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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460화 (460/1,277)

##  460화

검은 새는 사라졌다. 가 버렸다.

나는 다신 그 새를 만나지 못할 거란 생각에 슬퍼졌지만, 주저앉아 울고 있지 않았다.

가만히 고개를 드니 주위가 천천히 흘러간다. 난 바람을 타고 그저 하염없이 하늘을 활공하고 있었다.

새가 된다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무엇이든 볼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그런데 태양은 조금 눈부시다.

“…….”

눈앞이 밝아지며 꿈의 세계가 옅어져 간다. 난 인상을 쓰며 웅크렸다. 꿈에서 한 것이라곤 그저 날아다닌 것뿐이지만, 조금만 더 그렇게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뒤척이다가 비몽사몽으로 단잠에 더 빠져들려는 찰나, 갑자기 확 끼어든 이성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일어나야지.

난 무언가에 이끌리듯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흘러내렸다. 난 그 뒤로도 한참이나 멍하니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흐아…….”

햇살이 시끄러웠다. 하나하나의 빛 덩어리들이 쏟아지며 재잘거렸다. 난 기지개를 켜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아직도 약간 현실이 아닌 것 같다.

나는 늘 한밤중에 깨어나곤 했다. 어둠과 고요 속에서 일어나면 바로 느껴지는 싸늘한 추위. 그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같았고 내게 늘 같은 긴장감을 안겨 주었다.

그렇게 2년이 넘도록 살아왔는데, 이렇게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빛 속에서 일어나니 묘한 기분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아이가 누려야 할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간 내 관념을 옥죄고 있던 무거운 책임과 죄책감들은 여전히 관성으로 남아 종종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이젠 그 누구도 그런 자책이나 고민을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안다. 잘 알면서도 계속해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 건 무의미한 자기연민의 연속일 뿐이다.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모든 일에 늘 갈등했던 건 잘 모르는 삶의 방향을 잡는 데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신중할 수 있길 원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아는 일들에 대해선 확신을 가져도 괜찮을 것 같다.

적어도, 햇살의 모닝콜을 받으면서도 고뇌에 빠지는 건 바보 같은 행동임이 분명했다.

“…….”

생각을 정리한 나는 결국 헛웃음을 흘렸다.

14년어치의 기억과 감정들은 내가 몰랐던 것들에 대한 단순한 정보들이기도 했지만 그 전체가 하나로 뭉쳐 성격을 이루고 내게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정서적인 안정을 유지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고민해 왔던 게 모두 헛수고는 아니었겠구나, 망령일지언정 악령은 아니었겠구나. 그러한 확신들이 내면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더더욱 잘해 나가야겠다는 각오가 자신 있게 삶의 해석을 내어 주었다.

사실, 아직도 조금 궁금하다.

왜 그녀는 내게 모든 걸 맡기고 물러나 주었던 걸까. 이 어두운 기억들과 강렬한 감정들은 타인에게 보여 주는 것조차 부끄러울지도 모르는데.

난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알고 싶어 했지만, 내게 기억을 넘겨주고 사라져 버리길 바라진 않았다. 쇼팽 소나타를 연주하면서도 과거의 박제를 완전히 뛰어넘고 나면 그다음엔 그저 내게 허락된 경계 내에서 조용히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젠 정말로 경계가 없어져 버렸다.

어제 하루 종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해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기억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난 그저 우리가 서로를 타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답을 알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후.”

양손을 깍지를 끼고 앞으로 쭉 내밀었다. 스트레칭하는 양팔이 바들바들 떨린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팔을 축 늘어뜨렸다.

달라질 건 하나도 없었다. 아나스타샤에게 말한 것처럼 난 아무것도 변한 것 없이 앞으로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 테고, 그게 피아노 앞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하는 단순명료한 사람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진 분명했다. 움직여야지.

난 다시 꼼꼼하게 재활훈련을 시작했다. 팔을 풀고, 목을 당기고, 발을 뻗는다. 언제라도 정확하게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확실하게 준비시켰다.

그다음, 간단하게 씻고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먹는 것 역시 해야 할 일이다. 실제로 배고프기도 하고.

식당은 조용했다. 주방에서 드미트리가 무언가 손질하는 소리만 들렸다.

내가 인기척을 내자 드미트리가 고개를 들더니 인사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아가씨.”

“드미트리, 좋은 아침이에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는 칼을 내려놓고 약간 걱정된다는 듯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떠십니까. 몸은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죠. 지금도 오믈렛이 먹고 싶어서 만들어 먹으려고…….”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아직 안정을 취하셔야 할 때인데, 주방에서 칼을 잡으시는 건 절대 안 됩니다.”

오믈렛 만드는 데에 칼을 쓰던가? 아, 속 재료를 만드는 데에 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드미트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주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다. 그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아무튼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예…….”

난 별말 없이 테이블 앞에 가서 앉았다. 멀거니 주방 쪽을 바라보니 드미트리가 냉장고를 열고 이것저것 재료를 꺼내고 있었다.

그의 수제자로서 가서 무언가 배우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내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그가 걱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있기로 했다.

몇 분 정도 기다리자 드미트리가 쟁반을 가지고 왔다. 몽실몽실하게 말린 오믈렛이었다.

가볍게 한 조각 떠서 입에 넣었다. 감동적인 맛이었다. 복잡하지 않은 계란 요리인데도 무슨 마술을 부린 건지 모르겠다.

맨날 먹어도 맛있을 것 같은데, 지난 일주일은 물론이고 어제도 하루 종일 흰 카샤만 먹으면서 무감각해져 있던 미각은 이 오믈렛의 맛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미각으로 느껴지는 감동은 시각적인 예술품이나 청각으로 듣는 예술을 접했을 때의 희열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난 이 기분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어 표현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제가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기뻐해 주세요. 드미트리가 제가 기뻐하길 바랐듯.”

“…….”

드미트리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굉장히 기뻐한다는 것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난 다시 오믈렛을 입에 넣으려다가, 그에게 물었다.

“드미트리, 아버지는요?”

“일찍 식사를 하시고 지금은 업무를 보고 계실 겁니다.”

“저만 늦었네요.”

“빠르신 것 아닙니까? 원랜 오늘 나제즈다가 9시 정도에 아가씨를 깨우고 식사를 가져다 드릴 예정이었습니다.”

드미트리는 어제까지만 해도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내가 지금 혼자서 걸어 다닌다는 것 자체가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난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대수롭잖다는 투로 말했다.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잖아요? 이젠 일어나야죠.”

“……다행이군요.”

“주방에 들어가는 건 아직 안 된다 하셨지만…… 금방 나아질 거예요. 그러니까…….”

난 손가락을 들어 접시를 가리켰다.

“그땐 이 오믈렛을 가르쳐 주세요.”

“…….”

드미트리가 움찔했다.

바로 어제, 내가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는 소식은 저택 모두가 알게 되었다. 드미트리 역시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때문에 그는 오늘 나를 평범하게 대하려 하면서도 약간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건 겨우 1년 남짓. 기억 속 어디에도 요리에 흥미를 가지거나 했던 기억은 없었다. 그러니 예전 내 모습을 아는 드미트리는 내가 언제라도 요리를 그만둘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절대 그럴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맛있는 예술을 배울 기회를 내가 놓칠 것 같아?

내가 빙그레 웃고만 있자 드미트리의 얼굴에 살짝 깃들었던 긴장감도 사라졌다. 달라질 건 없다는 걸 알아준 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뿐만이겠습니까?”

“고마워요.”

분위기가 한결 편해지자 드미트리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무거운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그는 프랑스식 계란말이라 할 수 있는 이 오믈렛에 무엇이 들어갔는지, 또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식의 계란말이는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지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다.

모두 앞으로의 일들. 내가 모르는 일들이었다. 난 그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한참 동안 즐겁게 대화하며 식사를 마치고, 난 그가 가져와 준 차를 마시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벨카에게 줄 간식을 부탁했다. 원래 저택에서 기르는 동물들의 관리는 그의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난 드미트리가 준비해 준 육포를 가지고 정원으로 나갔다. 저 멀리 어슬렁거리고 있는 벨카가 보였다.

“벨카!”

“!?”

거리가 꽤 있었는데도 벨카는 내 목소리에 반응하여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깜짝 놀랐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벨카는 그야말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대로 뛰어드나 싶었는데, 벨카는 내 앞에서 멈춰 서더니 꼬리를 흔들며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일주일이나 못 봤더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는 것 같다.

“왕.”

“아하하핫, 벨카.”

난 그 앞에 앉아 양팔로 벨카를 끌어안았다. 이 따뜻함 앞에서 3월의 추위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포근한 털에 얼굴을 묻고 한참 동안 등을 쓸어 주다가, 받아 온 간식도 잘라 주었다. 벨카는 내가 주는 대로 잘 받아먹기도 했지만 간식 같은 건 사실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내게 응석을 부리는 데에만 집중했다. 난 그간 못 놀아 주었던 만큼 벨카의 이름을 불러 주고, 잔뜩 쓰다듬어 주었다.

“…….”

어릴 적의 벨카도 이젠 기억난다. 이 집에 오고 얼마 안 되어서였다. 난 한 살도 채 안 된 벨카와 만났고, 굉장히 귀여워해 주곤 했다.

그 뒤에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지면서 자연스레 벨카와 노는 일도 줄어들었지만, 그때도 벨카는 늘 날 위로해 주려 했었다.

그땐 몰랐지만 이젠 알겠다. 난 조금 더 벨카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벨카는 답답하지도 않은지 가만히 있어 주었다.

“아마 며칠간은 이렇게 쉬어야겠죠.”

벨카에게 의견을 구하듯 중얼거렸다. 당장 내일모레면 월요일이지만, 아마 바로 학교에 간다고 하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리고 멀쩡히 산책을 다닐 정도로 괜찮아지긴 했어도 여전히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건 분명했다. 당분간은 학교를 쉬면서 몸을 회복시키는 데에만 전념해야 했다.

그리고 피아노도 며칠간은 쉴 생각이다.

“…….”

일주일 전, 나는 처음 느끼는 영역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누구의 흉내도 내지 않는 것으로 발을 들어올리고, 내가 내 것이라 생각했던 음악 역시도 박제의 흉내일 뿐이란 것을 깨닫고는 발을 내딛어 스스로 그 정체성을 깨뜨렸다.

그렇게 도달한 영역은 자유로우면서도 조금 무섭기도 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언제라도 떨어질 수도 있다는 느낌에 종종 두려워지는 것처럼, 내게 주어진 자유가 가끔은 섬뜩하기도 했다.

때문에 아무렇게나 굴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닿았던 게 요행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려면 적어도 지금 이 몸 상태로는 안 된다. 조금 더 재활 훈련을 열심히 하고 건강을 되찾아서 천천히 해 볼 생각이다.

한 걸음씩 차근차근. 피아노를 준비하고 그사이에 기억에도 적응해야지.

예전 같았으면 조급하게 다시 발을 뻗다가 삐끗해서 길을 잃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또 자신감을 되찾은 나는 이전까진 없던 시각으로 상황을 마주하고 있었다.

분명 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조금 걸을까요?”

“왕.”

여전히 추운 날씨이긴 하지만 잠깐 산책을 하는 것 정도는 괜찮았다. 벨카와 산책하는 건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고.

그렇게 산책을 마친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선 따뜻한 차를 끓이고 책을 펼쳤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초원. 저번에 읽으려고 가져다 놓은 책인데 일주일간 자느라 몇 페이지밖에 못 읽었다. 오늘 하루 종일 읽으면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막 책장을 펼치고 활자에 집중하려던 때였다.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타티아나. 일어났어?”

루슬란 오빠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일어난 나는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오빠는 살짝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한참 전에 일어났구나?”

“예.”

“괜찮다면 이야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 어때?”

이야기? 무슨 이야기인진 모르겠지만 어쩐지 조금 심각해 보이기도 했다.

난 잠시 오빠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깨어난 나와 이야기한 뒤에, 따로 하룻밤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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