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56화 (456/1,277)

##  456화

모스크바 교외로 피크닉을 가던 길. 철판을 연달아 때리는 소리와 비명, 마구 흔들리다가 결국 휙 뒤집혀 버린 시야.

내가 기억하는 당시 상황은 그러했다.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오른팔로 활약하는 기업엔 적이라 할 수 있는 기업들이 많았다. 기업들 간의 알력 다툼은 대부분 돈과 계약 등으로 이루어지지만,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이렇게 비상식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일도 있다.

불타는 자동차의 생존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난 경찰과 의사의 손을 거쳐 마지막으로 베르체노프가로 향했고, 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났다.

“…….”

기억뿐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처음이 아닌 감정을 처음 느끼는 기이한 감각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난 그 모든 것들을 차분히 짚어 나갔다.

한순간에 가족을 모두 잃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에 빠져 있던 것, 그러면서도 새로운 가족이 되어 주겠다 내민 손을 보며 느꼈던 기쁨, 안도감.

그리고 조금 나이가 들어선 어릴 때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에 대한 반발처럼 차오른 분노와 자기혐오.

14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억이었지만, 그 기억은 결코 편치 못했다.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리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연민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짚어 나가고 있는 기억들은 곧 내 기억들이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옅은 경계선을 느끼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다.

영혼은 어디에 있고 자아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오랜 고민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어려운 문제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내리기에 난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 삶에 대한 해석을 갖출 순 있었다.

난 대리인이 아니다. 그리고 자기 연민에 빠지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다.

“…….”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유리 알렉세예비치 베르체노프. 날 보자마자 양녀로 들였으며 그 후로도 한 번도 위화감을 보이지 않으셨던 분.

예전의 나는 아버지의 태도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젠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친우의 딸이 불쌍해서 거둔 것이 아니었다. 친우의 딸은 곧 자신의 딸이나 다름없다는 진심을 행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내 입장이 약간 헷갈리긴 했다. 하지만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

달리 부를 호칭은 없었다. 변할 것도 없었고, 잘못된 것도 없다. 되레 제대로 된 위치를 찾은 것 같아 마음이 편하다.

모르고 있던 기억들을 받아서 새롭게 느끼게 된 것들이 많았지만, 내 태도에 달라짐은 없었다. 이건 내 만용이 아니라 그녀라면 당연하게 취했을 태도였다. 이제 난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기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기쁘지.”

“정말인가요.”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그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내려다볼 뿐이다. 내가 기억을 되찾았다는 사실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지 선했다.

혼수상태에 빠지기 직전에 보였던 모습은 아버지가 걱정할 수밖에 없게 하기에 충분했다.

난 조금 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열었다.

“전 좋은 추억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기억해 낼 수 있어서 기뻐요.”

희미한 미소를 더하자 아버지가 조용히 물었다.

“어떤 추억들인지 듣고 싶구나.”

“많아요. 공연을 보러 갔었던 일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갔었던 일도요. 그때 보았던 야경이 잊히질 않네요.”

“…….”

“한 번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그렇지도 않나요?”

“타티아나.”

약간은 농담도 섞어 가며 이야기를 해 볼 참이었는데, 아버지는 그쯤하면 되었다는 듯 내 말을 탁 끊었다.

그리고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도록 옭아매는 질문.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지?”

나와 아버지 사이에 있는 어두운 이야기들을 회피하고 싶다면 이쯤에서 적절하게 말을 고르면 된다.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들은 떠오르지 않고 오직 좋았던 기억들만 난다고 해도 정신과 의사가 직접 내 머리를 열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핑곗거리는 아무거나 대면 그만이었다.

그것도 하나의 올바른 해결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선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있었다.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아버지는 무표정하게 가만히 서 계셨다. 내가 말하는 전부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가늠하시는 것 같기도 해서, 난 조금 더 확실하게 말했다.

“어릴 적 저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나 봐요. 모두 선명하게 떠올라요.”

“…….”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저에게 트라우마가 될 기억들도요.”

말을 맺자 그제야 아버지의 얼굴에 감정들이 떠올랐다. 안타까움과 씁쓸함.

아버지는 지금까지 내 과거에 대해선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으시고, 주변을 완벽하게 입막음하기도 하셨다. 아예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내 행복이 될 것이란 믿음에서 하신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아버지는 약간 체념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결코 대답해 주지 않으시겠지만 지금이라면 대답해 주시리란 생각이 들어서, 난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부분을 살며시 꺼내 놓았다.

“한 가지 여쭈어도 될까요.”

“……그래.”

“코시기나에 있는 저택은 아버지가 불태우신 게 아니죠?”

베르체노프가로 오기 전까지 난 코시기나 거리에 있는 저택에 살고 있었다.

뒤죽박죽으로 떠오르는 기억들 중, 가장 선명하고 충격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잿더미가 되어 버린 저택이었다.

그 이후의 기억은 그리 뚜렷하지 않다. 대신 아주 격렬한 감정들이 날 사로잡는다. 심장을 옥죄는 끔찍한 분노.

테러로 혼자가 되었을 땐 충격 때문에 미처 느끼지 못했었지만, 그건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고 응축되며 점점 심각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난 그것을 베르체노프가의 사람들에게 쏟아 내기도 하고, 때론 눈에 보이는 모두에게 퍼부었다.

“…….”

당시 아버지는 날 몇 번이고 설득하려 했지만, 내 귀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다시 한 번, 아버지는 천천히 말씀하셨다.

“그럴 리가 있겠니…….”

드물게 힘없이 처진 목소리.

몇 번이고 그 일로 말을 주고받았지만 모두 무의미했었던 것을 다시 떠올리시는 듯하다.

난 다시 아버지를 힘들게 할 생각은 없었다.

“저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요.”

내 대답에 아버지가 눈을 크게 떴다.

예전엔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말이라고 울며 소리쳤던 기억이 선명하게 맺혀 있다.

당시 내겐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아버지가 코시기나의 저택에 대해 보고받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것과, 걱정이 되어 예전 집으로 찾아가 보려 했지만 그 근처에 가는 것도 철저하게 금지당한 사실이 불신의 씨앗에 싹을 틔웠을 뿐이다.

그렇게 석 달에 걸친 시도 끝에 가까스로 빠져나가서 옛 집에 찾아갔지만, 내 앞에 있는 건 까맣게 타 버린 잿더미뿐이었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코시기나의 저택에 남아 있던 기밀 자료들을 마지막으로 노린 무리들이 그 자료를 취하는 과정에서 저택에 불을 놓았을 거라 설명했고, 그걸 전화로 보고받았을 뿐이며 불타 버린 저택을 내가 보면 충격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에 못 가게 막은 것이라 말씀하셨다.

지금은 전부 이해할 수 있지만 당시 충격에 빠진 난 그런 아버지에게 내가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자리를 남김없이 없애 버리신 게 아니냐고 소리를 질렀었다.

그 후로 모든 관계는 악화일로만을 걸었었다. 난 불신에 휩싸여 저주를 퍼부었다.

“전 그때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 그런 걸 변명처럼 말씀드리고 싶지 않아요.”

당시 그 자리에 없었던 입장에서 보자면 누가 극단적이었는지는 명명백백하다. 그리고 이젠 내가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난 그때 죄송했었다고 말씀드릴 수 없었다.

조종당하는 인형이나 대리인이 아닌 당사자로서 난 이 기억과 감정에 솔직해야만 했다.

다시 베르체노프가를 빠져나와 코시기나로 향하며 생각했던 것들, 그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서 홀로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눈을 감을 때까지 느꼈던 모든 감정들. 내가 받은 마지막 감정은 결코 후회하거나 바보 같았다고 생각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젠 그러한 감정들을 차분하게 갈무리할 수 있었다.

시간을 들여 의연해질 수 있었던 건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난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전부 기억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젠 괜찮다는 말을 전해 드리고 싶었어요.”

“…….”

“아버지도 괜찮으신가요?”

아버지는 한참이나 날 바라보시더니, 내가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는 걸 느끼셨는지 보다 진솔한 어투로 천천히 입을 여셨다.

“난…… 잘 모르겠구나, 타티아나.”

아버지는 막 쏟아져 나오려는 것들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네 가족들……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난 결국 해내지 못했고, 심지어 네 추억이 깃든 집까지 지키지 못했지. 복수를 했지만 그렇다고 무엇이 돌아올까.”

테러를 막지 못한 건 누구의 책임이라 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의 목소리엔 지독한 후회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다시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타티아나, 네가 날 원망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

“무슨 말과 행동을 해도 상관없다. 다만, 스스로를 도외시하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진실된 심정이다.”

아버지는 당시를 생각하며 기억을 찾은 내가 아버지를 제대로 인정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워낙에 극단적인 일을 저질렀으니 그렇게 생각하실 만도 했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이, 나는 코시기나의 저택에서 눈을 감긴 했지만 그렇다고 유리 알렉세예비치를 끝끝내 아버지로 여기지 않기로 한 건 아니었다.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기업 간의 알력이 폭발하여 불똥이 튄 것은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잘못이 아니었고, 유리 알렉세예비치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코시기나의 저택이 불탄 것 역시 마찬가지고.

단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까맣게 물들여 버린 감정을 어떻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는 이해하면서도 결국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난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천천히 그 모든 생각들을 정리한 나는 다시 의심 없이 할 수 있는 말들을 차곡차곡 준비했다.

복잡한 기억과 사정들, 하지만 마지막으로 준비된 것들은 굉장히 평범한 말들이었다.

“……작년에 약속드렸던 것 같아요. 저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을 거라 말이죠.”

“그래.”

“그 말, 지금 생각해 보니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었어요.”

언제 연주자가 아니게 될지 모르니 했었던 맹세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 입장에선 섬뜩하게 들으셨을 것 같다.

난 조금 더 단순하면서도 강력하게 다시 약속했다.

“다시 약속드릴게요.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

내 기억이 돌아왔다고 했을 때부터 아버지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죄책감과 긴장감이 눈이 녹는 것처럼 사라져 갔다. 아버지는 정말 내 걱정밖에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약간 더 미소를 지으며 난 재촉했다.

“그러니 괜찮다고, 기쁘다고 말씀해 주세요.”

아버지는 그제야 진정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기쁘구나, 타티아나.”

“감사드려요.”

“돌아와서…… 무사히 깨어나 주어서 정말 고맙다.”

앞으로도 아버지와 할 이야기가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이후로도 무슨 이야기라도 잘 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난 늘 확신이 없었다. 어떤 판단을 하더라도 내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대리인이 되어 월권을 행사해도 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이 들곤 했었다. 그래서 난 늘 모든 일에 두려워했고 불안감에 떨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난 분명한 자신감으로 아버지를 대할 수 있었고, 아버지 역시 날 그렇게 대했다. 난 이제야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

그리고 동시에, 또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분들이 떠올랐다.

난 그 모든 것들이 2년 전에 스스로 모든 걸 내려놓으면서 포기해야 마땅한 기억들이라 생각했고, 또 그게 앞으로 내게 주어진 당연한 의무라 여겼었다.

하지만 이젠 혼자서 판단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녀의 입장에서 바라보니 그게 정답도 아니었다. 되레, 본래 성격대로라면 한번 찾아가 보고도 남았다.

왜 못 해? 이제 제대로 알게 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볍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여전히 내 의무는 건재했다. 결국 장막 뒤로 사라지면서 내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간 그녀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우라는 것이 있었다. 쿨한 그녀는 내가 죄책감 같은 걸 가지길 원하지 않겠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난 그 대신 지금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또 다른 한 명의 가족을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잔뜩 긴장해한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걱정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