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3화
에르네스트는 심경이 복잡했다.
한승우가 연주했던 소나타는 표현이 풍부하고 섬세하면서도 시니컬한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음색은 분명히 타티아나가 중앙음악학교에서 음악을 배우기 전의 해석임이 분명했고, 타티아나도 그것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굉장히 짜증 나는 상황이었다.
저 녀석은 귀가 초인적으로 좋으니까 그런 짓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의 음악적 지문을 복제하다니, 에르네스트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곡을 연주하는 걸 실패한 타티아나를 놀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알겠다. 에르네스트는 한승우가 그 정도로 미친놈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곡을 듣자마자 타티아나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모습은 정말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마치 이제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얼굴이어서, 화가 났다.
왜 상관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타티아나는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했었고, 에르네스트가 작곡한 곡을 연주해 보고 싶다며 헌정해 달라고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거기에 이름을 붙여 주겠다고 진지하게 약속하기까지 했다.
물론 연주자가 곡 하나에 얼마나 좌지우지되는지 잘 알지만, 그래도 타티아나가 이렇게까지 체념해 있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조금 냉정하게 굴었다.
왜 그렇게 있느냐고, 당장 피아노 앞에 앉아야 하지 않느냐고 부추겼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모든 것이 귀찮은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타티아나의 태도를 보며 정체 모를 불안감과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시 눈을 뜨리라 믿었다.
그가 아는 타티아나는 그런 연주자였다. 하루의 거의 전부를 피아노 연습에 투자하면서 얻어 낸 테크닉으로 너무나 가볍게 건반을 다루지만, 그러면서도 타티아나의 음악은 결코 가볍지 않다.
겉보기엔 성실하게 보수적인 음악을 선호할 것 같아도, 사실 타티아나는 여기에 있는 그 누구보다 강렬하고 진취적인 음악을 앞장서서 쟁취해 나가는 사람이었다.
중앙음악학교에 와서 미하일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의 레슨을 받으며 음악성에 변화가 생기긴 했다. 허나 그렇다고 타티아나라는 연주자가 지니는 기본적인 성향이 어디론가 사라지진 않는다. 이렇게 쉽게 싸우길 그만둘 리 없었다.
그런 믿음으로 타티아나를 바라보길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타티아나는 눈을 떴다.
“…….”
스스로 해답을 얻은 사람의 눈빛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해선 아쉬움을 조금 느꼈지만, 지금은 이렇게 지켜봐 주는 게 정답이라 생각했다.
그는 약간의 아쉬움을 접어 두며 연주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대체 뭘 느낀 거야?’
아마 한승우와 비슷한 연주를 하지 않을까 짐작했다. 왜냐하면 원래 그것이 타티아나의 것이었고, 또 그녀가 도달하고 싶어 했던 최종 목표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마치 원래부터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소나타를 연주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에르네스트조차 미처 짚어 내지 못했던 부족한 부분들에 완벽을 추구했다.
저렇게 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안 했던 건 아마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겠지.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갑자기 한계가 없는 것처럼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피아노를 치다 보면 벽에 막힌 것처럼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러다 모종의 계기로 그 벽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연주자는 그때까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모두 할 수 있게 된다.
목표라 생각했던 음악을 정작 앞에 두니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느꼈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곧바로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주를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에르네스트는 새삼 타티아나의 실력을 느끼며 곡에 빠져들었다.
3악장은 느긋하고 감성적인 악장이다. 직접 입을 열어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는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주 선율이 되었다.
에르네스트는 평소 타티아나의 음색을 잘 알고 있었다. 쇼팽이 성악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하여 작곡했듯, 타티아나 역시 성악에서 정말 많은 장점들을 피아노로 옮겨 오는 데에 능숙한 연주자였다.
때문에 그녀는 연기에 능했다. 언제나 역할을 바꾸어 가면서 때로는 상냥하게, 때로는 섬뜩하게 음악을 조형해 냈다.
하지만 오늘은 전혀 달랐다.
나지막하게 울리지만 도도한 음색은 사람의 목에서 나는 소리를 따라한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 노랫소리는 피아노의 목소리 그 자체였다.
타티아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그녀는 피아노와 하나가 되어 음악을 쌓아 올릴 뿐이었다.
“…….”
타티아나가 오늘 연주한 스크리아빈의 비극적 시곡을 들으면서 떠올린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갔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신지학자. 스크리아빈의 곡엔 분명히 그런 바람이 묻어 있었다.
어쩌면 타티아나가 그런 걸 원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지금 쇼팽을 들으며 에르네스트는 생각을 달리했다.
연주자로 살면서 되고 싶은 건 오직 피아노뿐이었다. 피아노 그 자체가 되어 생각하는 대로 건반과 페달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연주자에게 있어 피아노는 곧 신이기도 하다.
따라서 스크리아빈의 신지학은 망상 같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연주자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하나의 지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바로 지금, 타티아나가 그 지점에 손가락 끝마디 정도는 걸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화음들을 톡톡 치며 악장을 마무리할 즈음, 난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을 아예 감아 버렸다.
먼 곳에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눈에 힘을 주면 아직까지 건반과 손은 볼 수 있었지만, 집중력을 앞을 보는 데에 쏟는 것도 아깝게 느껴졌다.
물론, 멀쩡할 때도 눈을 감고 피아노를 연주하면 실수하기 십상인데 감각이 무뎌진 지금 눈을 감는 건 정말 큰 모험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난 지금 연주에 있어서 그런 건 큰 문제도 되지 않음을 확신했다.
“…….”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바닥이 느껴지지 않고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부양감. 온몸의 감각이 희미해지자 심지어 내가 지금 이곳에 제대로 존재하고 있기는 한 건지 모든 것에 확신이 없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피아노는 말을 잘 들어주고 있고, 음악은 분명히 존재했다.
처음 겪는 묘한 감각이지만 음악은 믿을 수 있었다. 작고, 약하고, 느리던 손은 물리적 한계가 미치지 않는 것처럼 충실하게 내 음악을 실어 날랐다.
눈까지 감아 버리자, 생각하고 있는 음악을 쏟아 내면 저절로 건반이 눌리는 느낌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저 머릿속의 음악과 귀로 들리는 음악이 겹쳐져 나란히 흘러갔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열띤 고양감만이 느껴진다.
이게 심신의 괴리에서 오는 심각한 부작용의 일종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면 그 어떤 음악이라도 연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
쇼팽 소나타 1번의 4악장은 그리 까다롭지 않으면서도 연주자를 곤란하게 하곤 한다.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는 음형들을 빠르게 접시 위에 담아내면서도 플레이팅을 아름답게 하는 일도 어설프지 않아야 했다.
난 숙련된 요리사처럼 음들을 요리했다. 이 음악에 제일 잘 어울리는 향과 색.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맛까지.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피아노 위에 올렸다.
그 모든 것은 바짝 마른 박제품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도 탱글탱글하게 윤기가 흐르는 음악이 되어 주었다.
이전까지와는 달랐다. 몸에 문제가 생기면 자연스레 물리적 한계에 부딪혀서 제대로 원하는 표현을 해내지 못하고 음악은 망가지는 것이 늘 있어 온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과 관계없이 피아노를 마음 가는 대로 다룰 수 있었다.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건반의 탄력과 해머만을 느낄 뿐이다. 내 몸의 감각을 잘 느낄 수 없는데도 피아노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건 굉장히 특이한 경험이었다. 마치 피아노에 씐 것 같았다.
난 늘 이렇게 할 수는 없음을 직감했다. 어쨌거나 몸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건 명확했으니까.
하지만 연주를 멈출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즐거운데 어떻게 멈춰?
“하.”
몸에서 발하는 모든 경고를 무시하고 있으니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연주를 마치고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건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연주 집중이 깨어지고 나면 내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솔직한 말로 자신이 없다.
또 문제가 생겨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직감은 꽤 심각하게 다가왔다.
정말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친구들이 기겁하는 건 물론이고…… 또 아버지와 예고르가 걱정하겠지. 지금 연습실 밖 어딘가에 있을 빅토르도 질책받을 테고.
미안해요 빅토르. 하필 나 같은 사람의 경호를 맡아서…….
하지만 늘 그렇듯 허락받는 것보단 용서받는 게 쉽다. 쓰러질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서 끝까지 곡을 마쳐도 되냐고 누군가에게 허락받는 일은 요원하겠지만, 어쨌든 내 마음대로 해 놓고 용서받는 건 어떻게든 될 것 같으니까.
참 철없고 양심 없다는 걸 자각하면서도, 난 웃었다. 이 곡을 연주하는 것 자체도 허락받지 못했는데 하고 있지 않은가?
벌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순 없다. 하지만 뻔뻔하더라도 정상참작이 가능하다면…… 내게서 피아노를 빼앗아 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난 이 곡에 크나큰 미련과 트라우마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중요시하는 건 아니었다.
음악을 배워야 할 선생님들이 있고, 음악을 공유해야 할 친구들이 있는 한 난 앞으로도 계속 피아노 앞에 앉아 있고 싶었다.
“…….”
뻔뻔하고 이중적이고 볼썽사납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난 양손에 움켜쥐고 싶은 것이 많은 욕심 많은 연주자였으니까.
난 그런 내가 누구인지 피아노로 여실 없이 드러냈다.
다시 건반을 움직였다. 쿵쿵거리는 불안한 음형이 발밑에서 치솟는다. 내가 발을 구를 필요 없이 피아노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유려하게 선율을 뿌려서 장식하다가, 다시 거두고 뭉쳐서 굴린다. 그다음은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발만으로 슬슬 굴리는 게 훨씬 나았다. 난 페달을 살짝살짝 밟았다 놓으며 모든 음들을 데굴데굴 굴렸다.
중간중간 건반을 때려 넣어 음들을 추가하니 음악은 무시무시하게 커졌다.
난 그것을 다시 풀어헤치고, 잘라서 스테이플러로 벽에 박아 넣고, 붙여서 잡아당겼다.
철저하게 이성에 기반을 둔 아카데믹한 연주는 멀리멀리 가 버렸다. 난 거의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신 있게 내 것이라 말할 수 있도록 머릿속에 정립해 두었던 소나타를 그대로 쏟아내는 데에 온 정신을 모아야만 했다.
음악이 지나갈수록 뒷부분은 적게 남으니 머리를 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뒤로 가면 갈수록 모든 악장을 합친 전체적인 음악의 그림이 크게 다가오면서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 그림은 거의 다 완성되어 있었다. 실수해선 안 된다.
마지막으로 건반을 들어 휘둘렀다. 내 의도에 따라 음악은 흩뿌려지며 마지막 종지부를 찍었다.
난 피아노의 커다란 울림에 따라 떨고 흔들리다가, 멈췄다.
“와우.”
“브라바! 타티아나.”
피아노의 목소리가 아닌 사람의 목소리가 쨍하니 울렸다. 내 귀는 그 주파수를 처음 받아들이는 것처럼 깜짝 놀라더니, 순식간에 날 현실로 잡아끌었다.
“……읏.”
현기증에 머리가 핑 돈다.
어쩌면 현실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어림없는 착각이었다. 끔찍한 격통이 온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겠다.
신경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몸이 저리고 감각이 별로 없는데도 통증은 둔해지는 일 없이 그대로라니, 비겁하단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상을 쓰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며시 눈을 떴다. 눈앞은 불투명한 막이 끼어 있는 것처럼 잘 안 보였다. 하지만 친구들의 실루엣은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대로 죽어 버릴 것 같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난 이번엔 다리와 허리에 모든 힘을 쏟아 넣어 의자에서 일어나선 친구들에게 가볍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천천히 소파로 향했다. 이대로 쓰러지면 더 걱정시키게 될지도 모른다는 일념만으로 정신을 붙잡았다.
그렇게 아나스타샤의 옆에 털썩 앉자, 난데없이 옆에서 무언가가 확 끌어안았다.
“잘했어, 타티아나. 잘했어.”
“아하하…….”
나쁘지 않았죠?
이게 바로 내가 원했던 곡보다 더 진보된 곡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었는데, 아깐 생각만으로도 연주가 가능했던 것과 달리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건 굉장히 힘겨웠다.
결국 내가 말한 건 짧은 웅얼거림이었다.
“잠깐…… 잘게요.”
“지금?”
“조금만요.”
아까 그랬던 것처럼 잠깐 자면 괜찮아질지도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묻더니, 곧 따뜻하게 말했다.
“잘 자.”
그 목소리는 마치 마법처럼 날 무의식으로 끌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