지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고 아무리 생각해 봐야 소용없었다. 직접 피부에 와닿는 음악은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파고들어 내게서 인정을 받아 내고야 만다. 난 거기에 저항할 수 없었다.
새카맣게 뇌리를 잠식하던 질투와 분한 감정들은 음악소리에 파묻혀 서서히 옅어져 갔다.
“……하.”
남자는 홀로 미뉴에트를 추면서 거실을 돌아다녔다. 술에 취한 춤은 보는 사람을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대단한 연주였다. 약간만 실수하면 우스꽝스러울 뿐이고, 그렇다고 해서 잔뜩 집중하면 음악성이 살아나지 않는다.
그냥 손 자체가 알아서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는 것이 이 음악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인데, 그러면서도 주제를 잃지 않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한승우는 그 모든 것을 해냈다.
내가 원하던 그대로.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으니, 비로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분간이 섰다.
내가 연주할 수 없었던 곡을 그가 연주했다는 이유로 질투심에 사로잡히는 건 정말 바보나 할 짓이었다. 난 그에게 그래선 안 된다.
심지어 내가 부탁한 것도 아니고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한승우는 그저 선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연구하고 연습해서 이렇게 결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고 감사한 일이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목에서 절로 긴장이 빠져나갔다. 이따금 고개를 들던 부정적인 감정들도 힘을 잃었다. 가슴에 틀어박혔다고 생각했던 못은 알량한 내 자존심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했다.
난 한숨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내뱉었다.
견딜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런 결과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
미뉴에트의 리듬이 이쪽저쪽으로 튕기면서 뛰논다. 나는 차분하게 그 음형을 지켜보았다.
구세프 선생님께서 연주해 주셨을 때도 굉장히 흡사해서 놀라긴 했지만 사실 그 완성도로 흡족한 마음이 들진 않았다.
하지만 한승우의 연주는 듣는 것만으로도 경악할 정도로 내가 원하던 곡과 닮아 있었고, 기어이 나로 하여금 인정하게 만들었다.
곡은 3악장으로 넘어갔다. 약간 느리게, 라르게토larghetto. 서정적인 선율과 화음이 차오른다.
난 취객에 의해 손상되어 지금은 복구중인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의 그림을 다시 떠올렸다. 선생님들은 이런저런 예를 들며 그 그림이 복구되더라도 예술품으로서 문제는 전혀 없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젠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세상에서 영영 사라졌을 음악이 이렇게 복원되어 돌아왔다.
이미 죽어 버린 한 음악가의 음악이라 다른 연주자의 손을 빌리긴 했지만, 정통성에 차이가 있다고 해서 이 음악이 지니는 일정량의 가치에 큰 손상이 있진 않을 테지.
그건 지금 이 음악을 듣는 내가 인정하고, 증언해 줄 수도 있다.
“…….”
마지막 4악장은 프레스토.
큰 북을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화려한 아르페지오가 펼쳐진다. 현란하게 허공을 수놓는 음악을 감상하며 난 눈을 감았다. 정확하게 내가 원하던 타이밍에 다시 북이 연달아 울렸다.
좌우로 뛰노는 리듬에 발을 맞추어 앞으로 향하다가, 다시 끌어 내려진다. 큰 리듬을 만드는 북 소리는 아주 미세하게 빨라지면서 다이내믹함을 만든다.
난 그 모든 것을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해석의 주인은 이제 한승우에게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정도의 이해도였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다시 눈을 떴다. 다른 친구들도 모두 연주에 빠져 있어서 지금은 내 쪽을 보지 않고 있었지만, 눈물을 흘리기라도 했다간 정말 큰일 난다. 난 어디까지나 태연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살짝 주먹을 쥔 채, 조용히 감상했다. 굳이 집중할 것도 없이 음악은 내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마치 수면에 돌은 던지면 자연스럽게 파문이 이는 것처럼 여러 감정이 잇달아 치솟았다가 사라져 갔다.
그 모든 것들을 순서대로 느끼면서, 비로소 초연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
연주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이 곡의 피날레는 언뜻 화려하지만 곧게 선 절제미를 갖추고 있었다. 주제는 약간의 변화를 거쳐 다시 반복되고는 큰 북과 함께 크기를 키워 나가다가 절정에 다다라 산뜻하게 끝맺음을 지었다.
“브라보.”
친구들의 박수소리가 있었다. 나 역시 따라서 박수를 쳤다.
다른 음악가들은 이 연주를 어떻게 평할지 모르겠지만 난 만족했다. 좋다 나쁘다 말할 순 없었다. 그냥 만족했을 뿐이다.
혼자서 모든 것을 끝맺기로 했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순수한 감탄과 만족감, 그리고 안도. 이젠 마음 놓을 수 있을까.
“잘 들었어.”
난 한승우에게 말했다. 그는 묘한 시선으로 날 바라본다.
연주를 듣기 전엔 연주가 끝나고 나면 한바탕 퍼부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난 한승우가 어떤 식으로 빚을 갚겠다는 것인지 이제 분명하게 이해했고, 그가 해 준 일에 감사한다.
내가 화를 내지 않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한승우는 일어나서 이쪽으로 오더니 어설프게 쭈뼛거리다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렇게나 자신 있게 피아노를 연주하던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면서도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난 결국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의 불안을 거둬 주었다.
“빚은 이제 없는 걸로 해도 괜찮아.”
“…….”
이쯤하면 됐어, 난 이제 포기할게. 지금 기분도 괜찮아. 모두 네 덕분이야.
방금 전 연주에서 몇 년 전에 죽은 연주자의 그림자를 보긴 했지만, 그건 이 자리에서 끝나야 했다. 난 딱히 그가 무언가를 계승하길 원하진 않는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러니까 이제 무언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는데, 한승우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왜?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
“…….”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는 원하는 대로 연주를 했고, 난 만족했고. 그럼 끝난 것 아닌가?
그런데 한승우는 갑자기 또 이상한 소리를 했다.
“난 이 곡을 내 것으로 함으로써 빚을 갚고 인정받으려는 게 아니었어.”
“……?”
갑자기 또 머리가 아파 왔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도대체?
한승우는 내 해석을 굉장한 완성도로 연주해서 내 인정을 받아 냈다. 그런데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 같다. 그 태도를 보니 궁금하기보단 그냥 피곤해졌다.
난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그가 바로 말을 이어 나갈 생각이 없어 보여서 옅은 웃음으로 이 대화를 끝내기로 했다. 잘 모르겠다. 더 물어보거나 생각할 힘도 없고.
“…….”
가만히 소파에 기대어 있자니 갑자기 눈앞이 가물거렸다. 폭신한 소파가 뒤에서 내 어깨를 붙잡고 더 깊숙이 파묻는 느낌이 들었다.
난 제대로 앉지 않고 그대로 축 늘어졌다.
전날 두어 시간 잤던가. 그리고 난 오늘 짧지만 무대에 오르면서 꽤나 많은 집중력을 소모한 터였다.
다 함께 노는 자리에서 이렇게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건 예의가 아니고 친구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싫었지만, 참을 수 없이 피로함이 닥쳐와서 버티기 힘들었다. 검은 안개가 머릿속에 서서히 차오르며 짙어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몇 초만 더 있으면 거의 기절하듯 잠들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다가온 수마 앞에서 무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다.
“타티아나, 네 차례야.”
에르네스트의 목소리가 날 수마에서 건져 올렸다. 난 잠깐 사이에 몽롱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뭐 하고 있냐는 듯 피아노 쪽으로 눈짓했다.
내 차례라는 게 온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피아노를 칠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난 아무렇게나 변명했다.
“전 오늘 연주했었는걸요.”
“안 했어.”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더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안 했다니? 난 오늘 분명히 위클리 연주회 무대에 섰는걸.
멍하니 에르네스트의 말을 되짚어 본 나는 그가 뭘 원하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소파에서 일어날 생각은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