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8화
타티아나가 깨어났다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아나스타샤는 바람처럼 교실로 향했다. 조퇴 절차를 밟을 생각도 없이 곧장 가방부터 들었다. 이대로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베르체노프가로 갈 생각이었다.
“아나스타샤! 같이 가.”
막 다시 교실을 빠져나가려는 아나스타샤를 발렌티나가 붙잡았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는 걸 보니 같은 메시지를 받았음이 확실했다.
그리고 몇 초 기다리는 사이 다른 9학년 친구들도 도착했다. 분명 오늘 레슨이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모두들 서로 시선을 교환하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가방을 들고는 아나스타샤 곁으로 모였다.
“지금 갈 거지? 3학년 애들은?”
리처드가 물었다. 류보비나 아나톨리도 타티아나가 소중하게 여기는 아이들이다. 하지만 루슬란이 그 애들에게까지 연락을 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타티아나도 되도록 건강한 모습을 그 애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할 것 같고.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아마 우리들에게만 연락이 왔을 거야. 오늘은 금방 가서 괜찮다는 것만 보고 올 테니 애들에겐 나중에 이야기해 주자. 타티아나가 직접 와서 이야기해도 좋고.”
“그래.”
“가자.”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그리고 에르네스트, 리처드, 한승우까지 다섯 명은 길게 토의할 것 없이 곧장 학교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택시를 부르려고 스마트폰을 드는 아나스타샤의 눈에 선글라스를 쓴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들어왔다.
“빅토르?”
타티아나는 저택에 있을 텐데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 보니 빅토르가 정중하게 인사하며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아나스타샤 양. 혹시 차편이 필요하시지 않으십니까?”
“필요하죠. 세상에, 언제 와 계셨던 건가요?”
“얼마 안 되었습니다.”
빅토르가 타티아나의 단순 경호 임무만 맡고 있는 게 아니라 훨씬 더 세밀한 업무까지 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그의 서비스 실력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그에게 유능하다고 하는 게 칭찬일지 아닐지 잠깐 생각해 본 아나스타샤는 그냥 그런 말은 하지 않고 감사만 표하기로 했다. 빅토르도 별말 없이 씩 웃으며 다섯 사람을 리무진으로 안내했다.
리무진에 오르자마자 아나스타샤는 운전 중인 빅토르에게 물었다.
“타티아나는요?”
“주치의에게 진료를 받고 있습니다. 유리 님이 함께 계시죠.”
“진료요? 상태는 괜찮은 건가요?”
이제 막 일어났다고 하니 당연히 의사에게 보여야겠지만, 듣기만 해도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빅토르는 룸미러로 아나스타샤의 표정을 살피더니 웃으며 말했다.
“제 생각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나스타샤는 쉽게 안도하지 않았다. 빅토르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걱정이 컸던 탓이다. 아마 의사가 괜찮다고 말했더라도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의 얼굴을 직접 보기 전까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빅토르는 아나스타샤를 이해한다는 듯 차분하게 설명했다.
“오전 늦게 가장 먼저 발견한 게 저였는데, 이미 일어나 계신 지 한참이나 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들어서자마자 인사를 하시더군요.”
“……그런가요.”
“예. 말씀도 잘 하시고…… 음.”
타티아나가 어떤 상태인지 말하던 빅토르는 갑자기 더 이상 말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침음을 흘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말을 잘 하고, 그다음은 뭔데?
아나스타샤가 생각하는 안 좋은 상황은 타티아나의 기억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였는데, 지금 빅토르를 보니 약간 무서워지기도 했다.
그런데 빅토르는 아무 우려할 것 없다는 투로 재빨리 말을 마쳤다.
“아무튼 대화를 나누는 데에 문제가 없으니…… 그간 걱정해 주신 여러분들을 모실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타티아나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며칠간은 되도록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게 두는 게 좋겠지. 하지만 베르체노프가 사람들은 여기 있는 친구들을 바로 불렀다. 신뢰에서 비롯된 호의라 볼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괜찮은 것 같다니까, 괜찮겠지. 그녀는 작게 읊조렸다.
“다행이네요…….”
“다행이죠. 일주일 만이긴 하지만…… 에르네스트 군이 말한 대로 되었군요.”
아나스타샤는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에르네스트는 혼자 타티아나의 문병을 가서는 슬슬 일어날 때가 되었다고 말했었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 듣고는 화가 불쑥 났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아무 근거도 없이 에르네스트가 그런 말을 한 것 같진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옆에 있는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앉아선 눈이 마주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아나스타샤가 짧게 물었다.
“어떻게 안 거야?”
“뭘?”
“오늘 타티아나가 일어날 거라는 걸.”
타티아나가 손가락을 움직이기라도 했었나?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어제 계속 지켜봐도 타티아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대체 뭘 보고 슬슬 일어날 거란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질문에 에르네스트는 뚱딴지같은 대답을 했다.
“그때 쳤던 소나타는 아마 타티아나가 그 자리에서 떠올린 즉흥 연주였을 거야.”
“?”
아나스타샤는 의문을 표했지만 무슨 곡이냐 묻진 않았다. 그가 말하는 곡은 쇼팽 소나타 1번이었다.
연주할 마음이 없던 타티아나가 갑자기 영혼을 불사르듯 폭발적인 연주를 보였던 그 곡.
에르네스트는 그 곡을 즉흥 연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게 즉흥이었다고?
사실 아나스타샤는 그 후에 이어진 일에 정신이 없어서 정작 타티아나가 연주한 곡엔 크게 신경을 쏟지 못했는데, 지금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연주는 여태껏 들었던 그 어떠한 쇼팽 소나타보다 더 강렬하고 아름다웠지만, 분명히 한승우가 연주했었던 소나타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타티아나가 새롭게 더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어느 정도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 정도 해석을 다시 돌이켜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는 데에 일주일이면 빠른 편이지.”
“타티아나라서 그 정도 걸렸다는 말이야?”
“아마도.”
종종 스스로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런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평소엔 잘 알 수 없던 노력이 차곡차곡 쌓여선 어느 순간 형태를 갖추고 손에 쥐어지는 순간이.
하지만 오로지 피아노와 음악밖에 느껴지지 않는 그 순간 손에 들어온 것들은 제대로 낚아채지 않으면 금방 요행이라는 이름이 되어 다시 손에서 빠져나가기도 한다.
때문에 연주자들은 다시 시간을 들여 자신이 해냈던 것들을 어떤 상황에서도 재현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소화해 내야만 한다.
거기엔 시간이 걸린다. 에르네스트는 일주일 정도면 짧은 것이라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
틀린 말은 아니다. 아나스타샤 역시 운 좋게 막 붙잡은 곡들을 빠져나가지 않게 꽉 틀어쥐는 데에 오래 걸리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은 피아노 앞에서였지, 혼수상태에 빠져 있진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라면 그렇게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았지만, 아나스타샤는 솔직히 말해 그냥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잘라 말하기도 힘들고…… 결국 나온 건 불평이었다.
“왜 여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해 줬는데?”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소리 했으면 네가 바로 납득했겠어?”
“…….”
아나스타샤는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렇게 리무진이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다섯 명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일주일 사이에 나누었던 이야기들에 비하면 분위기가 훨씬 편안해져 있었다.
저택에 도착하니 예고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예고르를 따라 타티아나의 방으로 향했다.
“…….”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심장이 거세게 뛰어서 살짝 뒤쳐졌다.
그 애가 일어난 건 정말 기쁘다. 하지만 이전까지 마음 졸였던 걸 생각하면 불쑥 화를 내 버릴 것 같기도 했다. 이 마음을 제대로 추스르지 않고 갑자기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이상한 말을 하진 않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친구들을 보내고 나중에 들어갈 순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빨리 타티아나와 마주하고 싶었다.
방까진 순식간에 도착했다.
예고르가 방문을 노크했고, 들어오라는 타티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힘없는 목소리가 아니라 약간 안심이 되었다.
아나스타샤를 비롯한 다섯 명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 듣기론 의사와 유리 아저씨가 있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없었다.
단지 타티아나만 침대에 앉아선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타티아나와 눈을 마주친 아나스타샤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아까 고민했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 타티아나의 분위기는 뭔가 예전과 달라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전체적으로 빛이 바래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스르륵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느낌이 남아 있긴 했지만, 이젠 훨씬 더 뚜렷한 무언가가 타티아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었다.
막 병석에서 일어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지금까지 그 어떤 때보다 강인해 보였다.
약간 혼동이 오기도 해서, 아나스타샤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눈만 깜빡이던 타티아나는 빙그레 웃더니 물었다.
“학교는요?”
“그게 문제야?”
설마 하던 걱정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되받아쳤다. 타티아나가 웅얼거렸다.
“그래도…….”
“일주일째 결석인 건 너잖아.”
“……그렇네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모범생 같은 소리를 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힐 거라는 건 아는지, 타티아나가 미소를 지었다.
아나스타샤는 한숨을 쉬며 침대 앞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다른 네 명도 알아서 자리를 차지했다.
“어때, 괜찮니?”
“나쁘지 않아요. 사실 전 하룻밤밖에 안 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일어나 보니 일주일이나 흘렀네요.”
“…….”
“태평하게 이야기해서 미안해요, 아나스타샤. 걱정 많이 하셨죠.”
타티아나는 농담처럼 이야기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진지하게 사과했다. 그리고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즐거운 날이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되어 버려서 저도 참 유감이지만…… 놀라셨을 여러분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네요. 미안해요, 정말로.”
“괜찮아.”
“걱정 많이 했지만, 이제 일어났으니까.”
에르네스트를 필두로 모두들 타티아나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그녀는 작게 웃었다.
“아까 들었어요. 모두들 병문안 와 주셨다고. 그런데도 계속 자는 모습만 보여 드린 것 같아 조금 부끄럽네요.”
옅게 웃고 있긴 하지만 조금 민망하다는 투였다.
모두들 한마디씩 농담을 던졌다. 심지어 리처드의 태도는 가관이었다.
“걱정 마 나는 한 번밖에 안 왔어.”
“냉철하셔라.”
“내가 좀 그렇잖아. 그런데 금방 일어날 것 같더라고.”
“아하핫.”
타티아나는 숨이 넘어가라 웃으며 좋아했지만 아나스타샤는 이해가 안 갔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본 타티아나는 곧 웃음을 그치고 잠시 침묵하더니, 조용히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제가 금방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나요?”
“당연히 나도…….”
틀에 박힌 것처럼 금방 쾌유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하려던 아나스타샤는 문득 거짓말을 하기 싫어졌다.
“불안했어.”
“…….”
“잠깐만 자겠다고 했었잖아. 조금만이라고……. 그런데 일주일이 조금만이야?”
참고 참았지만 어쩔 수 없이 약간 따지듯 물었다.
분명 잠깐 눈 붙이는 정도인 줄 알고 자게 두었는데, 일주일이나 속앓이를 시키는 법이 어디 있어?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타티아나에게 신경질을 냈지만, 막 일어난 친구에게 따지고 마는 자기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일주일은 길죠.”
타티아나는 언제나처럼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어쩐지 조금 기뻐 보이기도 했다.
“이런 말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있잖아요…….”
작게 소곤거리던 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잘 자라고 해 준 덕분에, 잘 자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뭐?”
“그러셨잖아요?”
아나스타샤는 말을 잊었다.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 타티아나에게 잘 자라고 말했던 건 아나스타샤의 머릿속에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타티아나는 그 말이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
멍하니 타티아나를 쳐다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사과했을 애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그러지 않아 줬으면 하면서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훨씬 강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찾았다.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이야?”
“아시잖아요? 제가 불면증이 약간 있다는 것. 그간 못 잔 것들을 몰아서 잤네요.”
“그걸 말이라고 하니?”
“좋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안 될까요?”
단순히 화내지 말아 달란 뜻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마음속에 남아 있던 후회와 자괴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너한테 정말 할 말이 많았는데. 이젠 잘 모르겠어.”
“말씀 안 하셔도 알아요.”
너무 잘 안다는 듯 말하는 게 기쁘고 웃겨서, 아나스타샤는 결국 웃으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