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52화 (452/1,277)

##  452화

1악장. 다단조, 악장지시는 알레그로 마에소토소allegro maestoso.

간단한 멜로디로 시작되는 도입부이지만, 난 전신의 신경을 집중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금은 컨디션도 괜찮고, 고루한 박제품에 집착할 생각도 없었다. 난 몇 년간의 경험을 모아 이 음악의 해석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 진보한 모습을 보일 생각이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임해서인지 막연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곡을 몸이 받아 줄진 알 수 없었다. 결국 이 또한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미련에 덧칠을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 손을 움직이기가 두렵다. 난 첫 마디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고 꼴사납게 망쳐 버리는 걸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시 그 고통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움직여야 했다.

이 박제된 해석을 다시 소생시키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

천천히 건반을 연주했다. 다행히 소리는 제대로 나왔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 난 그것을 건반 너머의 어두운 어딘가에서 끌어내듯 조심스레 가져왔다.

시작은 큰 문제가 없었다. 어딘가 아픈 곳도 없었고 감각도 정상적이었다.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곡에 변화를 주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시력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깊이 갔다 온 덕분인가?

언제나 그렇듯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의도대로 머릿속 음악을 표현해 낼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난 조금 더 자신감 있게 건반을 터치했다.

그리고, 약간 방심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 문제가 찾아왔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음악이 몸 곳곳에 파고들면서 손의 감각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굉장히 미약한 변화였지만 난 예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손끝으로 건반을 끝까지 제대로 감지하기 어려워졌다.

여전히 몸의 반응은 정직했다. 예상은 했지만 이 소나타가 25분쯤 된다는 것을 떠올리니 아찔해진다.

하지만 이 마음속 감정도 건반을 통해 새어 나갈까 봐 차분히 추슬렀다.

결국 어쩔 수 없다. 난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피아노 앞에 앉아야 하는 연주자였고, 할 수 있는 것에 핵심을 두고 집중해야만 했다.

그나마 구세프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으면서 컨디션이 안 좋은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연습을 한 경험이 있다 보니 그렇게까지 버겁지도 않았다. 이 정도는 당연히 있어야 할 패널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난 가지고 있는 모든 집중력을 끌어모아 연주에 쏟아부었다.

“…….”

술에 취한 남자가 잔을 쥔 모습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 손에서 피어나는 음악은 이제껏 했던 그 어떤 연주보다 내가 찾던 음악에 가까웠다. 친구들과 함께 했던 악보 공부, 구세프 선생님에게 받았던 레슨, 한승우의 선명한 연주. 그 모든 것이 도움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도 않았는데, 그게 바로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맹점을 찌르는 부분이었다.

템포 루바토.

대부분의 악상 표현들이 음에서 음으로 이어지면서 나타나는 것과 달리, 음과 음 사이의 호흡을 조정하는 것으로 연주자의 의도를 표현하는 기법이다.

난 이 루바토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잔향을 조금 더 남기고 손톱만큼 더 숨을 쉬었다.

나무 전체엔 흔들림이 없고 그저 나뭇잎만 조금 더 흔들렸을 뿐인데, 그것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되어 지금까지 연주한 곡의 완성도 자체를 달리했다.

훨씬 더 깊이 있고 산뜻한 음악이 보다 가까이 확 다가온다.

난 이 음악이야말로 박제품이 아닌, 언제나 진보할 수 있는 음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믿음을 꼭 쥐고, 앞으로 향했다.

***

리처드 피츠앨런 하워드는 그간 수없이 많은 천재들을 봐 왔다.

하나를 보고 열 개를 배우고, 열 개를 보고는 반대로 하나를 창조해 내는 재능을 지닌 예술가들.

이러한 천재들의 공통점은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서로 끝없이 상승작용을 일으킨다는 점이었다.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고,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된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예술의 범위를 넓혀 나간다.

“…….”

그리고 리처드는 지금 그 최전방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다.

모든 것을 지켜봐 왔다.

처음엔 타티아나가 이 학교에 들어와서 많은 것들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모습을 보며 흥미를 가졌었다. 그리고 이 학교에 절대 없어선 안 될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한 소나타에 집착하며 무너지려고 하던 타티아나에게 여유를 가지고 학교생활을 즐겨보는 것도 괜찮지 않냐고 가르쳐 주었던 건, 그저 그녀가 이 자리에 있어 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구심점처럼 그녀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타티아나의 역할은 그저 천재들의 집합을 이루는 데에만 있지 않았다. 그녀가 주변 친구들에게 정이 많고 따뜻하다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의 성격일 뿐이다.

타티아나는 모두를 둘러싼 울타리가 아니라 앞서나가는 선구자였다.

사실 그걸 잘 모르고 스스로를 울타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긴 했지만, 리처드는 지금 그녀가 다시 자신의 본질을 자각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

옆을 보니 한승우가 눈을 크게 뜨고 타티아나의 소나타를 듣고 있었다. 그 표정엔 환희와 억울함이 동시에 맴돌고 있었다. 리처드는 그 마음을 이해했다.

한승우가 타티아나의 진정한 음악성의 편린과 악보로 나타난 약도만을 읽고 그려 낸 소나타는 말도 안 될 정도의 완성도와 선명도를 지니고 있었다. 타티아나도 그것을 듣자마자 자신이 실패했던 것을 한승우가 완벽하게 복원했음을 인정하고 전의를 상실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잠시 감았다 뜬 타티아나의 눈엔 새파란 열망이 맺혀 있었다.

연주자로서의 본능. 그리고 천재성. 타티아나는 허상이 아닌 실체화된 음악을 마주하고서야 날카로운 창을 치켜들었다.

지금 그녀가 다시 선보이는 연주는 한승우가 내보인 해석과 거의 같았지만 디테일한 부분들에서 훨씬 더 높은 수준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소한 차이처럼 보이지만, 그야말로 절대적인 격차가 드러난다. 한승우가 연주했었던 소나타는 지금 이 소나타에 짓밟히고 산산이 깨어져 나갔다.

지난 1년간 연습하면서도 상상도 못한 지점을 찔린 한승우가 억울함을 느낄 만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승우는 환희에 찬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리처드는 저 애가 다음에 연주할 땐 또 한참이나 발전한 곡을 가지고 올 것임을 직감했다.

그때가 기대되기도 하지만, 사실 지금 타티아나의 연주에 영향을 받아 상상도 못할 곡들을 떠올리고 있는 건 리처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근질거리네…….’

내색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손가락이 절로 꿈틀거렸다. 저 정도 연주를 듣고도 가만있기란 정말 힘들었다.

슬쩍 옆을 보니 다른 아이들 역시 비슷했다. 특히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의 표정은 볼만했다.

두 사람은 신뢰에 찬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약간 불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리처드는 둘 다 놀리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아 참았다. 지금 자신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승우가 튕겨 넣은 불꽃이 화르륵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스스로의 한계를 모조리 불태우려는 듯한 타티아나의 연주는 잊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치명적이었다. 그 불꽃은 음악을 타고 날아와, 산불이 번지듯 이곳에 있는 모두의 가슴 속 어딘가에 불을 지폈다.

“…….”

예술의 최전방에서 한 걸음 떨어진 위치를 늘 고수하던 리처드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을 앞으로 디뎠다.

특수한 삶을 살면서 세상일에 무덤덤해지고 흥미 있는 일도 별로 없게 된 지 오래였지만, 영혼에 불길을 붙이는 소나타를 마주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을 순 없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이 애들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지켜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았지만, 그런 리처드도 사실 본질적으론 뼛속까지 음악가였다.

***

그저 편안하기만 한 여정은 아니었다.

난 허락되지 않은 산에 올랐을 뿐만이 아니라 더 높은 곳을 바라고 있었다. 몸이 보내는 경고는 점점 더 심해져 갔다.

감각이 무뎌지면서 잠시만 방심하면 손가락에 힘이 풀리려고 하고,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진다.

몇 번이나 겪었던 공포스러운 감각이지만, 그것도 이제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졌다. 난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힘을 분배하며 고개를 들었다.

실수는 없었다. 빠르게 진행해야 하는 2도 화음들을 깔끔하게 처리하면서도 주 멜로디를 잃지 않고 살려 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빈틈으로 보이던 구멍들을 확실하게 메꿨다.

이 곡의 완성도를 보완하는 데엔 타고난 신체 조건이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모두 내가 다룰 수 있는 부분들이었다.

강세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흐름을 깨뜨려 버린 단락들, 프레이즈 사이의 부조화, 더 잘할 수 있었던 표현들. 그 모든 것에 보완이 더해지며 음악적 수준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난 연주를 해 나가면서 실시간으로 곡이 완성되고 있다는 느낌을 분명하게 받았다.

안락의자에 털썩 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1악장을 뒤로하고, 난 2악장 미뉴에트로 향했다. 가파른 산행이 힘겨웠지만 견딜 만했다.

“…….”

한승우는 이 부분을 술에 취한 남자가 거실을 돌며 춤을 추는 이미지로 그려 냈다. 그건 내가 가지고 있던 해석과 일치했다. 난 이 리듬의 절묘함이야말로 2악장의 묘미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음악적 해석에도 모자란 점이 역시 많이 존재했다.

난 건반에 손끝을 대고 지그시 눌렀다. 느낌은 흐리멍덩해서 정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아직까진 건반 끝에 연결된 망치가 느껴졌다.

그대로 난 망치를 겨누었다. 바로 곡 그 자체에. 그리곤 거침없이 휘둘렀다.

망치가 치솟아 현을 때리고, 약간 흥겹고 자유로웠던 취중 무도는 산산이 분해되었다가 다시 조립되며 형태를 갖추었다.

본래 미뉴에트는 17세기 프랑스의 궁정무용으로 도입된 춤곡이었다. 언뜻 귀엽게 들리는 리듬과 짧은 스텝엔 위엄 있는 몸짓, 우아한 태도, 고아한 품격이 모두 드러나야 했다. 그래야 미뉴에트라 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술에 취한 미뉴에트를 표현하면서도 깊이가 부족해서 궁정무용이라는 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었다. 그 또한 관대하게 보자면 개성 있는 해석이 되겠지만, 이젠 엄격하게 곡을 대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시작은 인사부터 오가야 한다. 향긋한 와인 냄새가 떠도는 거실, 남자는 파트너 여성과 마주 보고 가볍게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이어지는 답사와 손을 잡고 적당한 속도로 움직이는 원무.

인사도 없이 술에 취해 홀로 자유롭게 춤을 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해석이었다. 리듬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미묘한 표현의 차이가 이와 같은 변화를 가지고 왔다.

미뉴에트는 이전의 흐름보다 훨씬 균형 잡히고 세련된 음악이 되었다.

“…….”

그리고 음악이 균형 잡히는 것과 반대로 내 몸의 균형은 시시각각 어긋나고 있었다.

이 곡은 기존의 해석을 토대로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몸 곳곳에 악영향을 주었다. 해석에 차이를 줄 땐 약간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전체적으론 너무 힘겨웠다. 손이 저리고 등이 아프다.

하지만 나는 더더욱 집중하며 곡에 파고들었다. 손아귀에 힘이 완전히 떨어져서 아예 건반을 누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신경 써서 누르면 잘 할 수 있었고 그 결과물은 생각 속의 것과 일치했다. 할 수 있었다.

생각한 만큼의 완성도를 갖춘 2악장을 마무리하고, 3악장 라르게토larghetto에 다다랐을 때였다.

난 건반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순간 당황했다가, 바로 정신을 바로잡고 연주에만 집중했다. 이미 겪어 본 일이라 그런지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죽음을 겪어 보았다 해서 죽는 게 무섭지 않은 건 아니고 고통이나 상실감 또한 마찬가지지만, 어떻게든 견딜 수 있게 된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난 옅은 미소를 머금고 연주에만 몰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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