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3화
정확히 4시간 정도 걸리는 여정은 체감상 1시간 정도로밖에 안 느껴졌다.
우리는 카드놀이 외에도 다양한 게임을 하기도 하고, 빅토르가 가지고 온 간식을 먹기도 했다. 대화는 한 번도 끊어지지 않았다. 정말 어디론가 놀러 가는 기분이었다.
사실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을 생각한다면 이런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기도 하겠지만, 무거운 침묵 속에서 다들 가만히 앉아 가는 것보단 이렇게 가는 게 훨씬 좋았다. 그리고 그렇게 심각할 일도 아니고.
잠시 다른 곳에 두었던 내 물건을 챙기러 가는 것뿐이다. 전부라 해 봐야 얼마 되지도 않을 뿐더러, 전부 챙길 생각도 없었다.
이제 와서 인형 같은 걸 챙겨 봐야 무엇하겠어? 그녀의 기억과 감정, 취향과 성격이 혼재되면서 내 모든 것 또한 영향을 받고 있긴 하지만, 빨간색에 파란색을 넣으면 파란색이 되는 게 아니라 보라색이 되는 것처럼 파란색에 빨간색을 넣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좋다. 난 보라색으로서 생각하기로 했다. 내 곁엔 소중한 사람들이 많고, 몇몇 물건보다는 이제부터 쌓아 나갈 것들이 훨씬 중요했다.
소중한 사람들과 같이 간다면 4시간 정도는 순식간에 흘러간다. 지루할 틈 없이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
한적한 시골 느낌이었다. 저 멀리 산도 보였고, 마을처럼 보이는 곳도 있었다.
별장은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사방이 나무여서 숲 냄새가 물씬 났다. 차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2층짜리 건물이 보였다. 혹시 나무로 된 통나무집이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었는데, 그렇진 않고 그냥 고풍스러운 스타일로 지어진 벽돌 건물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내리자 건물이 조금 더 분명히 보였다.
굉장히 어렸을 때 딱 한 번 봤었던 별장에 대해 지금까진 그저 어렴풋하게만 떠올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느낌이 이상했다.
잘 모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희는 여기에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쉬고 있어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멍하니 건물을 올려다보는 사이 빅토르와 루슬란 오빠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제야 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나긴 하지만 이렇게 오래 전 기억은 희미한 게 당연했다. 추억이나 감정 역시 멀게 느껴진다. 약간 묘할 뿐이지 특별히 기분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들어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빠가 앞장섰다. 미리 챙겨 온 열쇠로 문을 열고,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
첫 인상은 시간이 멈춰 있는 공간 같다는 이미지였다.
몇 년이나 이대로 있었던 걸까.
대략 9년 정도 될 것 같다. 아마 2년 전엔 사람들이 한 번 왔다 갔겠지만, 청소를 한 건 아니어서 내부는 이곳저곳 뽀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기억을 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오빠가 살짝 물었다.
“어때? 타티아나.”
어떠냐고 물으면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억들과 뒤섞인 감정들이 흔들거리긴 하는데, 그건 좋거나 싫은 분명한 감정들이 아니라서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난 그저 중얼거렸다.
“기억나요…… 선명하진 않지만.”
그리고 선명하진 않지만 상당히 내 깊은 곳까지 다다르기도 했다.
나는, 그녀는 코시기나의 저택이 불타 없어진 것에 대해 끔찍할 정도의 분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애정을 느끼지만, 자신의 추억이 짙게 남아 있던 공간에 대한 애착 역시 굉장히 강하게 있었던 것이다.
그 애착은 이 별장에도 옅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정말 약간뿐인데도, 난 거기에 신경이 쓰였다.
“…….”
“타티아나?”
“……괜찮아요.”
물론 거기에 사로잡히거나 휘둘릴 정도로 난 나약하지 않다. 그렇게 나약하고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면 이틀 전에 이미 반쯤 미쳐 버렸을 것이다.
난 지금까지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던 것처럼, 초연하게 이곳의 기억을 느꼈다.
오빠는 조심스럽게 날 안내했다.
“네 물건들은 창고 쪽에 있어.”
천천히 오빠를 따라갔다. 창고는 주방으로 보이는 곳 옆에 위치해 있었다.
“잠시만.”
오빠는 혼자서 그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부스럭거리더니 먼지가 쌓인 종이 상자 하나를 안고 나왔다.
먼지로 손이 더러워졌는데도, 오빠의 표정은 그런 것에 대한 불쾌감보다는 부끄러움과 안쓰러움만이 드러나 있었다.
내 물건이 겨우 저걸로 전부라는 사실에 부끄러워해야 할 건 나인 것 같은데, 왜 오빠가 힘들어하는지 모르겠다. 난 작게 웃으며 말했다.
“상자 하나면 충분하죠.”
“…….”
루슬란 오빠는 말없이 상자를 내려놓았다. 테이프를 뜯어내니 그 안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는 물건들이 보였다.
“와, 다시 보니까 반갑네요.”
처음 보는 것인데도 처음 보는 게 아닌 기묘한 기분은 이제 익숙했다. 약간 데자뷰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반갑다는 감정은 진짜였다. 난 진짜를 따르기로 했다.
가장 위에 있는 꽃병과 가습기를 꺼냈다. 지금은 시스템 에어컨이 습도도 조절해 주니 필요 없는 물건이긴 하다.
그다음은 컵과 인형들이었다. 표범인지 원숭이인지 모를 요상한 캐릭터. 가지고 가서 올려 두면 조금 귀여울진 모르겠는데, 솔직히 보라색인 내 취향은 아니다.
그리고 다음은 카세트 플레이어와 액자였다.
“…….”
액자 안의 그림엔 검은 새가 그려져 있었다.
기억 속 책의 페이지를 넘겨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이 그림은 학교에서 그린 것이었다. 주제는 내가 되고 싶은 것.
왜 검은 새였는진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손 가는대로 그렸던 기억만이 남아 있었다.
난 한참 동안이나 액자를 바라보다가 한쪽 옆으로 챙겼다. 이건 가지고 가야 할 것 같다.
“이건…….”
그리고 상자 바닥에서 난 또 하나의 상자를 발견했다. 귀중품을 넣을 수 있도록 자물쇠가 달린 장식 나무 상자였다.
이 안에 뭘 넣었더라.
옆에서 날 지켜보던 루슬란 오빠가 툭 물었다.
“비밀번호 기억해?”
“……글쎄요.”
숫자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생일이나 전화번호처럼 기억하기 쉬운 숫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숫자가 아니어도 손이 자물쇠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난 그냥 손이 가는 대로 자물쇠의 암호를 맞추었다. 자물쇠는 한 번에 풀렸다.
“아.”
그 안에는 작은 수첩과 카세트테이프가 들어 있었다.
열기 전까진 무엇을 넣었었는지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하고 잠잠했었던 기억이 갑자기 요동쳤다. 강렬한 감정이 함께했다.
난 떨리는 손으로 수첩을 펼쳤다. 시를 옮겨 적은 수첩이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중간 즈음을 펼쳤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시의 제목은 나 홀로 길을 가네.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의 시였다.
집을 떠나기로 했던 밤. 정말 고요한 밤이었다. 별들은 서로 속삭이고 하늘은 드넓었다. 시에서 그리는 밤하늘처럼 느껴지는 아름다움이었다.
창문을 열어 놓고 한 문장씩 시를 옮겨 적다가, 한참 동안이나 펜을 멈추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과거는 전혀 후회스럽지 않다는 본래 시구를 고쳐 쓰기도 했다. 모든 것이 후회스러웠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단다. 그저 사고, 사고일 뿐이었어.’
어머니 빅토리아는 몇 번이나 그렇게 다독이곤 했다. 주어진 평온에 안주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항상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아프고 괴로워했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게 죄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견디지 못했다.
“…….”
수첩을 보면서 예전 일들을 떠올리던 나는 이번엔 카세트테이프를 꺼냈다. 여기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 흔적을 다시 들어 보지 않을 순 없었다.
난 카세트 플레이어를 열고 카세트를 넣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니 잠시 지직거리더니 곧 작게 읊조리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 안개 속 자갈길을 걸어가네…….
앞서 수첩에 적었던 레르몬토프의 시에 멜로디를 붙인 노래였다. 민요로도 많이 불러서 애창자가 많은 곡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영원히 잠들고 싶다는 가사는 아이가 담담하게 부르기에 좋은 가사로 보기 힘들다. 곁에 있는 루슬란 오빠가 숨도 못 쉬고 굳어 있는 게 느껴졌다.
“…….”
난 기록된 노랫소리를 들으며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미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감정은 거의 사그라들고 잿빛으로 물든 피로감만이 남아 있던 때였다.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정신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되돌리기엔 너무 먼 곳까지 온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매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듣게 되었다. 이름 모를 가수의 노랫소리는 한 번 들었을 뿐인데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마음의 결정은 서서히 내려졌고, 되돌려지는 일은 없었다.
“…….”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음악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단 한 곡의 음악이 일종의 방아쇠가 되어 삶을 좌우하고 운명을 움직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때문에 왜 그랬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하고 있기에.
하지만 세상 단 한 명의 이해자가 나라도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작게 속삭이는 노랫소리는 중간을 채 못 가고 끊어졌다. 카세트 플레이어의 건전지가 다 된 것 같았다.
“타티아나…….”
오빠가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난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안 괜찮다.
난 폐허에서 마지막으로 눈을 감을 때까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다시 분명하게 떠올렸다. 그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 아프게 날 몰아세웠다.
“…….”
하지만 괜찮다.
시에는 모든 것이 드러나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 사라지면서 마지막으로 찾으려고 했던 건 평온. 영원히 푸르른 빛이다.
베르체노프의 은인들을 더 이상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 때문에 스스로 온 곳으로 가려고 했지만, 사실 죽거나 실종되는 것 역시 모두를 힘들게 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지금 처한 이 상황은 곧 그녀가 가장 바랐던 상황이기도 했다.
내게 두 번째 기회를 쥐여 주는 것으로 그녀는 하나뿐인 기회를 잃어야 했지만, 이 기적에 기꺼이 협조해 주었다.
정녕 이런 상황밖에 해답이 없었나. 그런 생각이 들어 슬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루슬란 오빠를 보니 안도감이 든다.
“괜찮아요.”
그간 계속 지켜보던 검은 새는 평안을 얻었을까.
난 제멋대로인 데다가 엉망진창이었으니까…… 아마 완전히 만족하진 못했겠지. 그럼에도 가만히 있었던 건 내가 편할 대로 그녀를 지워 버리지 않고, 늘 고민하고 답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이젠 알 것 같다. 난 그녀의 생각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과거를 이겨 내는 모습을 보며 어떤 선택을 하고자 마음먹었는지 역시 이해할 수 있었다.
기억 속 그녀는 어이없어하기도 했지만, 홀가분하게 웃기도 했다. 그 웃음엔 가벼운 만족감이 담겨 있었다.
나는 분명하게 확신한다. 검은 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하며 떠나갔다고.
그 신뢰로 모든 걸 내게 맡겼다. 이젠 그만큼 잘 해 나가야만 했다.
“……손수건 가지고 계신가요?”
“어? 어…….”
루슬란 오빠는 약간 당황해했지만 그래도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내게 건네주었다. 난 그걸 받아 눈가를 꾹꾹 누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갈까요.”
“벌써?”
“예.”
단호하게 말하자 오빠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허리를 굽혀 다시 상자를 들려고 했다. 상자를 잡기 전에 내가 말했다.
“아뇨, 그냥 두세요.”
“안 가지고 갈 거야?”
“전부 필요하진 않아요.”
난 저 상자 속의 물건들은 이제 추억으로 이곳에 두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책상에 올려놓을 물건을 여기서 가지고 갈 필요는 없었다.
딱 하나만 빼고.
“이 액자만 가지고 갈게요.”
“……그거면 돼? 카세트는?”
난 음악가로서 자신의 음악이 녹음되어 있는 매체는 그 자체로 영혼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 카세트테이프는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저걸 내가 가지고가서 자꾸 틀어 본다면 평안을 찾은 검은 새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그러리란 확신이 들었다.
액자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노래가 필요하다면 다른 노래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난 성악을 배우기까지 했으니 더 잘할 수도 있다.
난 아직도 걱정스레 바라보는 오빠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전 다른 노래를 부르며 걷는 걸 좋아해요. 초원의 회색 독수리에 대해, 그녀가 사랑하는 이에 대해,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편지에 대해.”
어떤 노래 가사인지 곧바로 알아차린 오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카츄사를 부르는 건 한 번도 못 봤는데.”
“당연하죠, 처음이니까요.”
“하.”
오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숨을 내뱉더니, 걱정을 누그러뜨리며 웃어 보였다.
난 손에 들린 액자를 잠시 내려다보고는, 밖으로 나왔다. 빅토르는 내가 이것저것 물건들을 챙기지 않고 액자 하나만 챙겨 나온 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