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2화
일요일은 평소보다 조금 더 늦잠을 자도 용서가 되는 날이다. 하지만 난 아침 햇살이 눈에 닿자마자 잠에서 깨어 몸을 일으켰다.
눈도 제대로 뜨지 않고 기지개를 쭉 펴고는 습관처럼 팔과 목을 스트레칭했다. 뻐근함이 찾아왔다가 떠나가면서 잠기운을 함께 가지고 갔다. 난 그렇게 몸을 풀면서 눈을 떴다.
“음…….”
확실히 어제보다 더 좋아진 것 같다. 생각보다 굉장히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그간 날 몇 번이나 괴롭힌 적 있는 감각의 괴리나 통증 등은 느껴지지 않았다. 난 양손을 앞으로 펴고는 천천히 쥐어 보기도 하고, 까딱거려 보기도 하면서 상태를 확인했다.
이렇게 잘 회복한다면 내일은 피아노 앞으로 돌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 몸 상태가 안 좋은 상태로 건반을 만지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회복에만 전념하고 있을 뿐이지, 사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피아노 앞에 앉고 싶었다. 빨리 연습해서 지난 일주일 사이 저하된 테크닉을 원상태로 돌려놓고 싶었다.
“…….”
난 다시 한 번 꾹 참으며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조급하지 않게 해 나가기로 마음먹었으니, 정한 대로 할 뿐이다.
어차피 오늘은 루슬란 오빠와 한 약속이 있어서 종일 바쁠 예정이기도 했다. 난 천천히 오늘 하루를 준비했다.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치고 식당에 나가니 신문을 읽고 계시는 아버지와 오빠가 이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좋은 아침이구나.”
“잘 잤어?”
아침 인사를 주고받고, 내가 막 자리에 앉자마자 거의 동시에 드미트리가 식사를 내오기 시작했다.
아침 식단은 담백하고 부담 없는 스프와 블리니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요리이지만 드미트리가 만들어서 그런지 모양부터 무척이나 맛있게 보인다.
“들자꾸나.”
난 포크를 들고 블리니를 쿡 찍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감동적인 맛이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물어보셨다.
“오늘은 어디 나갈 예정이느냐? 타티아나.”
어떻게 알아보셨지? 속으로 깜짝 놀랐는데, 내가 지금 입고 있는 터틀넥에 스웨터를 떠올려 보니 금방이라도 외출할 사람으로 보는 게 당연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어쩌면 집에서 가만히 쉬지 않고 어딜 나가냐고 한마디 하실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난 조심스레 허락을 구했다.
“아…… 예. 그래도 될까요?”
“네가 괜찮다면야. 건강은?”
“좋아요.”
“……그렇다면 좋을 대로 하거라.”
아버지는 생각보다 쿨하게 허락해 주셨다. 약간 허무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그다음 질문의 방향이 휙 바뀌었다.
“루슬란 너는?”
스푼을 내려놓고 타이밍을 재고 있던 루슬란 오빠는 이때다 싶었는지 곧바로 대답했다.
“저도 나가려고요.”
“내가 맡긴 숙제는 다 끝냈느냐?”
“예. 주말간 하라는 업무였죠. 어제 하루 종일 완성해서 메일로 보내 드렸습니다.”
태도만 봐도 신뢰가 물씬 느껴졌다. 이렇게 가끔 보면 정말 유능해 보인다.
하지만 그 가끔이 오늘은 아닌 것 같다. 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런데 왜 그 메일의 답장은 안 봤지?”
“답장이요……?”
아버지가 주말 동안 하라고 내 준 업무를 하루 만에 해치우고 의기양양해 있던 오빠는 일이 끝나지 않은 것 같다는 직감을 느꼈는지 안색이 어두워졌다. 당당하던 태도가 순식간에 흐물흐물해졌다.
아버지는 봐주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 네가 보낸 자료 중 잘못되거나 문제가 있는 부분들을 내가 다시 검토해서 되돌려 보냈다. 일을 시작했으면 제대로 끝을 내라.”
“아니…… 아버지, 제가 어제 12시 넘어서 메일 보냈는데요……?”
“1시간이면 충분하더군.”
“…….”
루슬란 오빠는 할 말을 잃은 것 같다. 온종일 한 내용을 1시간 만에 확인하고 다시 하라고 되돌려 보냈다니, 아예 식사를 할 생각도 싹 사라졌는지 포크를 쥘 생각도 않는다.
이쯤에서 살짝 끼어들 타이밍임을 느꼈다. 아버지의 숙제는 물론 중요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난 그 틈바구니로 살짝 손을 집어넣었다.
“아버지, 오늘 저 오빠와 외출할 계획이었는데…… 취소해야 할까요?”
“뭐?”
아버지가 처음으로 놀란 기색을 보였다. 내가 이번에도 영락없이 아나스타샤와 놀러가는 줄 아셨던 것 같다.
정말이냐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난 다시 한 번 작게 말했다.
“업무가 바쁘다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서요…….”
“…….”
같이 움직이기로 했던 루슬란 오빠가 일 때문에 발이 묶인다면 나도 오늘 아무 데도 못 간다.
천천히 나와 루슬란 오빠를 돌아보는 아버지의 얼굴 표정은 쭉 무표정으로 변함이 없었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고 계신다는 게 느껴졌다.
결국, 긴 한숨과 함께 허락이 떨어졌다.
“후…… 됐다. 루슬란. 네 숙제는 그쯤에서 마무리하겠다. 내가 보낸 피드백은 나중에 확인해라.”
오빠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진담이세요?”
“싫다는 게냐?”
“아니죠!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잠시 오빠를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감사해야 할 건 내 쪽이지.”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그게 나와 오빠 두 사람 모두에게 향하는 말이라는 건 분명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난 루슬란 오빠에게 살짝 말했다.
“아버지에게도 제대로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오늘 어디에 가겠다곤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지 않았다. 아버지 역시 우리에게 묻진 않았지만 아마 그냥 모스크바 시내에서 놀 거라 생각하실 게 분명했다.
내 과거 물건들을 되찾으러 간다곤 상상도 하지 못하고 계실 텐데, 사실 아무 문제없는 일이라 해도 약간 죄책감이 느껴졌다.
루슬란 오빠 역시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닌지 나지막이 말했다.
“갔다 와서 말씀드리려고.”
“왜요?”
“생각보다 걱정이 많으신 분이니까.”
아버지는 내가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기억을 잃자 과거 물건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버리시기도 했다. 그만큼 내가 과거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것을 막고 싶어 하시는 분이셨다.
어떻게 보면 효율적인 방법을 추구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나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하신 것처럼 느껴졌다.
오빠는 잠시 무언가 고민하더니 결국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말했다.
“아무튼, 네가 아까 도와줘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어.”
“제가 안 끼어들었으면요?”
“오늘 하루 종일 서류 뭉치랑 컴퓨터 붙잡고 있어야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아니, 왜 주말만 되면 산더미처럼 할 일을 주는 거야? 하느님도 일요일은 쉬었는데.”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니 불만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정말로 듣고 싶은 말이 따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난 짧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도 오빠에게 기대가 많은 거겠죠.”
“…….”
투덜거림이 뚝 멎었다. 루슬란 오빠는 날 내려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준비해서 나와. 기다릴게.”
“예.”
방으로 가서 준비할 건 많지 않았다. 이미 따뜻하게 입고 있으니 외투만 하나 더 입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갑과 스마트폰, 로션 등이 든 가방만 가지고 가면 된다.
별장에 가는 것이긴 하지만 놀 목적으로 가는 건 아니니까 그 외에 챙길 건 사실 없었다. 하지만 난 혹시나 싶어 가방에 플레잉 카드 뭉치를 넣었다. 친구들이 왔을 때 가지고 놀던 것이다.
밖으로 나오니 오빠와 빅토르, 소로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오빠가 말해 놓은 것 같다.
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주말인데 미안해요.”
“별말씀을. 저희에게 주말 같은 건 없습니다.”
“…….”
불과 몇 분 전에 하느님도 주말엔 쉬었다고 했었던 루슬란 오빠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살짝 찔리는 부분이 있는 듯하다. 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타시죠, 모시겠습니다.”
빅토르의 안내에 따라 검은 벤츠에 올랐다. 소로킨이 운전대를 잡았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난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오빠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
“응.”
“가 본 적 있나요?”
“어딜?”
“지금 가려는 곳이요.”
별생각 없이 물었던 건데, 루슬란 오빠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흠칫하더니 대답했다.
“있어.”
“빅토르도요?”
“아니, 내 사람들이 같이 갔었지.”
아마 내 물건들을 별장에 따로 보관하려고 보냈을 때, 루슬란 오빠가 함께 갔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빠는 그때 갔었던 사실에 상당한 죄책감을 느끼는 듯 했다.
잠시 주저하던 오빠가 말했다.
“빅토르는 네 물건을 정리하는 걸 반대했었어.”
“……정말인가요?”
놀라서 되묻자 조수석에 있던 빅토르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계십니까? 어차피 한낱 경호원이 했던 이야기에 불과한데.”
“난 사실 그때 당신이 타티아나의 물건도 지키려는 걸 상당히 감명 깊게 봤었어.”
“그런 말 마시죠, 루슬란 님.”
“아니, 난 그때 당신이 옳았었다고 생각해.”
오빠는 꽤 고집 있게 말했고, 빅토르는 룸미러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난 그가 날 지키는 건 물론이고 내 물건까지도 지키려 했다는 사실에 먹먹한 감동을 느끼면서도, 굉장히 안타깝고 미안하기도 했다.
내 물건이라 해 봐야 별것 없었는데, 그걸 굳이 그가 지키려 했던 이유. 그리고 결국 그 뒤론 입을 꾹 다물고 내게 아무 말도 안 해 주고 곁을 지켜 주면서 그가 무엇을 느꼈을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것 같다.
하지만 빅토르는 언제나처럼 킬킬거리면서 경쾌하게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지난 이야기 해서 무엇합니까? 지금 찾으러 가는 거니 괜찮지 않습니까?”
“…….”
“전 루슬란 님이 이렇게 나서 주신다는 게 감사할 뿐입니다.”
그는 이 정도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난 정말 할 말이 많았지만, 그의 배려를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제일 감사한건 저예요. 오빠도, 빅토르도…… 소로킨도 모두요.”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자 룸미러 너머의 빅토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기뻐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럼 빅토르가 바랐던 대로, 무거운 이야기는 이쯤했으면 좋겠다. 앞으로 4시간은 가야 할 텐데 분위기가 무거우면 버티기 힘들다.
“가는 동안 뭐 할까요?”
“글쎄. 뭐 할까.”
루슬란 오빠가 약간 당황해하며 답했다. 목적지에만 신경이 쓰여서 4시간 동안 뭘 할지 전혀 생각이 없었다는 게 빤히 보였다.
그냥 쭉 이야기나 하거나 잠을 자도 괜찮겠지만, 이 때를 위해 가지고 온 게 있었다.
“카드놀이 하실래요?”
“무슨 놀이?”
“저 플레잉 카드 가지고 왔어요.”
“……??”
루슬란 오빠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기에 난 백에서 플레잉 카드 뭉치를 꺼내들어 보여 주었다. 카드뭉치를 보자마자 오빠가 빵 터졌다.
“푸하하하, 너 진짜 놀려고 작정했구나? 타티아나. 카드는 대체 어디서 가지고 온 건데?”
“전에 친구들과 가지고 놀던 거예요.”
“미치겠네 정말.”
말은 미치겠다고 하지만 표정은 굉장히 유쾌해 보였다. 오빠는 웃음을 그치고는 내게 카드를 받아 이리저리 섞으며 말했다.
“그리고 보니 넌 이런 류 게임 굉장히 잘했었지.”
“음…… 그랬었죠. 안 한지 꽤 된 게임들도 기억나네요.”
“기억을 되살리며 해 볼까?”
루슬란 오빠는 한 수 봐주겠다는 투로 말했다. 나 역시 호기롭게 받아쳤다.
“좋아요.”
물론 난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최선을 다해 상대해 주었다.
그리고 시작하자마자 루슬란 오빠는 내게 이마를 다섯 번이나 연속으로 얻어맞고 전의를 상실했다. 카드에 트릭이 있는 것 같다면서 이리저리 살피기도 했다.
“이상하네…….”
“후후.”
난 그저 웃기만 했다. 내가 계속해서 이길 수 있었던 건 그간 오빠의 행동과 심리를 지켜보면서 거짓말을 잘 분별해 낼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물론 오빠도 베르체노프의 후계자로 교육받으면서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했지만, 내 날카로운 분석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오빠는 기본적으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