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9화
늘 조용하던 내 방에서 모처럼 말소리가 도란도란 울렸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행복해지는 목소리들이다.
대화들은 대부분 내 쾌유를 기원하는 이야기이거나 그간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재미있게 들려주는 정도였다. 내가 쓰러졌던 일에 대해선 되도록 언급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
하지만 결국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나제즈다를 도와주겠다며 잠깐 나간 사이, 내 책상 부근에서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있던 에르네스트가 불쑥 내 옆으로 오더니 말을 걸었다.
“타티아나, 지난주에 얻을 수 있었던 건 정리했어?”
혹시나 싶었는데, 에르네스트는 지난번 내가 어떤 상황에서 피아노 앞에 앉았는지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심지어 내가 그 자리에서 얻어 낸 것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얻은 것들은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가장 표면적으로는 쇼팽의 소나타 1번의 수준 높은 해석, 그리고 내면적으로는 내가 느낄 수 없었던 기억과 감정들, 예술가로서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편견과 관념들을 깨뜨리는 놀라운 경험까지. 결론적으로 난 한 곡의 해석이 아니라 내 삶의 해석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전부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난 에르네스트가 묻는 건 피아노 곡에 대한 것이라 생각하고 대답했다.
“예. 그런데 지금도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어요.”
“그래도 다음엔 피아노 앞에서 정리해.”
“그래야죠……. 걱정해 주신 건가요?”
“걱정 반 기대 반이지.”
“뭔가요, 그게?”
“말 그대로야.”
걱정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나라도 에르네스트가 혼수상태로 일주일간 누워서 피아노 선율을 헤아리고 있었다고 하면 걱정이 앞설 테니까.
하지만 기대는 무슨 말이지? 조금씩 진전을 보이는 내 음악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기대된다는 말인가?
그때 들었던 음악의 행로를 그렇게 기대해 준다면 고맙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기대해 달라 말하긴 싫었다.
난 살짝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말 하면 혼날까 봐 아무에게도 안 하고 있었는데, 저 정말 힘들었는걸요.”
“알아.”
에르네스트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무심하게 툭 내뱉는다.
“그래도 이겼잖아.”
“…….”
이겼으면 되었지 않냐는 투는 아니었다. 정말 힘들었고 노력한 결과가 결실을 맺었으니 이제 그 달콤함을 맛볼 때가 아니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난 정말 많은 것을 얻었지만 이것이 어떠한 승리의 결과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여기에 적은 없었으니까.
“이겼다고 해야 할까요……. 잘 모르겠어요.”
“진 게 아니라면 이긴 거야. 단순하게 생각하면 편할걸.”
“그런가요?”
예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에르네스트는 승패에 익숙해지라 했었고 그 자체를 숨 쉬듯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스스로 말하기도 단순하게 생각하라고 하고 있고, 얼핏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난 저 한마디에 얼마나 깊은 고찰이 필요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리처드와 이야기하던 한승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지금 하는 이야기, 내 이야기야?”
다 들리도록 떠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니 한승우가 듣고 끼어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겼느니 졌느니 하는 이야기는 내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사실 듣기에 따라 오해의 여지도 있었고.
“그게 아니…….”
“그렇게 봐도 맞지. 안 그래?”
그런데 막 오해를 풀려던 내 말을 막으며 에르네스트가 삐딱하게 말했다.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한승우의 다음으로 같은 곡을 연주했으니 비교하는 건 당연했고, 솔직히 연주를 하면서 목표로 했던 건 한승우의 연주를 뜯어고치고 깨부수는 것이었으니 당하는 한승우 입장에선 대결이라 생각해도 무방했다.
물론 모두 오해였고 난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눈앞이 빙빙 돈다.
그나저나 에르네스트는 무슨 심보야? 내가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걸 알고 있다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싸움을 붙이다니.
화를 내야 할지 미안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우물거리고 있자 결국 한승우가 웃으며 깨끗하게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음악 대 음악으로는 진 게 맞아. 난 승복하고 있어. 타티아나.”
이렇게 말해 주면 솔직히 나로선 편하지만…… 그래도 그냥 그의 배려에만 기대는 것도 속이 편치 않다. 난 조용히 말했다.
“난 네가 대결을 하려던 게 아니란 걸 알아.”
“나도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알아.”
그가 빚을 갚겠다면서 내 해석을 그대로 들고 올라간 이유를 나는 정확하게 알고, 그런 내가 왜 그 해석을 손수 깨뜨려야 했는지 한승우는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보면, 그걸 바라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한승우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졌으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새삼스럽게 이런 인사를 받으니 부끄럽다. 그래도 난 고개를 끄덕여 대답해 주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말이 그냥 인사치레처럼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승우는 열여섯 살밖에 안 되었는데도 그 재능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이번에 내가 같은 소나타를 더 잘 연주할 수 있었던 건 내가 해석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 더 높고 사변에 능한 덕분이었다.
각자 자신 있는 곡으로 대결한다면 그 승패가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약간의 감탄과 기대 등을 안고 다시 리처드 쪽으로 돌아가는 한승우를 보고 있는데…… 또 한 명, 내가 그 재능의 깊이를 측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천재가 날 불렀다.
“타티아나.”
“예?”
“나중에 나랑 내기 하나 걸고 대결하자. 괜찮아지면.”
“무슨 내기요?”
에르네스트는 답잖게 주저하더니 작게 말했다.
“내용은 묻지 말고…… 그냥…… 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난 순식간에 모든 상황을 알아차렸다. 한승우와 주고받은 말들을 그는 상당히 주의 깊게 듣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젠 익숙해져서 신경 쓰지 않고 있는 줄 알았는데, 오늘따라 귀에 들렸던 걸까?
물끄러미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피아노 대결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장난을 조금 치고 싶기도 했다.
“무슨 내용이든 난 질 생각 없어.”
“……???”
경악하는 그를 보니 미안해졌다. 충동적으로 해 본 것이었으니 앞으론 할 일 없겠지만, 그래도 후회가 든다.
지금 알게 된 것들이 많아도 난 지난 2년간 쌓아올린 것들 역시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기준이 있는데 아무거나 다 희석시켜 버리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될 게 뻔했다.
러시아어에서의 경어가 거리감을 의미한다는 건 잘 알지만, 이 거리감은 나에게서 친구들을 지켜 주는 틀이기도 했다.
괜히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에르네스트는 방금 들었던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뭐라고?”
“질 생각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니 이제 저와 대결을 하고 싶으시다면 각오를 단단히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어?”
환청이라도 들었다고 생각하는지 그가 머리를 좌우로 까딱였다. 그 모습이 재미있긴 했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쟁반에 음료수들을 들고 왔다. 나제즈다 대신 받아 온 것 같다.
“다들 이것만 마시고 가자. 타티아나도 쉬어야지. 안정을 취해야 한대.”
내가 눈을 떴다는 소식에 다 같이 찾아오긴 했지만 오래 있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친구들을 붙잡고 싶긴 했지만 일주일 동안 누워 있었던 환자가 고집까지 부리는 건 양심상 할 수 없었다. 난 아나스타샤가 주는 주스를 받아 조금씩 홀짝였다.
그런데 정말 정나미 없게도 리처드는 주스를 원샷해 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나가 있을게. 푹 쉬어, 타티아나. 학교에서 보자.”
“…….”
아나스타샤가 눈을 흘길 정도였지만, 이 또한 그의 배려겠지. 난 어쩔 수 없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예. 리처드. 학교에서.”
“나도 갈게.”
한승우도 일어섰고, 곧이어 에르네스트와 발렌티나도 잔을 비우고 손을 흔들었다.
“학교에서 봐.”
“금방 올 거지? 기다릴게!”
난 그 모두를 배웅했다. 이윽고 아나스타샤만이 방에 남았다.
그녀는 날 보며 편안한 미소를 짓더니 이제 할 말은 없다는 듯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나도…….”
“아나스타샤, 잠시만요.”
“응?”
“드릴 말이 있어요.”
난 나도 모르게 그녀를 붙잡았다.
“뭔데?”
“…….”
1시간쯤 전,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던 나는 친구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했지만 금방 생각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지난 2년간의 추억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할 일이 없을 터였다.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친구들에겐 내 과거의 비어 있던 부분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경우엔 달랐다. 난 그녀에게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의 기억이 대부분 없다는 사실을 말한 적 있었고, 그렇다면 도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해 주어야 했다.
난데없이 그런 말을 해도 될까?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무슨 말을 해도 괜찮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용기를 얻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작년 자선연주회 마치고 기억하시나요? 제가 기억이 없다고 말씀드렸던 것.”
“어?”
말을 하자마자 아나스타샤가 화들짝 놀랐다. 난 그녀가 갑자기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다.
아나스타샤는 내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잠깐만, 설마…… 타티아나. 너 정말로 기억이 없어 진거니……? 나에 대한 건 따로 들었…… 아니, 그런 것 같진 않은데.”
“무슨 말씀이세요?”
차근차근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약간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 되겠다. 난 단도직입적으로 하려던 말을 했다.
“전 떠올리지 못하던 기억들을 이제 다시 기억한다는 말을 아나스타샤에겐 하고 싶었을 뿐인데요.”
“그게 무슨 소…… 기억이 돌아온 거야?”
“예.”
“아.”
아나스타샤는 내 사정을 알고 있으니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빨랐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고도 기뻐하기보단 우려가 남아 있는 눈빛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그녀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있잖아…… 타티아나.”
“예, 아나스타샤.”
“그 기억이라는 거…… 돌아와서 무언가 달라진 거야?”
아나스타샤는 정말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기억을 잃어 본 적이 없을 테니 내가 어떤 느낌일지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여러 가지 추론을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맞기도 하다. 난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느끼니까. 하지만 지금 아나스타샤가 묻는 것이 친구들과의 관계성이라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어요.”
“아무것도?”
“혹시 제가 달라졌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녀가 살짝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느꼈어.”
어떤 부분에서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난 걱정 말란 뜻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건 옛 습관이 옮겨온 것이라 생각해요. 결정적으로 절 바꿔 놓진 못할 거예요.”
“그런 거야……? 그런데 난 네 상황에 처해진 게 아니니 이해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잘 모르겠어. 타티아나.”
“아하하,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조심스레 말하는 아나스타샤에게 나는 낙천적으로 대답했다. 이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다.
“그저…… 아나스타샤에겐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말씀드린 거예요. 하지만 변한 건 없어요. 그러니 똑같이 대해 주세요.”
“똑같이……. 알겠어.”
아나스타샤는 내 말을 다시 따라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잊어버린 건 없는 거지?”
“저번 주 점심 메뉴를 암송할 수는 없겠지만, 아나스타샤에 대한 건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다행이야.”
그제야 그녀는 약간 마음이 놓인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석연찮은 그림자가 남아 있긴 하지만 앞으로도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생각하자는 눈빛이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부터 적응하면서 생각해 나가면 점점 단단하게 확고해지는 부분들이 생기겠지.
아나스타샤는 내 손을 꼭 잡아 주고는,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 계속 있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저는 괜찮은걸요?”
“안 돼. 유리 아저씨나 루슬란과 함께 시간을 보내. 기억이 돌아온 거라면 더더욱 그래야 하고.”
“…….”
종종 그녀와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정말 생각이 없다는 걸 자각하곤 한다. 그녀가 현명하게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면 난 얼마나 멋대로일까.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난 이만 가 볼게. 개인적인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잘 가요. 저야말로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응. 다음에 봐.”
그녀는 손을 흔들며 살며시 문을 닫았다. 그것으로 완전히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섯 명이나 되는 친구들이 갑자기 사라지자 허전했다. 갑자기 멍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머리를 홱 저어 모조리 떨쳐 냈다.
아나스타샤의 말처럼 오늘은 적어도 저녁 식사 자리엔 참석해서 최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눠야 했다. 그리고 학교에도 빨리 복귀해야 했다.
그 모든 것을 하려면 일단 몸 상태를 정상대로 만들어야 했다.
“……윽.”
난 예전에 배웠던 재활운동 동작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스트레칭 동작에 가까웠는데도 힘들어서 잇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래도 의욕은 정말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