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61화 (461/1,277)

##  461화

문을 닫고 들어온 루슬란 오빠의 표정을 보니 그냥 가볍게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진 않다.

난 들고 있던 책을 덮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오빠가 책을 보더니 물었다.

“무슨 책 읽어?”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초원이에요.”

“초원. 어려운 책을 읽네. 내가 기억하기로 그 책 내용이…….”

“잠시만요, 왜 자연스럽게 내용을 말씀하시나요?”

“아, 미안…….”

오빠가 민망한 듯 사과했다. 스포일러를 하려던 건 아니고 그냥 책으로 대화를 이어 나가려 했다는 걸 나도 알기에 웃고 말았다.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오긴 했는데 막상 바로 꺼내자니 조금 어려워하는 것 같아 보인다. 난 조급하게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루슬란 오빠는 일단 책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이어 나갔다.

“안톤 파블로비치를 읽는다고 하니 조금 반가워서. 우리 학교 출신이기도 하거든.”

난 체호프에 대해 잘 알진 못했다. 책도 이 책이 처음이었다.

그래도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보단 뭐라도 아는 걸 말하는 게 대화에 좋을 것 같아 생각나는 대로 맞장구를 쳤다.

“그런가요?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처럼 모스크바 대학교 철학과 학생이었겠네요?”

“아니, 의학부였어.”

“……의학부요?”

약간 뜬금없긴 했다. 난 체호프를 그저 소설가이자 극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날 놀라게 하는 데에 성공한 루슬란 오빠는 희미하게 웃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래. 정식으로 면허가 있는 의사는 아니었지만 의학 학사는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을 치료하기도 했었어. 그러면서도 수백편이 넘는 작품들을 쓰기도 했고.”

“…….”

“사람은 스스로 믿는 바에 따른다고 말하며, 그 자신부터가 스스로 믿는 삶을 찾아가던 사람이었지.”

체호프가 믿는 스스로는 아마 의사이면서 동시에 작가였을까.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두 가지를 동시에 원한 체호프는, 그렇게 바라던 바를 해냈다.

물론 스스로 믿는 대로 될 수 있는 건 특별히 선택받은 몇몇 사람에 한정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상당히 고무됨을 느꼈다.

루슬란 오빠는 미소를 머금은 채 내 방을 휙 둘러보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네 방은 달라짐이 없네.”

비단 2년 전뿐만이 아니다. 7년 전, 내가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 방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 무엇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늘 그랬죠.”

“그래…… 항상 이랬었어. 그때 난 그저 네 취향이 이럴 뿐이라 생각했었지만…… 사실 넌 언제 떠나도 상관없도록 했을 뿐이었어. 이젠 알 것 같아.”

발밑을 믿을 수 없는 두려움. 아무리 따뜻한 공간에 있어도 창문을 여는 순간 찬바람에 모든 것이 장악당할 것이란 불안감.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난 늘 그런 것들을 느끼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이제야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었는지 안 오빠는 미안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 앞에서 피하지 않고 제대로 다시 한 번 묻는다.

“타티아나.”

“예.”

“떠날 거야?”

약간 엉뚱하게 들리는 질문이었다. 내가 여길 떠나면 어디로 가겠어?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몇 년 전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렸고, 그간 날 장악해 왔던 모든 불안감들을 느꼈다.

실제로 난 떠났었다.

그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

오빠가 갑자기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 알겠다. 그리고 이 질문이 사실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저 내 안위만을 걱정하시는 것으로 직접적인 물음을 하지 않으셨지만, 오빠는 이렇게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 말끝이 살짝 떨렸다는 건 오빠 역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난 작은 미소를 지었다.

“아뇨, 영원히 떠나지 않을 거라 말씀드릴 순 없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

앞으로 몇 년이 더 흐르고, 또 수십 년이 흘러서도 내가 아무 곳에도 가지 않고 이 저택에 있을 거라 장담할 순 없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모스크바에서 취업을 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는 미래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피아노 연주자로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된다면 세계를 돌게 될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못 돌아오는 일도 생기겠지.

하지만 적어도 학교를 다니고 졸업할 때까진 여기에서 떠날 일은 없다. 학교가 날 얼마나 강하게 속박하고 있는지 오빠는 전혀 모르는 것 같다.

그런데 떠날 일이 없다고 말해도 오빠의 눈에선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말을 조금 두루뭉술하게 한 모양이다.

체호프의 말을 살짝 빌리기로 했다.

“걱정 마세요. 지금 제가 여기에 있는 건, 제가 스스로 믿는 삶이에요.”

그 말은 적절하게 루슬란 오빠의 경계를 뚫고 들어갔다. 오빠는 허를 찔렸다는 듯 헛숨을 툭 내뱉더니, 결국 웃어 버렸다.

“넌 안톤 파블로비치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을 거야. 분명히.”

“노력 중이에요.”

“그래…… 하하하.”

기억을 되찾은 내가 다시 훌쩍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던 오빠는 이제 그럴 일 없다는 걸 믿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믿음에 근거해서, 날 찾아온 진짜 용건을 꺼내 들었다.

“타티아나. 내일 잠깐 외출하지 않을래.”

“외출이요?”

“그래. 시간은 조금 걸릴 거야. 차로 4시간 정도. 괜찮겠어?”

“…….”

오빠와 이곳저곳 외출했던 기억은 많지만, 갑자기 4시간이나 걸리는 곳까지 가자는 말은 날 약간 당황시켰다.

하지만 당황도 잠시, 난 단순히 교외로 바람을 쐬러 나가자는 용건으로 오빠가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

오래된 기억에 기반한 추론은 빨랐고 결과는 단순했다.

난 천천히 중얼거렸다.

“아주 어릴 적, 기억이 나요.”

“그래.”

“멀리, 멀리에 여름 별장이 있었죠.”

“맞아. 지금은 겨울이지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그녀의 기억들은 모든 게 명확하게 시간 순서에 맞춰서 착착 정리되어 있진 않다. 수년에 걸쳐 책을 읽다 보면 앞 내용이 잘 기억이 안 나는 것처럼, 몇 년만 지나도 기억이 잘 안 나는 일들이 있는 게 당연했다. 기억 역시 두꺼운 책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정확한 페이지 숫자를 불러 준다면 당연히 그 지점의 페이지를 바로 펼 수 있었다.

난 4시간쯤 걸리는 곳에 있는 별장을 떠올렸다. 숲속에 있는 별장이었다. 그녀가 베르체노바라는 성을 가지기 전에 한 번 가 본 적 있는 곳이다.

그렇게 기억을 짚어 나가던 나는 문득 오빠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면 그냥 잊고 지나갔을 거예요. 왜 말씀해 주셨나요?”

너무 어릴 적 일이나 잘 기억나지도 않는 곳이다. 가 볼 생각을 하긴커녕 말해 주기 전까진 아예 잊고 있었다.

그런데 코시기나의 저택이 불타 없어진 것으로 내가 한 짓을 생각하면, 별장의 이야기를 구태여 할 이유는 없었을 텐데……

오빠는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옛날 물건들을 돌려주고 싶어. 아버지는 잊고 있는 것 같지만, 난 그게 아버지가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방식대로 날 지켜 주려 하셨지만, 이건 오빠의 방식이었다. 분명히 방향은 다르지만, 날 진지하게 바라봐 주고 있었다.

난 간신히 한 마디 낼 수 있었다.

“……올곧으시네요.”

“널 믿으니까, 할 수 있는 거야.”

이전엔 굉장히 불안정해서 문제를 일으켰고,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없으니 괜한 문젯거리는 만들지 않는 게 모두에게 편한 일이겠지. 하지만 오빠는 내가 다신 그러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물끄러미 오빠를 바라보다가, 저 굳어 있는 얼굴을 풀어 주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하하하, 어차피 너무 멀잖아요? 4시간이나 떨어진 별장인데, 제가 갑자기 집을 나가 거기서 살겠다고 하기라도 할까 봐요?”

“아니, 뭐…….”

“하루 8시간 통학하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절대 그럴 일은 없겠어요.”

딱 잘라 말하자 루슬란 오빠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된다는 투로 말한 게 먹혀든 모양이다.

난 될 수 있는 한 가볍게,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래도 한 번쯤 가 보고 싶긴 하네요. 제 물건들도 거기에 있는 것 같고.”

“……그렇구나.”

“내일 데려다주시는 건가요?”

너무 어려울 것 없다. 난 그렇게 생각할 테니 오빠도 그렇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냥 가볍게 놀러갔다 오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

그 뜻은 조금이나마 전해진 것 같다. 오빠도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하려고.”

“알겠어요.”

그렇게 내일 외출 약속을 잡고, 그제야 오빠는 처음 물었어야 할 질문들을 묻기 시작했다.

“타티아나, 그런데 힘들지 않겠어? 그보다 몸 상태는 어때? 어젠 많이 힘겨워 보였는데.”

“그걸 이제 물으시나요?”

“아니, 아까 물어보고 아니면 며칠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말하려 했는데…… 말을 하다 보니까.”

지금까지 한 마디 한 마디를 오빠가 굉장히 어렵게 하고 있었다는 건 느끼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정말 힘들어했던 것 같다.

난 조금 더 장난이나 칠까 하다가, 괜히 힘든 사람 괴롭히진 않기로 했다.

외출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웃으며 말했더니, 오빠는 몇 번이나 확인을 한 뒤에야 약간 안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

다시 홀로 남은 나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책상을 바라보았다.

읽다 만 책. 찻잔, 그리고 교과서와 공책 몇 권. 필기구가 정리되어 있는 작은 함. 향초 몇 개와 이어폰.

지금 내 책상 위에 올라가 있는 건 그 정도였다. 난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옛날 책상엔 분명 몇몇 물건들이 더 있었다.

스탠드와 작은 가습기, 캐릭터 인형 몇 개와 꽃병, 액자로 장식한 그림. 카세트 플레이어도 되는 라디오.

하지만 사실 그래 봐야 몇 개 안 되어서 이 넓은 책상을 채우기엔 부족했고 황량한 건 그대로이긴 했다. 아마 그 물건들을 그대로 가지고 온다고 해도 크게 방 분위기가 바뀔 것 같진 않다.

방을 둘러보았다. 사실상 난 거의 모든 생활을 별관의 연습실에서 하고 있어서 이 방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저 잠을 자거나 숙제를 하는 데에 필요한 방일 뿐이었다.

하지만 루슬란 오빠가 한 말을 생각해 보니, 내 방에도 신경을 조금 써야 할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도 올 때마다 몇 번이나 춥다느니 삭막하다느니 아우성이었고……

“모르겠어.”

하지만 인테리어에 소질이 없는 건 누군들 상관없이 마찬가지인 것 같다. 방을 아무리 노려보고 있어도 어떻게 꾸며야 할지 감이 안 온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 방에 손을 대지 않은 건 루슬란 오빠가 말했던 것처럼 언제나 불안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단순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난 종종 생각했다. 내가 아닌 그녀라면 나보다 훨씬 더 멋지게 모든 걸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방도 황량하지 않게 꾸미고, 옷도 고민하는 일 없이 척척 갖춰 입고.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알아서 당당하게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그녀는 파란색을 좋아했을 뿐, 평범한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 고민도 하고 후회도 했다. 그간 고생했던 기억들만 새록새록 떠올랐다.

당연한 일인데 깨닫는 건 왜 항상 이렇게 늦는 걸까.

“…….”

혼자서 키득거리다가 그냥 침대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건 착각이었다. 난 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미적 감각에 눈을 떠서 멋지게 방을 꾸밀 수 있을 리 없었고, 아나스타샤가 깜짝 놀랄 정도의 패션 센스를 갖출 수도 없었다.

그냥 난 이제 빨간색과 함께 파란색도 좋아한다. 그리고 두 색이 섞인 보라색도 좋아할 뿐이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