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7화
난 원래 외동이었다. 때문에 갑자기 새로 생긴 오빠에게 약간 경계심이 있었지만 그와 비슷한 호기심 역시 느꼈고, 결국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건 8년 전이나 2년 전이나 똑같았다.
그리고 루슬란 오빠 역시 날 그렇게 대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데리고 온 여자애를 여동생으로 대하라고 하면 황당하게 느낄 만도 한데, 오빠는 그 어린 나이에도 의젓하게 상황을 이해하고 날 친동생처럼 대했다.
지금은 계시지 않는 어머니인 빅토리아도 날 딸처럼 대해 주셨고, 그렇게 한참 동안은 괜찮았다.
큰 사고 직후이긴 했지만 열 살도 안 된 나는 많이 어려서 주변 사람들의 따뜻함에 크게 영향을 받을 때였다. 가끔은 트라우마에 발작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크게 별 탈 없이 시간이 흘렀다.
문제가 생긴 건 역시 이전에 살던 코시기나의 저택이 불타 버린 일 이후였다.
석 달 정도 꼼짝도 못하고 학교와 집 외엔 어디에도 가지 못하면서 난 서서히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미쳐 가고 있었고, 결국 잿더미를 본 뒤로는 스스로 마무리를 짓기 전까지 1년 넘는 시간 동안 불신과 광기에 휘둘리고 있었다.
“…….”
그 기간 동안 무슨 말을 했었는지 분명히 기억한다. 강렬한 감정은 스스로를 잡아먹으며 점점 크기를 키워 종국엔 증오로 화했다.
난 절대 그렇게 대해선 안 될 사람들을 증오로 대했다. 모두를 부정하고 저주했다. 늑대 같은 기업들, 바로 당신들 때문에 테러가 일어난 것 아니냐고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독선에 휩쓸려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모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던 것이 아직도 선명했다. 난 몸속의 피가 모두 얼어붙는 것 같은 후회를 느꼈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못했다.
결코 해선 안 될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 냈고, 루슬란 오빠는 몇 번이나 폭발했었다. 난 코피가 날 정도로 강하게 뺨을 맞기도 했었다.
그때 분노에 찬 눈으로 날 노려보던 루슬란 오빠를 생각하면, 지금 잔뜩 긴장한 이 사람은 대체 뭘까 싶다.
하지만 재미있다고 생각할 순 없었다. 난 오빠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잘 아니까.
“루슬란…… 오빠.”
가만히 이름을 부르자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해야 할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미안하다는 말부터 드리고 싶어요.”
내가 루슬란 오빠에게 느끼는 감정은 아버지에게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버지에겐 느끼고 있던 오해가 있었고 결국 그걸 제대로 풀 생각도 못 하고 스스로 잠식당해 결국 혼수상태로 코시기나의 폐허에서 발견되는 결과가 되어 버렸지만, 루슬란 오빠에겐 오해랄 것도 없었다. 오빠는 그저 내 화풀이 대상이 되었을 뿐이었다.
심지어 난 그렇게 구는 와중에도 후회와 미안함을 느꼈었다.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던 건 더 큰 잘못이었다.
그런데 내가 사과하자 루슬란 오빠는 당황해하면서 말까지 더듬었다.
“아, 아니…… 왜 네가, 내가 더…….”
“아니에요. 그때도 분명히 먼저 사과하고 싶었어요.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절 용서해 주셨으면 해요.”
“…….”
내 말에 오빠는 그제야 평정심을 되찾고 날 제대로 봐 주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리는 표정엔 순간적으로 고통이 스쳐 지나간다.
그 고통을 다시 내어 놓는 게 맞을지, 루슬란 오빠는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리고 진지한 내 눈을 보더니 한숨을 쉬듯 말했다.
“옛날 일이니 다 잊었다고 하면 비겁한 짓이겠지. 네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리고…… 난 원래 네가 그걸 기억해 내길 바랐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기 전까지 루슬란 오빠는 내가 과거를 기억해 내길 은근히 부추기곤 했었다.
나중엔 결국 모든 걸 없던 것으로 하려는 아버지의 생각에 동조하고 날 새롭게 보긴 했지만, 루슬란 오빠는 보기엔 약간 허술해 보여도 사실 굉장히 올바른 사람이었다. 결국 이렇게 똑바로 마주하고 매듭을 짓길 바랐을 것이다. 난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죠.”
“……그래,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받아 줄게.”
평생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할 말이 없었을 텐데.
루슬란 오빠는 별다른 조건 없이, 내가 진지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사과를 받아 주었다.
그러고는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
“분명 어머니도 용서하셨을 거야.”
빅토리아라는 이름은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프곤 했다.
어머니는 중병을 앓아 스스로의 몸이 편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정말로 날 가엾게 여겼고 슬퍼했다. 정말 인자하고 따뜻한 분이었다.
그런 분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해 드리지 못하고 뭘 했던 걸까.
그때 느꼈던 격렬한 후회의 감정이 뇌리를 타고 오른다. 가만히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난 고개를 돌려 선반에 있는 가넷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루슬란 오빠 역시 내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옅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생전에도 한 번도 널 미워한 적이 없는 분이셨지만.”
“그랬었죠.”
“응…… 그에 비해 난 못났지. 타티아나, 내가 했던 일들도 용서해 주겠니.”
나를 때리기도 했던 일은 루슬란 오빠에게 아직도 죄책감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죄책감이 훨씬 더 컸다. 심지어 난 맞는 그 순간까지도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 착하던 오빠가 이렇게 된 건 모두 내 탓이라는 자기혐오만을 가득 느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루슬란 오빠에게 설명하려니 조금 어렵다. 맞은 내 쪽이 더 심하게 죄책감을 느꼈다는 건 때린 사람이 더 아팠다는 것만큼이나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예전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지금 모든 것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잠시 생각해 본 나는 조금 더 단순하게 내 마음을 전달하기로 했다.
“옛날 일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걸요?”
“……뭐?”
루슬란 오빠가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난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아나스타샤가 그랬는데 원래 남매는 그런 거더라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럼 저랑은 아무 관계도 아니란 말씀이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한 행동을 어떻게 그렇게 넘어가려고……!”
“기억 안 나요.”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만, 기억하지 않는다. 그런 모순된 말로 나는 내 의사를 전했다. 용서는 말할 것도 없다.
루슬란 오빠는 형식적으로라도 내게 용서를 받으면 안 된다. 잘못이 없는 사람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손찌검을 했던 일을 이렇게 없던 일로 하면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내 마음 아니겠는가? 내 마음 속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만장일치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루슬란 오빠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날 바라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지금이야말로 날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그 정도는 기쁜 마음으로 맞아 줄 수도 있지만 너무 장난스럽게 구는 것도 별로 좋지 않을 것 같다. 난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밝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결국 루슬란 오빠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난 앞으로 잘 부탁해야 할 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빅토르나 나제즈다를 비롯한 베르체노프가의 고용인 분들이었다.
거의 가족들만큼이나 날 오래 봐 온 분들이 많았다. 이 사람들 역시 내게 있어선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모두들 정말 미안하고, 또 감사해요.”
“미안할 것도 많으시네 정말.”
“기억이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아가씨.”
올가는 훌쩍거리기까지 했다. 난 그녀를 다독이며 웃었다.
그런데, 웃음이 오가던 분위기는 어느 순간 갑자기 반전되었다. 그건 루슬란 오빠의 날카로운 지적에서 시작되었다.
“기억이 돌아온 건 다행인 일이지. 그런데…… 타티아나. 이번에 쓰러진 것도 무리한 연주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앗…….”
일어나자마자 알려야 할 중요한 일이 있었고, 그 때문에 정작 내가 쓰러져서 일주일 동안이나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선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대로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루슬란 오빠는 아무리 깜짝 놀랄 일들이 넘쳐도 핵심을 놓치지 않곤 했다.
이럴 때도 예리함을 잃지 않으시는 걸 보니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미래는 밝을 것 같네요…….
그런데 애석하게도 지금 내 상황은 그리 밝지 못했다. 난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 그게…… 중요한 곡이 있어서요…….”
“네게 중요하지 않은 곡이 어디 있겠어. 다 중요하겠지. 하지만 앞으론 절대 쓰러질 정도로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건 어디의 누구였지?”
“음…….”
“그건 기억 안 나?”
아까 전까지 용서해 달라고 하던 사람은 어디 간 거야?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이렇게 고압적으로 나오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내가 해야 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하지만 오빠는 이 정도로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 결국 아군을 찾아 눈을 돌렸다.
하지만 당연히 아버지도 내 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에도 외출금지로 벌을 달라 할 생각은 아니겠지? 타티아나.”
“부디 피아노만 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건 아무것도 벌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저번에 스튜디오에서 쓰러졌을 때 난 스스로를 외출 금지시키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계신다.
루슬란 오빠는 짐짓 팔짱까지 끼더니 무섭게 말했다.
“이번엔 일주일이나 일어나지 못했고……. 정말 네가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다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내가 일주일 내내 생각했었거든?”
“……아하하.”
사람이 너무 궁지에 몰리면 웃음이 나온다는 게 정말이었다. 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내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뭐든 간에 그리 복잡할 것 있겠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 운명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그런데 굳이 내가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더라.”
“예?”
“네 친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거든.”
루슬란 오빠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지 잠깐 동안 이해하기 어려웠다.
러시아어에 대한 기억이 해일처럼 추가되면서 난 언어적인 모든 부분에서 훨씬 더 나아졌지만, 말을 알아들어도 뜻을 빠르게 해석하지 못하면 소용없었다.
“……!”
몇 초가 흐른 뒤에야 내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졌는지 깨닫고 파랗게 질렸다.
난 친구들과 함께 빌린 연습실에서 연주를 하고는 잠들듯 기절했다.
함께 있던 친구들이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을까. 연주를 하면서 오늘 저녁은 못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때도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지만, 정작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까 식은땀이 흐른다.
게다가 몇 시간도 아니고 일주일이나 기절해 있었으니 지금 학교에 있는 친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상상도 안 간다.
루슬란 오빠는 내 상상력에 불을 지펴 주었다.
“아나스타샤가 지난 일주일 내내 왔었어.”
“정말요……?”
“정말이지.”
내가 아프기라도 하면 어쩔 줄 몰라 하고 걱정이 많은 그녀가 일주일 내내 찾아왔다는 건 내게 무시무시한 죄책감을 안겨 주었다. 난 대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그 애뿐만이 아니야, 다른 애들도 몇 번이나 왔었어. 모두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
“어……어쩌죠.”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
“그럼 누구한테 묻나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물었더니 루슬란 오빠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내가 지금 너무 당황해서 헛소리 중이라는 걸 잘 안다.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루슬란 오빠가 무자비하게 스마트폰을 들었다.
“일단 난 지금 네 친구들에게 연락할 생각인데.”
“연락을요? 왜요?”
“왜긴 왜야. 네가 일어났다고 알려 줘야지.”
“잠시, 잠시만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지금부터 해.”
“하지 마세…… 윽.”
난 힘으로라도 오빠를 막으려다가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앞으로 푹 쓰러졌다. 이제 막 일어난 주제에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친구들에게 알리는 건 좋다. 어차피 학교에도 가야 하니까. 사과도 제대로 해야 하고. 하지만 지금은 싫다.
오랫동안 공백을 두고 있었던 아버지나 오빠와도 얼굴을 보자마자 어떻게 이야기를 해 나가야 할지 명료하게 떠올랐는데 친구들에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니. 조금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난 지금 가장 당황하고 있었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버지는 절대 날 도와주지 않으실 것 같고, 마지막 희망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쪽을 보고 있는 빅토르뿐이었다.
“…….”
난 그와 눈빛만으로도 통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애절한 눈빛으로 그에게 내 의사를 전달했다. 제발 말려 달라고.
“친구분들은 제가 차량으로 모시고 오겠습니다.”
물론, 빅토르도 내 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