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1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에르네스트의 얼굴은 무표정해서 마치 온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딱딱한 어투로 그가 말했다.
“난 우리가 돌아가면서 한 곡씩은 쳤으면 좋겠는데. 그런 룰 아니었어?”
“맞아.”
옆에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지금 다 함께 노래방에 온 것 같은 기분으로 한 곡씩 기분 좋게 선보이고 있는데 중간에 갑자기 내가 빠져 버린 모양새 같다. 예의상 짧게 한 곡 정도는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계속 졸음만 쏟아졌다.
평소 같았으면 몇 시간이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그래서 뭐 하겠냔 생각이 앞섰다.
내 커리어와 관련된 무대라면 지금 모자라게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를 보이고 평가를 받겠지.
하지만 이런 사적인 장소에선 다른 친구들이 연주하는 걸 듣는 것이 더 좋았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내가 딛지 못했던 곳들을 딛고 앞질러 나가는 친구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게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난 고개를 살짝 들고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저보단…… 그래요, 아나스타샤. 오늘 한 곡도 연주하지 않으셨죠?”
살짝 바턴을 넘기고 난 뒤로 빠질 생각이었다. 아나스타샤도 분명 준비하고 있는 곡들이 많을 테니 또 한 번 이곳에서 다른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나도 할 거야. 그런데 타티아나.”
“예.”
“저기 승우 한은 내가 아닌 네가 화답해 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이번엔 자기 차례가 아니라는 듯 가볍게 다리를 꼬고 앉아선 주스 잔을 홀짝이기만 했다.
옆을 보다가 한승우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내가 무언가 화답해 주길 바라고 있었니? 하지만 내가 원하던 건 네가 다 해 버렸는데, 그 뒤에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난 중얼거리며 앞에 있는 방울토마토를 집었다.
“음…… 생각나는 곡이 없네요.”
“그럴 리가? 하나도?”
아나스타샤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물었다. 사실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난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다.
“있긴 해요. 하지만…… 제가 아무리 잘 하더라도 방금 전 연주보단 못할 거예요.”
말을 맺고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자마자, 난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푸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한승우가 한 연주는 내가 사력을 다해도 불가능한 연주니 어쩔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체념조로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대체 어떻게 들렸을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곧바로 한 마디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서서히 닫았다. 그녀의 얼굴은 슬픔으로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왜 그런 표정을 짓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녀 역시 내게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티아나?”
발렌티나가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난 이대로 멍청이처럼 가만히 있으면 분위기가 엉망이 될 것이란 걸 깨닫곤 장난스럽게 손목을 흔들거리며 말했다.
“아하하, 지금 약간 피곤해서요. 쉬어야 할 것 같아요.”
“…….”
이만 쉬겠다는 말을 끝으로, 아무도 내게 더 이상 말을 걸지 못했다.
저편에 앉아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에르네스트는 신경질적으로 포크를 들더니 케이크를 쿡 찍었다.
그가 뭘 원하는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더 생각해 봐야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생각하기도 지쳤다. 한승우가 이렇게까지 해 줬으니 이제 난 안심하고 눈을 감아도 될 것 같았다. 난 만족한다. 다시 잠기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숨 자고 나면 모든 게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을까. 뭐가 모든 것이고 어떻게 해야 말끔한 정리인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런 무책임하고 대책 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날 부르는 목소리도 없었다. 난 그대로 잠깐 생각을 멈추고 소파 등받이에 살짝 머리를 기댔다. 곧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
주변은 이야기소리로 소란스러웠지만 머릿속은 조용했다. 깊은 물속에 잠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수면 위에서 나는 소리들은 먹먹하게만 들렸다.
그리고 이 고요한 바다에, 물고기처럼 나타난 한 줄기 선율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쇼팽 소나타 1번의 선율이었다.
원래도 존재하고 있긴 했지만 먼지가 내려앉아 흐릿했던 선율이 현실에서 이루어진 재현의 영향을 받아 확실히 선명해져 있었다. 그만큼 한승우가 정교하게 연주해 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젠 나와 관련이 없는 곡이다. 그냥 쳐다보지도 말까 싶었지만, 유영하는 선율은 무시한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만 내버려 두면 하루 종일이고 머릿속에서 돌면서 귀찮게 할 게 뻔했다.
난 연주자로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손을 뻗었고, 현실에선 붙잡을 수 없었던 선율을 가볍게 낚아챌 수 있었다. 화가 날 정도로 쉬웠다.
수 년 전엔 내 것이었고, 그토록 원했지만 이젠 한승우의 것이 되어 버린 곡이었다.
난 복잡한 감정으로 이 음악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아함을 느꼈다.
현실에서 들었을 땐 내가 원하던 곡과 완전히 똑같다는 사실에 너무나 놀라서 멍하니 듣다가 만족하고 인정해 버렸지만, 지금 다시 보니 굉장히 부족하고 모자라게 들린 까닭이었다.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었던가?
이제 또렷해진 음악은 분명 예전과 똑같았다. 그리고 심지어 음악적인 완성도에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는 것마저 똑같았다. 난 그 모든 것을 냉정하게 평할 수 있었다.
똑같았지만, 최고는 아니었다.
과거엔 최선이라 생각했었던 부분들이 이젠 그렇지 않게 들린다. 몇 년간 필사적으로 견식을 높여 나가면서 내 기준은 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딱히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몇 년 전 어설펐던 부분들을 이젠 알 수 있었다.
수십 년을 피아노에 바친 유명한 거장도 아니고, 무명 연주자의 해석이 음악적으로 완벽했을 리 없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일이었다.
미련에 눈과 귀가 멀어 있던 난 그걸 몇 년이 흘러 다시 듣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건 완벽하게 완성된 예술이 아니라, 성장을 하다 만 무언가의 박제품이라는 걸.
이 박제품이 연주자로서 내 자신작이라 할 수 있나?
정녕 그렇게 인정할 수 있나?
“…….”
심장박동이 전신을 울렸다. 풀어져 있던 전신의 신경이 곤두섰다. 난 지금까지 모든 것들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음악가들은, 그리고 음악은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야만 한다. 죽는 그날 한 연주가 최고의 연주가 될 수 있도록. 난 그 말을 신봉했고, 그래서 내 최후의 곡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의심했어야 했다. 적어도 내 정체성과 자존심, 그 모든 것을 박제된 곡에 걸어 놓진 않았어야 했다.
난 지금도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있으니까.
크게 울리는 박동 소리 너머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가운데엔 내 이야기도 있었다.
“전 그래도 누나가 더 잘할 거라고 생각했…… 아, 죄송해요. 전 형이 별로였다는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그건 원래, 그러니까…….”
아나톨리가 말실수를 하고는 당황해선 수습하기 위해 이런저런 말들을 덧붙였다. 한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승우의 연주는 몇 년 전 내가 원하던 연주와 똑같았지만, 똑같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이 해석이 몇 년 동안 그대로 발전해 나갔을 때 어떻게 되었을지 유추해 내지 못한 까닭이다.
지금 나라면, 더 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머릿속에서 음악을 되풀이하며 현재 역량을 계산하던 내 귀에 에르네스트의 목소리가 휙 파고들었다.
“저 애가 할 마음이 없다면, 누구에게도 이길 수 없겠지.”
“…….”
피곤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간 맹목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면서도 맹렬하게 그다음으로 생각을 뻗어 나갔다.
다른 사람의 연주로 만족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인 줄 스스로 알지 않느냐던 리처드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대로였다.
한승우는 내 해석의 사본을 똑같이 연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게 하진 못했다. 애초에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현대의 연주자들은 하나의 곡을 가지고 다른 연주자와 겨루는 데에 능하지만, 사실 밖으로 향하는 투쟁심은 연주자의 본질이 아니다.
가장 강렬한 투쟁심은 안쪽으로 향한다. 과거의 자신을 공격하고 이길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만족할 수 있으려면 마지막엔 스스로를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죽을 때까지.
“…….”
난 눈을 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다.
고개를 드니 에르네스트가 피식 웃는 모습이 보였다. 일부러 차갑게 바라보던 눈빛은 온데간데없다.
에르네스트야말로 재작년 내 위클리 연주회에서 슈만의 연주를 듣고는 불평을 쏟아 냈던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안주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이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며 기뻐하는 것처럼, 그 역시 내가 한 계단 더 딛고 올라서길 바라고 있다.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여전히 허락받지 못하리란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할 수 있을까.
“아나스타샤.”
“응.”
“피아노 치실 건가요.”
조용히 묻자 그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아니, 애들이 네 순서라잖아. 그래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어.”
“…….”
따뜻한 아나스타샤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미안해졌다. 내가 바보 같은 소리를 했을 때 얼마나 실망했었을까.
“잘 잤니? 타티아나.”
“예.”
“20초 정도 잤으니 푹 잤겠네.”
“그 정도면 충분하죠.”
발렌티나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며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나스타샤가 헛소리 좀 그만하라고 그녀에게 핀잔을 주었다. 난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소파에서 살며시 일어나니 다른 친구들의 시선도 느껴졌다. 류보비와 사샤 그리고 아나톨리, 리처드와 에르네스트. 저 애들 중 한 명이라도 없었더라면 난 오늘 눈을 뜨지 못했겠지.
마지막으로, 연주를 다시 들려 줘서 내 착각을 뜯어고쳐 준 한승우와 눈이 마주쳤다.
“…….”
난 한승우가 다른 누군가의 계승자가 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연주 스타일을 바꿔 가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결코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나타 한 곡 정도는 그의 것으로 삼아서 가지고 가더라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었다. 정말 비겁하고 부끄러운 바람임을 알아도, 내겐 분명히 그런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난 정말 자신 있게 한승우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깨부숴 버릴 테니까.
“…….”
피아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한승우가 들려 준, 선명한 소나타의 거의 모든 부분들에 메스를 집어넣고 파헤쳤다. 대규모의 수술이었지만 채 네 걸음을 걷기도 전에 모든 것이 완료되었다.
완성된 것은 연습 한 번 해 본 적 없는 머릿속 음들의 집합이다. 이 또한 시간이 흐른 미래엔 고쳐야 할 점이 많이 느껴지겠지만, 적어도 과거의 박제품보단 나은 현재의 음악이었다.
아무것도 보증되지 않았음에도 어쩐지 긍정적인 기분이 들었다.
“후…….”
난 피아노 앞에 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천천히 손가락을 뻗어 망치를 쥐었다. 세상 모든 것들이 못으로 보인다. 부정적인 감정, 자존심, 날 힘들고 귀찮게 하는 모든 것들. 모두 깊숙하게 박아 놓으면 걸리적거리지 않고 말끔해진다. 난 주로 그런 용도로 망치를 써 왔다.
하지만 본래 이 망치를 어디에 사용했었는지, 난 다시 떠올려 본다.
건반을 누르면 작동하는 이 여든여덟 개의 작은 망치는 현을 때려서 소리를 내고, 새 음악을 일으켜 낡은 음악을 갱신한다.
음악이 곧 한 연주자의 혼이라면, 이 망치는 사소한 것이 아닌 바로 혼에 닿아야 하는 것이다.
“…….”
검은 피아노는 거대한 모루로 보였다. 원래 이렇게 크게 보였던가? 잘 모르겠다. 상관없었다. 약간 무섭기도 하지만 그보단 희열이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난 손끝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내 대답을 피아노로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